소희의 방(이금이)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내면의 문제로 고민할 때
- 2011. 2. 21.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후속작. 세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소희의 이야기가 나왔다.
착하고, 어른스럽고, 책임감이 강했던 소희는 할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고단한 삶이 결코 멀어지지 않는다. 고모집에서 작은집으로 이어지는 가난과 외로움은 소희를 더욱 단단하고 어른스럽게 만든다.
힘든 소희에게 마치 하늘의 선물인양 어머니와 한 집에 살게 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환경의 가정으로 들어가지만, 절대 쉽게 ‘가족’을 이룰 수는 없었다. 소희 존재 자체를 ‘마음의 족쇄’처럼 여기는 친엄마와, 엄마의 사랑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우혁이나, 그 속에 이물질처럼 섞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소희가 새롭게 가족을 이루는 모양은 아슬아슬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여기에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마음의 위안을 찾아주는 채팅 친구 디졸브(재서) 이야기까지, 소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소희가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되는 과정을 오밀조밀 보여준다. 특히 ‘조수석’에 얽힌 이야기들은 작가의 섬세한 안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볼 수 있겠다.
아쉬운 점은, 소희에게는 정말 잘 된 일이지만, 생각보다 쉽게 행복이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 사실 소희가 걸어온 길이 절대 녹록치 않은 길이었지만, 소희의 가출, 엄마와의 극적인 화해, 리나의 등장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 등은 조금 급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작가가 힘들었던 소희에게 주는 선물은 아니었는지?
어쨌든 가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하면서도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만한 책이 나왔다. 그리고 다들 미르와 바우의 이야기도 궁금할 것이다. 소희처럼 행복하게 건강하게 자랐으면.
<인상 깊은 구절>
(22) 식당에서 나온 엄마가 소희를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작은집은 수서역에서 한 정거장 거리인 일원역 근처에 있었다. 조수석에 놓인 가방을 치우는 대신 소희를 뒷자리에 타게 한 엄마는 출발 전 작은집 아파트 이름을 네비게이션에 찍었다.
✎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탈 때마다 아주 사소하면서도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다. 정말 사소하지만 어느 좌석에 앉아야 할까 하는 것이 매번 골치 아프다. 운전자와 나의 관계가 확연한 경우엔 조수석이거나 뒷자리인데, 어떤 경우에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무척 고민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엄마와 소희의 어색한 만남을 조수석의 가방과 뒷자리에 앉은 소희를 통해 참 섬세하게도 잘 보여주고 있다. 소희는 엄마에게 조수석의 가방보다 덜 친밀하고 불편한 존재인 것이다.
(48) “우진이는 형이랑 뒤에 타고 소희가 젤 먼저 내리니까 앞에 타.”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귓불에서 귀고리가 달랑거렸다. 그 모양이 소희 가슴 속에서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소희는 우진이의 손을 놓고 얼른 앞자리에 탔다. 엄마 옆자리에 앉는 건 처음이었다. 비록 조바심이 날 만큼 더디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다 곧 십 수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느 모녀지간처럼 될 것이다. 엄마와 수다 떨고, 엄마와 쇼핑하고, 엄마와 여행 가고, 엄마와……. 상상만으로도 소희는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우혁이가 모습을 나타내자 엄마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차 앞까지 온 우혁이가 갑자기 멈추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형 얼른 타.”
우진이가 차창을 열고 소리쳤다. 그런데도 우혁이는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소희가 앉은 쪽 문이었다. “왜 안 타?”엄마가 차창을 열고 채근하자 우혁이가 입을 열었다. “앞에 탈 거야.”안전벨트까지 매고 있던 소희는 민망해져 엄마를 바라보았다.
✎ 아이들은 본능적이다. 조수석에 앉아 조금씩 행복한 상상을 시작한 소희나, 조수석을 뺏긴 것을 엄마를 뺏긴 것처럼 생각하는 우혁이나.
(64) 소희는 그 동안 아무리 친모지녀간이라고 해도 십 년이 넘는 공백을 단숨에 뛰어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여기며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아니었다. 엄마는 소희에 대한 마음의 빚을 이미 돈으로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엄마에게 건네주었던 봉투와 소희에게 사 준 값비싼 물건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처음엔 엄마가 그만큼 소희 자신에게 큰 빚을 졌음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속아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그랬다. 빚에는 돈으로 갚을 것과 마음으로 갚아야 할 게 따로 있다고. 돈으로 갚아야 하는 빚을 마음으로 눙쳐도 안 되고 마음으로 갚아야 하는 빚을 돈으로 해결해서도 안 되는 법이라고. 엄마가 소희에게 진 빚이야말로 돈으로 갚을 수도 없고, 갚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 ‘돈으로 갚을 것과 마음으로 갚아야 할 빚’ 일반적으로 수긍하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구절이다. 하지만 인간관계 속에서 대개 마음의 빚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하려는 것이 습관처럼 퍼져 있다. 나도 마찬가지. 찾아가 보지 못한 미안함, 더 사랑을 쏟아주지 못한 미안함, 아이와 더 놀아주지 못하 미안함을 선물이나 물질로 보상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할머니 말씀이 백 번 옳다. 마음으로 갚지 못한 빚은 영원히 남는다. 그것도 이자가 몇 배로 불어나. 마음의 빚은 그때그때 마음으로 갚아야 한다. 소희처럼 큰 상처가 되지 않으려면.
(76) 작은엄마는 부모 없는 소희가 무료 급식 대상자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작은아빠도 소희에게 들어가는 돈이 줄어들어 작은엄마 눈치를 덜 보게 된 것을 기뻐하는 듯했다. 소희는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초라한 존재임을 느끼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바우, 미르와 연락을 끊은 건 정확히 그때였다. 엄마 집으로 올 때 소희는 작은집을 떠나는 것도 좋았지만 자신을 무료 급식 먹는 아이로 기억하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더 좋았다.
✎ 무상급식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뜨겁다. 얹혀사는 존재인 소희가 그나마 작은집에 보탬을 준 무상급식은 다른 아이들과 소희의 벽을 확연하게 갈라놓고 소희의 마음에 친구들과 벽을 확실히 세우게 한다. 이래도 선별적 복지고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까? 소희처럼 초라함을 느끼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급식을 모두 평등하게 할 날이 언제 올까?
(208-209) 자신이 엄마의 족쇄였다는 말은 계속 소희의 일상은 물론 꿈속까지 따라다녔다. 그 사실은 자신이 할머니의 짐이나 작은집의 거치적거리는 돌멩이 같은 존재라고 여길 때보다 소희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고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엄마에게조차 그런 존재가 되는 게 견딜 수 없어 자다가 벌떡 일어나 가방을 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참함과 절망감이 옅어져 갔다. 내성이 생겨서가 아니라 어느 날 문득 깨달은 생각 하나가 자리를 넓혀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져 산 내내 자신이 엄마 삶을 옥죄는 족쇄였다는 말은 소희를 향한 원망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한시도 잊을 수 없고 떨쳐낼 수 없는 존재였다는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그 생각은 냉기로 가득 차 있던 소희의 마음을 저 밑바닥부터 서서히 데우기 시작했다.
✎ 소희는 정말 영리하고 배려심이 깊다. ‘족쇄’라는 말이 상처가 되지 않고, 엄마의 애정의 다른 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소희가 너무 어른스럽고 이해심이 깊다고 할밖에.
(227) 사람 사는 일도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떨어져 산 세월이 얼만데 그렇게 금방 그 시간들을 뛰어넘을 수 있겠니. 휴대폰 약정 기간처럼 너와 네 엄마, 그리고 네 동생들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채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
✎ 사람과의 거리가 정말 떨어져 산 시간만큼 함께 있으면 채워질 수 있는 것일까? 어찌 보면 소희는 참 짧은 시간에 정이 깊은 가족을 이룬 것 같다. 소희에게는 잘 된 일이지만, 독자로서는 비현실적이라는 판단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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