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반 소녀들(장정희)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내면의 문제로 고민할 때
- 2020. 7. 27.
(위험한 발언일 수 있지만) 코로나가 없었다면 두 형제는 지금처럼 우애가 돈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출근한 사이, 등교하지 못하는 고1과 초1, 이 두 형제는 9년이라는 시차를 넘어 같이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보내며 진한 우애를 다졌다. 엄마, 아빠와 자던 둘째가 형이랑 같이 자겠다며, 베개를 들고 형 방으로 갈 정도로.
다행히 등교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둘째는 기숙사에 들어간 형의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듯 심심하다는 말을 부쩍 많이 한다. 둘째 아이의 호흡에 맞게 함께 저녁을 먹고, 배드민턴에 야구를 하고, 책을 같이 읽고 얼른 재우고 다시 일어나려고 하지만 함께 자고 만다. 그리고 새벽 3시 무렵에 깬다. 다시 자기엔 허리가 아프고, 컴퓨터를 켜면 아침까지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날이 밝을 것 같고, 책장을 훑다 이 책 “사춘기 문예반”을 만났다.
작년에 작가님께서 광주국어교사모임의 집행부 샘들에게 보내주신 책이었는데 게으름으로 그동안 읽지 못했다. 책장을 보니 여러 인연으로 채워진 새 책들이 적잖다. 빚이 많다.
혁신학교를 지원하는 일을 2년간 맡으면서 내가 '국어-교사'임을 잊고 산다. 수업을 하지 않으니 학교 구조나 정책 같은 좀 더 큰 담론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래서 내 블로그도 사람 냄새가 옅어지는 것 같다.
사흘을 내리 새벽에 읽어서인지, '학생'이라는 단어가 갖는 생명력의 크기 만큼 여고생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삼각김밥으로 끼니 때우기를 밥먹듯이 하는 등 사는 것이 힘들어 온몸으로 삐닥함을 보여주는 선우가 어떻게 클지 궁금하다. 넉넉한 형편이지만 그 모든 지원이 조건적이며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절박하게 온몸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미수도 이름 때문에 불안하다. 하지만 '문예반 소녀들'이니 대책 없이 엇나가지는 않을 거라는 안전막을 느끼며...
그런 선우에게 소통할 욕구와 소통의 방법을 깨우쳐 주는 어른이 ‘문쌤’이다. 문학쌤의 줄임말일 것 같다.
문쌤은, 문학 선생님 또는 교사가 어떤 존재여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글은 소통이고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 자신의 아픔을 직시할 수 있어야 치유도 시작되며 성장할 수 있고, 우리는 거대 담론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나’라는 개인에게 있어서 소소한 일상이 삶의 총체일 수 있고.
(69) “.. 해피 엔딩에 대한 갈망은 척박한 현실을 견뎌야만 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품는 등불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마찬가지로 세상은 거대한 프레임에 의해 작동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소한 것에서 촉발된다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글은 거기에서 삶을 관통하는 질문을 끌어내는 거고.”
(84) “내가 너희들에게 글쓰기라는 명분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니? 대부분 외면하거나 지나치기 때문일 거다. 상처 입은 조개에서 진주가 만들어지듯, 사람들이 가진 아름다움도 상처에서 나오는 법이다. 나무의 나이테를 봐라. 옹이가 있으니 무늬가 만들어지잖니?
문쌤의 대사는 한 구절 한 구절이 교사로서 큰 깨달음을 준다. 국어교사로써 우리는 소통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요령이 아닌 소통을 통해 성장하는 소통의 전문가.
선우의 담임쌤은 그런 문쌤과 정확하게 대비된다. 쌤으로써 그는 입시를 위한 학급 경영자이고 관리자다. 소통이 없기에 개학하자마자 학생들에게 학교생활을 질리게 만들기도 하고.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학생을 꿈꿀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우리 교사들의 역할인데..
(149) ”사는 게 뭐가 이리도 거지 같냐? 첫날인데도 벌써부터 지겨우니...“
(188) 이윽고 문쌤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문밖으로 나가 문쌤을 배웅한 뒤 자동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흥! 선생이란 족속들은 교묘한 희망으로 아이들의 능력을 과도하게 포장해 현혹시키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러니 속으면 안 된다. 사탕발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말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233)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재능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씨앗’ 같은 거란다. 내 마음이 원하는 길을 따라가며 물을 주다 보면 그 씨앗이 언젠가는 싹이 돋고 꽃을 피우게 될 거야. 피우려는 노력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말야. 물론 빨리 필 수도 있지만, 아주 천천히 필 수도 있지. 게다가 모든 꽃이 봄에만 피는 게 아니잖니? 여름에 피는 꽃도 있고, 가을에 피는 꽃도... 심지어는 겨울에도 피잖아?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면 안 돼.“
한편 문쌤은 어른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우에게 가족의 어른들은 결함이 있다. 게임에 미쳐 가족을 버렸지만 주위를 맴도는 아빠, 잠자는 사이에 가출한 엄마, 그래서 선우는 잠이 무섭다. 지금까지 자기를 돌보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소통은 되지 않는 할아버지.
그런 가운데 문쌤은 어른에 대한 믿음을 재고하게 해 준다.
(165) 문쌤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상대의 말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도 질책하지 않는 저 눈빛. 교실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동아리시간만 되면 말이 많아지는 이유는, 되는대로 내뱉는 말에도 귀를 열어 주고 소중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문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든 할아버지든 지겨운 남자들만 봐 왔던 나로서는 생각지 못한 일이다.
미수 엄마, 사소하지만 주희 부모를 통해서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자녀를 자기 욕망의 대리자로 키우고, 중요하지 않는 일로 갈등을 만들어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모.
(240) ”우리 미수가 왜 이 지경이 됐니? 괜히 문학이랍시고 허파에 바람만 잔뜩 밀어 넣은 그 선생 같지도 않은 나부랭이 때문이 아니고 뭐겠니?“
(244) ”저는 미수가 부러워요. 제게는 부모님이 다 안 계시거든요. 엄마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아빠도 소식이 끊어져 어디 사는 줄도 몰라요. 택시 운전을 하는 할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날마다 잡아먹을 듯이 싸워요. 밥도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어요.“
시골에서 키운 농산물을 시장에서 내다파는 할머니를 통해 부모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미수 엄마와 잘 대비시켜 준다.
(129) ”내가 아들 둘에 딸 둘을 뛌는디... 모다 시집 장가갔어. 착하기는 오살나게 착헌디 으째 사는 게 다들 폭폭해. 그래도 으찧게든 살아 보려고 허제. 그것이 고마워서 닿는데까지 힘을 보태주고 잡고.“
학생들이 공동 창작시를 만드는 과정도, 만든 시도 인상적이다.
여하튼 일체개고라는 말처럼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많고 이를 글로써 힐링하는 소녀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에 대한 철학, 창작 방법들, 감상 태도 등에 대해서는 같은 길을 걷는 선배님의 조언을 차분히 듣는 것 같아 공감하며, 성찰하는 시간도 되었다.
아참 학교생활에 있어 ‘동아리 활동’의 의미도 새삼스럽게 느꼈다. ‘교과’로 분절된 우리 학교에서, 학생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관계를 만들어 가고, 그것에 시간을 더해 실제 삶의 의미로 확장하는, 학생자치 활동과 관련하여 자율동아리 활동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감했다.
학생들은 절로 크는 것 같지만, 우리 쌤들은 다 계획이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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