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유득공, 서해문집)
- 행복한 책읽기/인문사회
- 2013. 9. 26.
책을 읽으며 지난 2010년 열하기행 중 열하행궁에서 발견한 유득공의 비문이 떠올랐다. 박지원의 자취만을 따라가다 생각지 못한 친구를 만난 듯 어찌나 반갑고 신기하던지! 이 책에 나온 유득공에 대한 자료를 보니 연행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한다. 한 차례도 가기 힘든 중국을 세 번이나 다녀왔으니 그의 견문이 얼마나 넓고 깊었을까? 이러한 안목으로 당시까지는 전무했던 발해의 역사를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비록 <발해고>가 <삼국사기> 등 다른 역사서에 비해 짧고 간략하지만, 지명이나 인명 등 글자 하나 하나에서 유득공의 노고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짧고 간략하다 했지만, 솔직히 그냥 넘어간 내용이 절반을 넘는다. 그래서 하루만에 읽었지만. 지명이나 인명이 익숙지 않고 다른 나라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까다롭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나라의 왕과 발해왕이 헷갈리기까지 했다. (‘개원’이라든가 하는 말은 <십팔사략>을 읽지 않았다면 정말 헷갈렸을 것이다.) 또한 서술입장이 주체적이긴 하지만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를 낮추는 문화적 관습으로 ‘해적’(등주를 공격할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더욱 혼란스럽기도 했다.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도 주로 ‘대’씨에 대한 이야기였고 짧고 단편적이면서 주로 당에 어떤 조공을 했다든가 하는 내용이어서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대조영’이야기와, 무왕의 동생 배신자 ‘대문예’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일본과 교역한 내용도 매우 자세하게 서술돼 있었다. 특히 국서가 관례에 어긋난다거나 뱃길이 따로 정해져 있어 출입금지 구역이 있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일본과 발해가 얼마나 긴밀하게 외교, 군사, 경제적으로 얽혀있는지 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다른 고전과 달리 문장이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은 적었으나, 유득공의 시대를 앞서간 지혜로운 안목에 감탄하는 고전읽기였다. 중간에 펼쳐지는 주석이나 지도, 그림도 좋았고, 책 서문에 밝히 유득공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마지막 부분 연보도 알기 쉽게 서술돼 있어 좋았다. 특히 연보에서 유득공의 삶뿐만 아니라, 당시 실학자들의 동향과 흐름도 함께 기술돼 있어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다른 고전 읽기에도 참고가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십일도 회고시>(17,000), <열하기행 시주-열하를 여행하며 시를 짓다>(19,400)도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둘 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인상 깊은 구절>
영재 유득공과 발해고에 대하여
-북한에서는 고려시대에 비로소 통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유득공은 조선 시대에도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득공과 북한의 남북국론이 다른 점이다.
<유득공의 서문> 38 이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은 마땅히 빨리 발해사를 지어 이를 가지고 여진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땅을 안 돌려주는가? 발해의 당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고 말하고는 장군 한 사람을 보내서 거두어 들였으면 토문(두만강) 이북 지방을 가질 수 있엇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가서 거란을 꾸짖어 ‘왜 우리한테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곧 고구려 땅이다’라고 말하고는 장군 한 명을 시켜서 이를 거두었으면 압록강 이서 지방을 차지할 수 있엇다. 끝끝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 이북 지방과 압록강 이서 지방이 누구의 땅이 되었는지 몰랐다. 여진을 꾸짖고자 했으나 할 말이 없었고, 거란을 혼내려고 했지만 그 근거가 없었다. 고려가 끝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역사서 한 권으로 영토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니!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지금도 독도 등 전 세계적인 영토분쟁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는 그 옛날의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아직도 전쟁중이다. 유득공의 혜안이 빛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39 세가(世家), 전(傳), 지(志)라 안 하고 고(考)라고 한 것은 사서로서 체계를 못 이루었고, 또 감히 사(史)라고 자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고’라고 낮춰 말하고 있으며, 책이 또한 다른 사서에 비해 얇은 것은 사실이나 유득공이 글자 한 자, 지명, 인명 한 글자에도 신경을 썼는지 느낄 수 있다. 턱없이 적은 사료에도 불구하고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으면서 전무한 역사서를 썼다는 것 자체가 참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느꼈다.
53 개원 20년에 장문휴 대장을 시켜 해적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했다.
✎ 해설을 읽으니 발해가 이미 압록강의 수로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고, 등주 공격은 우리 역사에서 외국을 침범한 최초이자 마지막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 현종 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61-62 발해는 당나라 때부터 자주 여러 학생을 경사(당나라 수도)로 보내어 태학에서 고금의 제도를 배우게 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발해를 해동(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 주량과 후당의 30년 동안에 공사(지방에서 인재로 추천받아 등용한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열두어 명이 되는 등 학사들이 많았다.
✎ ‘해동성국’이라는 말이 여기 <발해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알게 된 대목이다.
64 왕을 오로고로 왕후를 아리지라고 했다. 오로고와 아리지란 요나라 국왕과 왕후가 발행국왕의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말 두 마리의 이름이다. 그 말을 왕과 왕후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 발해의 마지막 국왕 인선왕 때의 일이다. 이건 요나라가 발해왕을 자신이 타던 말 정도로 여긴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상당히 모멸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님 다른 뜻이 있을까?
75 국왕이 대문예를 못마땅하게 여겨 책망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몰래 사람을 동도(낙양)로 들여보내 자객을 모아 천진교의 남쪽에서 대문예를 찌르게 했다. 대문예는 이를 막았고 죽지 않았다. 현종이 하남에 조칙을 내려 자객들을 잡아서 죽이게 했다.
✎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무척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다. 형인 발해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나라로 망명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당나라 현종에게 굉장히 큰 비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발해고>에 두 번이나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꽤 길고 구체적이다. 대문예라는 인물이 발해에서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평가됐는지, 당에서는 왜 그렇게 비호를 했는지 숨겨진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흥미롭다.
77 당나라 시인 온정균이 다음과 같이 ‘발해 왕자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며’란 시를 지었다.
✎ 발해인이 지은 시가 더 보고 싶다.
86 왜왕이 일만복에게 종삼위를 주고, 왕에게 글을 쓰기를, “이번에 온 글은 갑자기 글을 짓는 법식을 고쳤고, 날짜 밑에 신하의 관품과 성명을 기입하지 않았으며, 글 끝에 천손(天孫)이란 참호[자신의 신분에 넘치는 자칭 칭호]를 거짓으로 진술했다. 그리고 고 씨 시대[고구려]에는 병란이 끊임없어서 조정의 위엄을 가장하려고 그들이 형제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왕은 일직이 어떤 사유도 없이 아저씨와 조카라고 칭한 것은 예를 잃은 것이다. 다음 해의 사신은 그러지 마라”고 했다. 그리고 발해왕에게 미농 지방의 비단 30필, 비단 30필, 실 200꾸러미, 탄 솜 200둔을 바쳤다.
✎ 발해와 왜는 상당히 밀접하게 교역했다고 한다. <발해고>에서도 왜와 교역한 사실이 여러 곳에 걸쳐 기술돼 있다. 그런데 주된 내용이 국서가 관례에 어긋난다거나 출입금지 구역을 항해했다거나 하는 내용으로 주로 발해의 잘못을 꾸짖는 내용이 많다. 그러면서도 왜는 발해와 계속 교역을 진행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발해와 왜는 당시 국제정세상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서로 매우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발해와 대립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일본의 비단과 발해의 가죽(담비) 등이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고 한다.
94 홀한성이 함락된 뒤에 이미 항복한 군과 현들이 다시 성을 지켰고 여러 부들이 봉기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지만 저항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 같다. 비록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97 요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낙타 50필을 주었다. 태도는 거란이 발해와 일직이 화친했다가 갑자기 의심하여 옛 동맹은 생각지도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는데, 이것은 매우 무도하니 멀리하고 교린하는 것이 안 좋다고 여겨서, 그 교빙을 거절하고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시키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메어 놓아 모두 굶겨 죽였다.
✎ 해설을 보니 유명한 ‘만부교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서 만부교를 낙타교라고도 하는데, 이를 빌미로 요나라는 세 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다고 한다. 유득공이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런 외교상의 의리보다는 발해역사서를 만들어서 요나라를 준엄하게 꾸짖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서는 가정이 아무 의미 없다고 하지만.
126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때에 다스린 것은 압록 이북뿐이었다. 그래서 압록 이남의 발해의 군과 현의 연혁이 <요사>에는 빠져서 고증할 길이 없다. ~ 신라와 발해의 국경선은 바로 대동강 일대다.
✎ 압록강 이하 대동강 이북의 역사는 아쉽게도 발해 멸망 이후부터는 찾을 길이 없다. 기록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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