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김탁환)

 

작년(2021) 담양공공도서관에 들렀다 전남공공도서관에서 이 책을 일반인 대상 추천도서로  홍보하는 걸 보았다. "거짓말이다"를 통해 김탁환 작가의 필담도 경험했고, 월간지 "전라도닷컴"에서 웃는 얼굴로 우리 쌀을 소개하는 미실란 대표의 이야기도 궁금해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가 작년 8월 하순이었다. 들녘의 빛깔이 녹색에서 미세하게 바뀌고 있을 때였다. 나 역시 여름 방학을 마치고 기운을 내서 2학기를 살아야 하는데 기운이 나지 않았다. 2년 동안 학교 밖에서 생활을 하다 복귀한 학교는 코로나로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꼈다. 하루하루 가는 시간이 아쉬웠는데 얼른 일 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어느덧 지금 내 나이 대의 선배들이 고민하는 교사로서의 마무리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계속 아이들과 호흡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익숙한 것이 새롭게 느껴질 때 감탄과 감동을 받는다. 이 책을 읽으며 일상에서의 낯섦에 놀라며 감동을 느꼈다.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오랜 되새김과 함께, 여기까지 살아온 내 삶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살아가도 좋으리라는 힘을 얻었다. 교단에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찾아 읽으며 기운을 차리는 책이 있는데 이 책도 그 목록에 포함해야겠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란 제목 속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지켜가는 삶의 태도의 아름다움이 김탁환 작가와 미실란 이동현 대표의 대화 속에서 잘 느껴졌다.

이 책은 한 해 농사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발아-모내기-김매기-추수-파종. 일 년을 단위로 반복되는 일이지만 각 단계는 건너뛸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일과 비슷해 밑줄 그으며 공감했던 부분이 많았다. 장 별로 한두 개씩 문장을 선택했는데, 해 왔던 일에 대해 지칠 때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1장 발아 -한껏 솟아오르고 또 한껏 뻗어내려.

(42) 흐르는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쿵쿵 심자이 대북처럼 울렸다. 물소리가 다리를 흔들고 옆구리를 휘감고 얼굴을 덮었다. 내가 강으로 스미고 강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강과 내가 엉키고 울리고 치솟고 가라앉았다. 아득했다. 물 밖에서 물에 사로잡힌 것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웅장하고 청량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끽한 후엔 그 경험에 어울리는 단어를 고심하는 법이다. 아무리 찾아도 하나뿐이었다. 아름다움!


✎ 곡성읍을 흐르는 섬진강에는 침실습지의 '뽕뽕다리'를 비롯해 압록교까지 이른바 '잠수교'가 여러 곳 있다. 섬진강 자전거길을 달리다 보면 이 다리를 '세월교'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처음엔 고유명사인 줄 알았는데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어 검색해 보았더니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기능상 '잠수교'가 더 적절해 보인다. 섬진강의 잠수교에서는 물소리가 정말 가까이 들린다. 눈감고 들으면 물소리의 울림이 온몸에 전해진다. 눈높이를 맞추니 물아일체가 되었다는 이 구절에서 나 역시 큰 울림을 느꼈다.

 

(45) "그게 아름다운가요, 정말?"
왕우렁이가 잡초를 먹어치우지 않는다면, 제초제 없이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부는 새벽별을 보며 논으로 나와 일일이 잡초를 뽀아야 한다. 그 수고를 왕우렁이가 대신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냐고 이 대표가 되물었다. 농사를 방해하는 생물은 겉모양이 아무리 멋져도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입장이었다.


✎ 책 초반에 작가가 실학파들의 이야기를 하며 민중의 살길을 모색하는 학문이 '실'이고, 그래서 '진'이며, 그런 삶이 '미'와 연결된다고 말한다. 결국 '진선미'는 하나라고 한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진짜고 실용적이며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로 발견하고 지켜가야 할 것이 아름다움이다. 진선미의 일치는 삶을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삶들과 연결되기에 통합된다. 정말 '진짜'는 '진짜'다.

(47) "주머니에서 몽당초를 꺼내 힘껏 칠한 후 마른 헝겊을 양손으로 모아 쥐고 무릎을 꿇고서 빠닥빠닥 나무 바닥을 닦으면 맨들맨들 어찌나 빛이 났는지 모릅니다. 폐교로 들어가서 미실란을 꾸릴 때, 다른 건 다 바꿔도 교실 바닥은 그대로 두라고 했죠.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으니까요."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힘써 가꾼 뒤에 찾아든 아름다움이 소중해 이를 지키고자 하는 이동현 대표의 모습에 공감이 간다. 위의 세 부분은 '아름답지요?'라는 장에서 작가가 이동현 대표와 다니며 '아름다움'을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그 과정이 재미있고 인상적이다. 곡성군 전체의 인구수를 비롯한 여러 삶의 지표들이 서울의 한 동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곡성은 촌스럽고 아름다운 게 없는 곳인가? 아니다. 기준을 바꿔 시선을 돌리면 자연도 생활도 역사도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곳이다. 모두 사람들의 손과 삶이 배어 있는 '진짜'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 담양에, 그리고 전남에 이렇게 아름다움이 소멸되어 가는 곳이 대부분이다. 전남만 그러겠는가?


2장 모내기 -세상의 모든 마음을 주고받다.

(89) 농부나 어부의 매혹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농부는 땅, 어부는 바다에 매혹되는 족속들이다. 땅과 바다를 무한히 신뢰하는 것이다. 김종철도 지적하듯이, 그 땅과 바다에서 농부와 어부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노동 강도가 셀뿐 아니라 밥벌이를 못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을 겪더라도 농부와 어부는 땅과 바다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땅과 바다에서 지낸 삶에 만족한다. 땅 덕분에, 바다 덕분에 그래도 지금까지 먹고살았다는 것이다.

(91) 내 시간과 노력을 쏟는 대상에 대한 짙은 관심과 지독한 애정,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믿음이 특별한 경험을 만든다. 농부에게 그것은 논과 받을 이루는 땅이고, 어부에겐 바다나 강이다. 그 땅과 그 바다와 그 강의 풍광을 아끼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생물에게 매혹된다.
매혹되지 않으면, 마음을 주고받으며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찌 평생을 머물러 살겠는가. 근대식 공장노동자나 도시의 월급쟁이는 결코 모를 고통과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땅을 일구는 농부에게 벼와 왕우렁이와 물뱀은 매혹을 이루는 요소이자 기쁨을 나누는 벗이다.

 

✎ 내 시간과 노력을 쏟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지독한 애정이 특별한 경험을 만든다. 보람을 만든다. 진실성을 띠고 아름다운 삶이 된다. 교사로서 내 삶에 경종을 우리는 구절이다.


3장 김매기 -지키고 싶다면, 반복해야 한다.

(167) 종자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우리나라 농지와 기후에 맞고 맛도 좋은 벼 품종을 연구하고 개발하도록 투자와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 농부는 이렇게 육종된 벼 품종을 적극적으로 재배해야 한다. 국민은 일본의 유명한 품종 대신 우리나라에 최적화된 품종을 믿고 먹어야 한다. 이렇게 세 줄기가 저마다 역할을  충실히 하며 서로 어울려 줄기차게 흘러야만 종자 주권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마트에서 쌀을 살 때 생산 지역만 표시돼 있지 어떤 품종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가격 차이만으로 쌀의 질을 판단해야 하는 애매한 상황이다. 그런데 유독 품종을 강조하는 쌀이 있다. '고시히카리' 품종인데 차이 나게 가격이 비싸다. 우리도 품종 이름을 적어 놓아야 소비자 역시 종자에 관심을 더 갖게 될 것 같다.

 

(190) 인류가 지켜야 할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태도는 거리 두기다. 야생동물을 우연히 만나더라도 함부로 다가가거나 만지지 않는 것이다. 산림과 습지를 노는 땅 취급하며 거기에 도로를 만들고 인간을 위한 주거공간을 짓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야생동물은 야생동물답게 살아야 한다.


✎ 반복해서 등장하는 전염병들은 인류가 지나치게 야생동물과 그들의 서식지에 접근하고 간섭하고 심지어 그 전부를 파괴해 온 결과이다 자연생태계 유지를 위해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비단 사람에게도.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부모와 자녀가 한 몸이 되어 있어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 어마어마하다.

 

4장 추수 -여기까지 왔고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210) 그러므로 소설가에게 반복은 축복이다.
새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그러니까 0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다행이다. 구상을 하고 초고를 쓰고 퇴고를 거쳐 다시 작품 하나를 완성해 나간다. 혹자는 반복이 지겹지 않으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이 대표에게도 똑같이 던질 수 있다. 파종부터 추수까지 이어지는 벼농사가 지겨울까.
또하나의 장편소설, 또 한 번의 벼농사에서 새로운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면 지겨울 법도 하다. 그러나 지난번 소설이나 벼농사와 다른,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깨닫고 하루하루의 반복에 녹인다면, 지겨움은 사라지고 매 순간 집중하게 된다.


✎ 교사에게도 반복은 축복이다. 조금 더 익숙한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엄밀히 말하면 가르치는 학생도, 내용도, 상황도 매년 같을 수 없으므로 매번 새롭게, 집중해야 한다. 우리 직업의 축복이다.

(246) 다르다고 물리치지 않고 느리다고 타박하지 않고 어리다고 얕보지 않고 늙었다고 무시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걸어온 삶의 무늬를 본다. 듣는다. 어루만진다. 거대해지기를 꿈꾸지 않는다. 결실을 꿈꾸되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려 일한 만큼만 갖는다. 다 갖지 않고 직원과 이웃과 동식물과 나눈다. 거대한 존재를 만나더라도 주눅 들지 않는다.

 

✎ 작가, 농부, 교사 이름만 달라졌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5장 파종 -사람이 씨앗이다.

(276) 곡성을 비롯한 우리네 마을들을 들여다보라.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약하고 병든 생명을 돈이 되지 않는다고 내치진 않았다. 어떻게든 마을에서 어울려 살 방법을 찾았다. 조금씩 짐을 나눠지면서, 함께 웃고 울며 살아온 세월이 수백 년인 것이다.
이렇게 쌓인 마음의 역사와 공동체의 전통이 존중받지 않으면, 제대로 된 미래를 만들 수 없다.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빛바랜 낡은 유산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들을 아끼고 지키면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284) 늙어갈수록 희망이 줄어든다는 푸념을 종종 듣는다. 희망도 희망 나름이다. 다시 말해 소설가가 과학자가 된다거나 과학자가 어부가 되는 희망은 현격히 줄어드는 것이 맞다. 그러나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 세계를 풍부하게 하거나 농부가 자신의 전답을 알차게 가꿀 희망은 더 느는 법이다.


✎ 이 책을 읽으며 이동연 대표처럼 시골에서 희망을 찾는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먼저 내가 살고 있는 대덕면에서 여러 해 자연학교를 주도해 도시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며 자연과 공동체를 경험하도록 애써 주셨고 지금도 마을교육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시는 윤 선생님, 창평과 담양을 중심으로 마을교육공동체와 농민회 등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애쓰시는 김 선생님, 그리고 영광 묘량에서 작은 학교 살리기 운영과 여민동락공동체를 운영하며 지역 공동체를 살리고 있는 존경하는 친구 혁범이까지. 함께하지 못한다고 귀까지 닫지는 맑고, 나와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에게도 공동체와 연대의 경험을 연결해 보도록 고민해 보아야겠다.

 

*수필(문학)이지만 교사로서의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어 '교육' 카테고리에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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