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아이(공선옥, 구병모, 김려령, 배명훈, 이현)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여러 상황이 담긴 단편집
- 2013. 6. 12.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 50권을 기념해서 출간한 단편집이란다.
놀랐다. 이 단편집이 중학생을 대상으로 청소년문학 작가들이 마음먹고 쓴 소설이라는 것에. 또 중학생을 결코 얕보지 않았다는 말처럼 청소년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는 것에.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모임의 성격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청소년문학을 읽으며 청소년을 이해하려는 게 목적인지, 청소년에 맞는 소설을 가려내 책을 즐겁게 읽히는 게 목적인지. 단순하게 이분화 했지만 어느 쪽이든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게 청소년문학의 질과 양이 확대됐으나 독서 현실은 더 얄팍해진 현실에 대한 독서 모임의 대응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아무도 모르게(공선옥) “나는 죽지 않겠다”의 작가.
(29) 우리는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강릉에 도착했다. 기사 아저씨는 차에 우리 짐을 그대로 실어 둔 채 자기 집으로 갔다. 엄마와 나는 차 안에서 잠깐 잠을 자고 날이 밝자마자 엄마 말대로 여수 살던 때와 하나도 다름없이, 여수에서 살 때와 거의 비슷한 동네에 방을 얻어 들고 엄마는 그다음 날부터 식당에 나가 일을 했다. 기사 아저씨는 고향에 온 김에 좀 쉬다가 엄마가 식당에서 미리 당겨 받은 돈을 받고 강릉을 떠났다. 나는 그렇게 강릉 아이가 되었다. 엄마의 강릉 생활은 여수에서와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수 살 때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아이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 읽는 내내 답답했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인생이지만 ‘좀’ 쉽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다른 아이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는 또 우리 교육의 핵심적인 방법―콩나무 시루법 교육―이기도 하다. 자꾸 여러 가지로 만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변할테니까. 그것이 결정적 계기일 테고.
2. 화갑소녀전(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작가.
(52) 피로 오염된 작업복을 가지런히 개켜 놓고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적에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나는 증서를 받으려 발버둥친 적 없고 다만 바깥세상의 혹독한 추위를 마주하기 두려웠던 것인데, 창문마다 덧문이 닫혀 있고 그것을 열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손가락을 꼽아 보지도 않았기에 지금은 이미 추위가 물러가고 봄날의 새순이 돋은 때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내가 스스로 손을 뻗어 그 덧문을 열기만 했으면 알 수 있는 일을, 날마다 녹초가 되어 그대로 나가떨어진다는 이유로……. 무엇보다 누운 등을 늘 데워 주던 온열에 익숙해진 탓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겁니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데나리온과도 같아야 할 햇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공장 안이 바깥보다 더 춥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이제 너무 늦었고 내 몸이 그리 오래 버텨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 이야기 전체가 알레고리로 가득 차 있다. 화갑소녀의 직장은 백혈병으로 숨져간 삼성전자의 여성 노동자를 상징하는 것도 같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속성을 상징하는 것도 같다. 산업사회의 성냥팔이소녀나 신자본주의사회의 新성냥팔이소녀나 권력과 자본의 지배 아래서 따뜻한 안식을 취할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다. 특히 여성은 더더욱. 그런데 이 소설 아이들이 읽어낼 수는 있을까.
3. 파란 아이(김려령)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의 작가
(66) 어른들의 상상력은 이상한 쪽으로만 발달했는지, 하나를 말하면 열을 떠올리고, 자기 상상에 확신을 더한다. 만일 소년이 도넛을 판단고 하면, 내가 어떻게 키운 아인데……로 시작해 어쩐지 애를 그렇게 찾더라,며 시끄러워질 게 뻔했다. 소년은 한때 ‘요즘 아이들’이었을 요즘 어른들 대문에 머리가 아프다, 자신들은 꽤나 정숙한 성장기를 보내고 꽤 근사한 어른이 된 것처럼 요즘 아이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소년이 보기에는 요즘 어른들이 문제다.
(78) 디지털 시대의 아이가 아날로그 환경 속에서 지내고 있다. 스마트 폰으로 이웃집 무선 인터넷 신호를 몰래 잡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리하지 않았다. 눈뜨면 일단 컴퓨터를 켜고, 켰는데 딱히 할게 없으니 인터넷 브라우저를 연다. 자신과 상관없고 관심도 없지만 베스트 순위에 뜬 검색어를 클릭하고, 그러다 슬슬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닫는, 그런 생활을 이곳에서는 하지 않아도 됐다. 전화로 쓸데없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도 줄었다. 세상에는 해야 할 것도 많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또한 많았다. 그리고 문든 깨닫는다. 늘 컴퓨터로 무언가 하느라 바빴지만, 정작 한 것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자신이 선택해서 마우스를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누군가 의도한 곳으로 끌려다는 거였다. 그거 봤냐? 안 봤어. 그 게임 알아? 몰라. 그렇게 대답해도 되는 거였다. 아냐? 알아. 있냐? 있어. 이런 대화에 왜 그렇게 온 자존심을 걸었을까.
✎ 베껴 쓰기로 좋은 대목이다. 읽으면서 선우 즉, 은결이가 혹시나 죽지 않을까 싶어 걱정하며 읽었다. 작가가 선우 즉, 은결이를 ‘소년’이라고 칭하는 부분이 눈에 걸릴 정도가 되니 죽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은우의 탄생은 운명을 극복한, 어른보다 더 현명한 아이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아이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방임에 가까운 할머니의 연륜과 자연이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절대로 될 수 없고, 화투나 바둑판은 조금 더 낫다.
4. 푸른파 피망(배명훈)
(112) 전쟁이 끝나고 채은신지와 나의 오랜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싸움은 그 후로도 쭉 이어졌지만, 적어도 푸른파 대기권 안에서는,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전선이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가 서로 다른 두 행성이 공식적으로 종전을 선포하기 훨씬 전에, 우리는 이미 전쟁을 끝내 버렸다.
그렇게 행성 푸른파는, 어느 쪽도 인구 점유율 80퍼센트가 넘지 않도록 유지되면서 무사히 전쟁 기간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이 행성이 ‘그 누구도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모든 인류에게 그리고 인류든 아니든 상관없이 행성을 찾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온전히 개방된 자유로운 천체로 오래오래 보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이 이야기도 상징적으로 해석해볼만한 상황이 많다. 대기권 밖에서 어떤 제스처를 취해도 사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원초적인 마음이 맞으면 되는 걸, 우리는 지금도 어렵게 풀고 있다. 우리끼리 마음만 맞으면 되는데……. 기대하지 않는 정권이지만 남북관계만큼은 회복되길 바랐지만 결국 틀어지고 말았다. 또 이 소설은 다수의 횡포를 경계하는 의미도 있다. 인간만이 넘치는 지구는 결국 폭발할 것이다. 근거를 확신하기 어려운 단일민족의 신화도 분열을 낳게 될 것이다.
5. 고양이의 날(이현) “우리들의 스캔들” “오, 나의 남자들!”의 작가
(143) 어미 고양이는 어느새 바닥까지 내려가서는 카페 앞 나무 데크에 앉아 한가롭게 털 손질을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오렴. 어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어차피 어미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든 마찬가지였다. 한 번에 한 걸음씩, 두려워도 조금씩, 그렇게 제 발로 내려가야 했다. 제 발로 달리고 오르고 내려가는 일. 어미 고양이는 바로 그런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잿빛 고양이는 이제야 어미의 뜻을 알 것 같았다.
✎ 고기 잡는 방법이란 이런 게 아닐까. ‘파란 아이’와도 통하는 교육의 본질적 내용을 길고양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6. 졸업(전성태)
(167) “좋아, 열여섯이면 떠날만 하다.”
✎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 같다. 글에서처럼 농업을 4시간이나 배웠지만 시험 볼 때만 필요했던, 형편만 되면 시골을 떠났고, 떠날 수 있는 아이를 부럽게 보내야 했던 시골을. 그래서 향수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성장으로 읽고 싶다. 성장이 독립이고 홀로서기라면, 중학교 졸업은 발달론적 측면에서도 충분히 무언가를 향해 떠나야할 나이이다. 첫사랑의 실패건, 고향의 상실이건, ‘아무도 모르게’처럼 사기를 당해 갑작스럽게 이사했건, ‘파란 아이’처럼 출생의 비밀을 알았건. 보고 듣는 것은 충격적인데 삶은 너무 평이하다.
7. 덩어리(최나미) ‘턱수염’, “단어장”의 작가
(184) “반장이면 반장이 하는 일만 하면 되지, 자기가 무슨 하느님이야? 거기다 무슨 일만 있으면 반 분위기, 반 분위기 하는데, 다 다른 애들이 모인 거잖아.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고 또 상황이 안 되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아니라는 말만 하면 적으로 몰잖아. 난 요즘 우리 반 애들 보고 있으면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어. 다 똑같이 생각하고 같은 말만 하는 7반 덩어리처럼 느껴져. 걔한테 뒤통수 한 번 제대로 맞아야 다들 정신 차리지. 난 찬옥인지 뭔지, 자기가 나서서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징그러워. 미친 것 같다고.”
✎ 물론 이야기가 ‘중학교 1학년’ 또는 ‘학교’의 특성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작게는 학교부터 크게는 시민단체, 정당, 국가까지 다양성이나 합리성 보다는 집단, 전체로 몰아가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눈에 띠는 것은 전체주의를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특정한 주도 세력이기 보다는 평범한 다수라는 것.
하지만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찔리기도 하고 한편으로 헷갈리기도 한다. ‘분위기’와 ‘공동체’라는 말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수퍼맨과 같은 역할을 이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사건의 흐름 자체가 ‘덩어리’란 것으로 의도적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 > 여러 상황이 담긴 단편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들의 사춘기(김인해) (0) | 2013.09.29 |
---|---|
첫날밤 이야기(박정애) (1) | 2013.08.05 |
열다섯 비밀의 방(장미, 조규미, 김한아, 심은경) (0) | 2013.05.16 |
울고 있니 너?(듀나 외 5명) (0) | 2012.08.22 |
안녕, 라자드(배봉기) (0) | 2012.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