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백온유)

‘유원’
제목이 눈에 띄었다. ‘유언’ 같은 단어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You won'도 아닐 것 같고, 딱히 연상되는 단어가 없는 걸 보니 주인공 이름이겠거니 했다.
맞았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빚진 듯, 남들이 바라는 삶을 살아야 했던 ‘유원’의 홀로서기가 인상적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어도 우린 다른 사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데..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산다. ‘유원’의 이름에는 그런 뜻이 잘 담겨 있다. ‘유원’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두 사람이나 희생됐다. 그중 한 사람은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며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사람이라 ‘유원’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 자체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원의 이야기를 아는 대다수 사람들의 색안경도 부담스럽고.

‘유원’이 아닌 내 뜻대로 살고 싶지만 진 빚이 많아 쉽지 않다. 특별한 친구 수현을 만나지 못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나로서 존재로 하려면 결국 나를 둘러싼 세상을 깨야 한다. 익히 들었던 대로 새는 알을 깨야 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알 속 세상은 ‘당연한’ 중력 같은 거라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생각난다. 성장하는데 있어서 누구든 나에게 성장의 계기를 줄 수 있다. 존재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다. 유원이도, 수현이도 그랬던 것처럼.
이럴 때 ‘교사’는 참 어렵다. 다만 기득권의 대리인이란 사명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유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문득 이옥수 님의 “파라냐”가 생각난다.
홀로 남들이 바라는 삶에 저항했던...

 

(119) 수현은 집 구경을 하면서 거실 장 위 텔레비전 옆에 놓인 액자들을 살폈다. 나는 수현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수현의 시선이 언니 사진에 올래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할머니도, 신아 언니도, 아저씨까지 언니 사진을 가끔 유심히 바라보곤 한다. 이 집에 언니가 남긴 흔적이 아무래도 너무 많다. 엄마는 다 불타 버리는 바람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언니가 지겹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딸꾹질을 했다.

(128) 대부분의 일에 유하게 넘어가는 수현이 가끔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정치 문제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늘어놓을 때, 내가 별생각 없이 “다 똑같잖아. 정치인들은.”이라고 한 말에 그건 아니지, 하며 내가 모르는 정치인의 정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러다가 흥분하고 거칠어질 때 나는 아연해졌다. 수현의 진지함 때문에 지금은 그런 거 몰라도 되지 않느냐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가끔 수현은 단기 아르바이트도 나갔다. 일당을 받으면 내게 볼펜을 선물하거나 밥을 사 주었다.
내가 나로 이루어지게 된 어떤 이유들처럼, 수현도 어떤 기점이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140)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은 다 예뻐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 의외로 이타적인 구석이 있어서 포장을 잘 해 줘. 아, 너희 언니가 미화되었다는 건 아니고.”
이 와중에도 수현은 직설적이었다.
“너보고 언니 몫까지 행복하라고 하지? 두 배로 열심히 살라고, 그런 말 안 해?”
“해.”
“적당히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두 배나 행복하게 살라는 거야.”

(213) 아저씨는 평소보다 더 어른 흉내를 냈다. 내 앞에서는 유쾌하고 호탕한 어른의 흉내를 낸다면, 수현 앞에서는 근엄하고 중후한 어른 흉내를 냈다. 나는 속으로 웃었고 수현은 소리 내어 픽, 하고 웃었다. 같잖고 어이없다는 듯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얘네 집에 돈 받으러 오는 거예요? 유원, 네 목숨값 너무 비싸지 않냐? 좀 깎아 달라고 해.”
나는 덩달아 혼나는 것처럼 말없이 서 있었다. 목숨값이라니. 속으로만 생각했던 걸 수현은 입 밖으로 내뱉고 있었다. 아저씨는 오랜만에 만난 딸의 서슴없는 말과 공격적인 태도에 놀란 듯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했다.

(246)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258) “우리나라는 이혼을 하게 되면 되게 혜택이 많아. 한부모 가정 지원 대상 가구로 선정되면 급식도 공짜로 먹을 수 있고, 이동 통신 요금이랑 전기세도 감면돼. 대출을 받을 때도 이자가 낮아진대. 임대 주택을 특별 공급으로 받을 수도 있어. 일찍 이혼을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엄마는 안 그랬어, 아빠가 개조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회피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아직 모른다, 같은….”

(269) “교회 주차장에 깔려 있는 자갈 같은 거 말이야. 뾰족뾰족하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그냥 그런 상태인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상태인 거야. 거기에 내가 넘어져서 긁히고 베여도 화를 내는 게 무의미한 거야. 내가 돌멩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무의미한 거고, 돌멩이도 내 감정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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