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일찍이 오산 차천로가 독축관으로 뽑혀 갔을 때 일본인으로 글을 아는 자들과 만났는데 차천로가 종횡 분방한 필치로 어찌나 시를 잘 썼던지 명성이 널리 퍼져 그 나라 사람들이 깊이 흠모하였다. 그 뒤 백여 년 동안 통신사가 갈 적마다 반드시 조정에서 글 잘하는 사람을 가려 뽑아 이름을 독축관 겸 제술관이라 하여 문필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다 임술년 사행 때부터 일광산에서 제사하는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독축관이라 하지 않고 제술관이이라고만 하였다.근래에는 글에 대한 왜인들의 열의가 더 왕성해져 우리 나라 사행이 들어가면 그 문예를 흠모하여 모여드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학사 대인’이라 부르면서 시를 구한다. 글을 청한다 하여 거리가 꽉 차고 문이 메곤 한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