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좀 빌려줘(이필원)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를 힘들게 읽은 뒤라 이 책은 쉽게 읽혔다. 오히려 단편소설이나 청소년소설로서 문학성을 어디에 두어야할까 고민하며 읽었다. 모임 샘들과 이야기 나누던 중 이 소설에서 ’환상동화‘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며 좋은 느낌이 여운으로 남았다.

주로 고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중1~2 학생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갈등 상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기보다는 그로 인한 외로움을 위로하는 특별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SF를 잘 활용하여 표현했다. 생각해 보면 홀로 깊이 침전하는 사람들에게 안전과 위로가 먼저다. 그런 이야기를 중1~2도 읽을 수 있게 잘 담고 있다. 코로나로 가정에서든 교실에서든 외로운 청소년들이 많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외로움의 농도가 조금 연해졌으면 좋겠다.

 


1. 지우개 좀 빌려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떠오르는 이야기이다. 아빠와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 어머니 덕분에 지우개가 많은 고3 강우성에게 지우개가 매개가 돼 전학생과 친해진다. 전학생은 떠났지만 더 이상 지우개로 마음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 사람의 웃음에 다양한 빛깔이 있다는 섬세한 관찰과 만남의 여운이 좋다. 아침 전학생이 운동을 잘하는 이유에서는 환경 문제도 살짝 건드린다. 중1~2 남학생들과도 이야기 나눠 볼 수 있겠다.

(20) ’인간들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지우개를 빌려 달라고 한다고 들었어.‘
지우개를 빌려주고 비리다 보면 우정이 싹트고 잎이나다가 꽃도 핀다고, 결국 우정으로의 발전은 소소한 데서 출발하는 거라고 들었다며 전학생은 웃었다.



2. 안녕히 오세요
긴 가뭄과 역대급 태풍이 부는 이상 기후의 시대. 고대 바이러스까지 창궐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문제는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준다. ’경자년‘이란 설정이 재밌다. 요새 누가. 이 소설에는 이렇게 배경지식을 찾아봐야 하는 내용들이 몇 개 있다. 2020년, 2080년이 경자년이다.

(50) 살아남으려면 약간의 의심이 필요하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 어쩌면 모르는 사이에 힘껏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3. 호랑님의 생일날이 되어
제목에서 동화 ’산중호걸‘이 떠오른다. 따돌림으로 외로운 안고은은 고깔모자 여자애, 즉 호랑이의 생일에 초대된다. 호랑이와의 대화를 통화 살아갈 힘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전통적인 요소가 많다. 신령스러운 호랑이를 통해 힘을 얻고, 한반도 호랑이는 멸종된 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산다는 것에서 우리 민족의 믿음이나 정서 같은 것도 느껴졌다. 모임에서 이야기 나누다 이 소설이 “해리포터”의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일상 속 다른 세상의 이야기, 상상의 힘을 이야기해 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평했다. 공감한다.

(79) "너를 믿어, 너 자신이 믿어 주는 네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해 봐."
내가 나를 믿는다니. 어쩌면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는 고운에게 그건 너무도 어색한 일이었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이, 고운의 헝클어진 마음을 두드렸다.



4. 우는 용
제목의 ’용‘은 범종의 ’포뢰‘를 말한다. ’운다‘는 말에서 우리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반전이 있어 줄거리를 소개하는데 조심스럽다. 다만 사춘기 시기 부모님과 갈등이 많은 아이들이 부모님과 같이 읽어보고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 이 소설에서 용(범좀 포뢰)은 어머니 영역의 사물이면서 어머니와 수완을 연결해 주는 매개물이다. 힘들수록 시야와 생각이 좁아지겠지만 손을 내밀자. 사는 것이 중요하다.

(126) 다시 살고 싶다. 아직 끝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느 순간 나는 다시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5. 호박마차
드라마 “도깨비”의 삼신할머니가 떠오른다.
게임 사이트에서 만난 남자에게 당한 성폭력으로 고립돼 있는 윤희를 보호하여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야기이다.

 


6. 우주장
갈등보다 감수성이 훨씬 풍부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165) 어둠이 얼마나 고마우냐, 할머니는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얼마나 고마우나, 어두워서 빛나는 것들이 있는데. 할머니가 했던 말이 전부 내 안에 남아 있다. 이제 과거를 귀하게 여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둠뿐이던 과거였기에 차례차례 찾아온 엄마와 이모들이 각별히 반짝였다고, 외롭기만 했던 옛날이 이제는 좀 고마워진다고. 덜 미워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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