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미술관(김태권)


우리 학교 1학년 부에서 이 책을 읽고 있어 뒤늦게 읽었다. 제목 때문인지 “불편한 편의점”이 떠올랐다. ‘불편한’이란 수식어가 같아서였겠지만 내용 면에서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편한 편의점”이나 “불편한 미술관” 모두 익숙함에 대한 ‘딴지’가 그 시작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막을 깨야 그만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또 “말이 칼이 될 때(홍성수)”도 떠올랐다. “불편한 미술관”에서 이야기하는 ‘불편한’의 개념들이 이 책에도 대부분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권’에 관한 책이다. ‘인권’의 핵심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만나고 기억 남는 단어는 ‘자기결정권’이다. 자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끌고 갈 수 있는 권리가 국가나 타인에 의해 제한되는 것들이 결국은 인권 침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자기결정권

1부는 그림에 나타난 불편한 시선들을 이야기한다. 화가의 시선에서, 또는 관람자의 시선에서 불편한 시선을 이야기한다. 여성, 가난, 장애인, 이주민, 성폭력(남성 중심의 세계관), 성소수자, 제노사이드, 인신구속, 표현의 자유 등을 주제로.

2부는 1부의 문제들이 혐오에 대한 혐오를 해결할 수 있을까, 설득할 수 있을까를 다루고 있다. 2부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부보다 어렵고 심란해진다.

그런데도 이 책은 ‘미술관’ 하면 그림만 생각하기 쉬운데 조각, 사진, 영화, 그릇 밑바닥의 그림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모습이 신선했다. 현대 미술의 다양한 영역을 보여주면서도, 미술의 주제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편집이 아쉬웠다. 설명 바로 옆에 그림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뒷면에 인쇄돼 있어 여러 번 책 넘기기 불편했다. 또한 설명한 그림이 모두 제시되지 않아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중 몇몇 작품은 검색으로도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요새 음악 관련 책들이 QR코드로 음악을 바로 감상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듯, 저작권 문제로 실을 수 없는 작품(몇몇 홈페이지 주소가 제시되기는 했지만)은 QR코드를 활용해도 좋았겠다. 분량을 줄이거나 자간을 줄이거나 책을 두껍게 만드는 등 모든 정보를 담으면 좋겠다. 

<인상 깊은 구절>

(46) 인권의 역사에서 사회권은 비교적 최근에 인정된 개념이다. 오래전부터 인정받아온 인권 개념들과 결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라는 인권을 간략히 정의하면 개인이 말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두자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려면 정부의 개입이 적을수록 바람직하다. 반면 사회권을 실현하려면 정부가 할 일이 많다. 개인의 재산을 세금으로 거두어 나눠주는 일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사회권은 자유권과 충돌하는가?

 

 ‘자유’를 강조하는 경제체제를 거치면서, 복지를 바탕에 둔 자유의 확대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선거 결과를 통해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고 있다. 형편이 되어야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82) 익시온은 벌받아 마땅하다. 성폭력은 나쁜 짓이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자. 성폭력은 왜 나쁠까? 옛날에는 여성의 정조를 침해하기 때문에 성폭력이 나쁘다 했다. 그럼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덜 나쁜가?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다. 인간은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할 자유가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결정권. 성폭력은 성적인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그래서 나쁘다.

 

 익시온은 그리스 신화에서 해라 여신을 강간하려다 지옥에서 영원히 쉬지 않고 돌아가는 바퀴에 묶이는 벌을 받았다. 삼강행실도에 나타난 남성 중심의 세계관, ‘수산나와 두 노인’,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같이 같은 이야기이지만 다른 시선이 반영된 사진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110)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나치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좌파며 여호와의 증인이며, 자기네와 사상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 핏줄이 다른 사람도 죽였다. 유대인과 로마족, 그리고 슬라브 사람을 살해했다. 성소수자도 학살했다.
동성애자가 핍박받는 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은 사회다. 동성애자의 인권 수준이 그 사회 인권 상황의 척도인 까닭.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 안의 성소수자는 충분히 존중받고 있는가.

 

 ‘자기결정권’이라는 기본권임에도 우리 사회의 성소수자는 정권에 따라, 종교의 입김에 따라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더 엄혹한 상황이다.

(126) 피카소도 그림을 쩍 갈라 희생자와 학살자를 배치했다. 피카소의 대작 ‘한국에서의 학살’. 배경이 한국전쟁이다. 한복을 입은 듯한 아이도 보인다. 죽는 사람은 한국의 민간인, 그럼 죽이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생각하는 답이 있지만, 강요하지 않겠다. 사실 누가 죽였건 마찬가지 아닌가. 민간인을 죽이는 군대는, 이미 역사의 법정에서 범죄자다. 민간인에게 총질한 쪽이 미군이건, 한국군이건, 북한군이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저지른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고야의 ‘5월 3일의 학살’ 등은 국가 즉 군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 역사에도 이런 안타까운 사건이 참 많았다. 현대사를 거치면서 제노사이드의 규모는 더 커지고 있다.

(169) ‘인권감수성’이라는 말이 있다. 특정한 말이 상처를 주는 말인지 아닌지,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말인지 아닌지, 어떤 사람은 바로 알고 어떤 사람은 설명을 들어도 모른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화만 내는 사람보다, 바로바로 알아차리고 조심하는 사람을, 우리는 인권감수성이 높다고 말한다. 어려운 문제를 묻고 또 물으면 인권감수성이 자라지 않을까. 
(176)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도 알아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장님’과 ‘벙어리’는 쓰면 안 되는 표현이다. 오래전부터 차별하는 말로 쓰였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이다. 그러니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나 ‘벙어리 냉가슴 앓듯’ 같은 속담은 사용하지 말자.

 

 ‘인권감수성’, ‘정치적 올바름’ 비슷한 계열의 단어다. 이들을 강조하다 보면 ‘과유불급’이라는 단어가 바로 연결된다. 저자 역시 이게 효율적인 방식인지 고민한다. 이 맥락에서 저자는 ‘그녀’를 사용하지 않고 ‘그’를 여러 곳에서 사용한다. 눈에 띄었다.

(209) 왜 여성인권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느끼는 남성들이 나타날까. 피해는 원래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해서 그럴까. 여성이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피해가 자기한테 떠넘겨진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217) 어쩌면 남자들은 ‘백마 탄 기사’라는 스테레오타입에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남자는 여자에게 기사 역할을 빼앗길까 불안해하다 여성혐오에 빠진다. 반면 어떤 남자는 여성혐오라는 괴물에 맞서 여자를 돕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자들 눈에는 이 역시 백마 탄 기사 역할놀이로 보이지 않을까?

 

참 어려운 문제다. 특히 남성의 여성혐오에 대한 연대의 시각이, 남자 스스로의 역할에 갇혀(백마 탄 기사와 같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시각이 낯설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누구든 그 시대의 관념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스스로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우면 된다는 말에 공감한다. 다만 우리나라의 징병제가 이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 비용 등을 고려할 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스테레오타입’ 인쇄할 때 쓰는 단단한 판을 말한다. 즉 복사를 위한 원본 같은 것. 스테레오타입은 한 번 만들면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 고정관념’을 뜻한다고 한다. 

 

(243) 오늘날 우리 사회 인생의 세 단계를 그리면 어떻게 될까. 친구가 이렇게 농담을 했다. “할아버지는 ‘태극기 집회’, 아버지는 ‘깨시민’, 아들은 ‘일베’.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는 웃지 못했다. 정치적 지향이 문제가 아니다. 세대 사이 적대감이 문제다. 아들이 일베를 하고 할아버지가 태극기 집회를 나가는 이유는, 어쩌면 아버지가 깨시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너무 싫은 나머지, 서로가 더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더욱 심해지고 있어 걱정이다. 특히 세대 간의 갈등을 정치적 이익과 연관 지어 더욱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 문제다. 어디서부터 개선해야 할까? 개선이 아닌 개혁해야 할까? 우리도 독일처럼 ‘정치교육’에 대한 모색이 더욱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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