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마징가(이승헌)


책을 읽으면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화성의 플라스틱 주물 공장에 취직했던 친구가 계속 떠올랐다. 가장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어 어린 나이에 또래와 달리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지금은 중간 관리자의 위치까지 올라간 친구의 대견함 속에는 책에서 드러난 것 이상의 외로움과 위험함, 고달픔이 새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널찍한 공간에서 거대한 쇳덩어리를 조작하며 밀린 물량을 맞추느라 상존하는 위험과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둡지는 않다. 학교란 울타리에서 잉여 인간으로 취급되었던 아이들이 사회에서 필요한 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독립’과 ‘관계’속에서 ‘성장’하는 젊고 건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 현장의 거친 말투와 육체를 다쳐 결국 마음까지 상하게 되는 사고도 이겨낼 수 있는 것 같다.


(132) 순간 나는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징가 일당들은 더 이상 나에게 어떤 것도 강요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젠 어머니에게까지 당당하게 내 의견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다소 억지스런 방식으로 펼치긴 했지만, 그거야 이미 억지로 무장한 지 너무 오래된 나머지 본인이 억지를 부리는지 안 부리는지도 구분을 못 하는 어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이 억지에 이르자 섬뜩한 상상이 떠올랐다. 마징가도, 어머니도, 공장의 강 조장과 먹깨비 안 씨마저도 모두 나처럼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누군가 그들에게 부려온 억지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부릴 수 있는 억지의 정도를 높여야 했을 것이다.
현재 그들의 모습과 살아온 과거가 겹쳐졌다. 얼굴이 젊어진 마징가가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을 억압하는 어른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떠올랐다.

⇒ 이 책에서 ‘마징가’는 담임교사의 별명이다. ‘마정구’라는 이름에서 비롯됐지만, 대머리가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마징가’는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답게 공감력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힘과 억지만 부린다. 가출 후 떠밀리다시피 취업을 선택한 주인공 ‘김정민’은 회사 상사인 강 조장이나 월급을 맡겠다고 갈등을 빚는 어머니 등 어른들 모두를 마징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도 처음부터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며 살아가기 위해 억지에 대항하며 더 큰 억지를 부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억지전승’ 나이를 먹을수록 저절로 도를 깨닫게 된다는 공자의 말씀과 대립되는 이야기이지만, ‘독립’의 또 다른 말이다.

 

(158) 내가 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나? 교복을 입었건 안 입었건, 학생이건 어른이건 간에 말이다. 내가 아니면 다 남인데,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그들을 신경 써야 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비록 부모자식이란 관계에 묶여 있더라도 그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이란 게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예전에 어머니와 다툰 것만 해도 그랬다. 그것은 똑같이 돈을 버는 입장에서, 누가 더 주도권을 가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겨루기였다. 부모자식이란 것도 결국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 사춘기 때 시작할 ‘독립’의 고민을 김정민은 돈을 벌고 나서야 하게 된다. 어떤 사회가 되었건 경제력은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으며, 독립과 관계를 성찰하는 시작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독립의 욕구는 기존의 관계에 회의를 품게 한다. ‘삐딱함’은 사춘기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홀로서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167) 나는 놈들과 똑같은 말을 뱉어내면서도 이상하게 자꾸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우리도 결국엔 남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누구도 타인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것이니까. 사람 사이에 나와 남이 아닌 다른 관계가 과연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우리가 남이가!’하고 외쳐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나 자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다. 우리 중에 단 하나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중략)
나 아니면 남인데, 나와 남은 어쩔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관계였다. 이 관계는 매우 잘 짜인 그물 같았다. 그물 위에서 태어난 나는 그곳을 벗어난 세계를 알지 못하여 그물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물 위에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발을 헛디디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물 밖 세계의 비참함을 무척 공포스럽게 묘사하는데, 사실 내 생각에 그것은 그물 밖의 세계가 아니라 그물 아래 위태롭게 매달린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다. 그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이 매달린 그물 위를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 학교와 가정에서의 독립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포함된 관계망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세상은 나 아니면 남이지만,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관계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불교의 ‘인연’이란 말처럼 어떤 관계는 직접 연관돼 있어, 어떤 관계는 아주 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그리고 이 영향 관계는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스무 살 ‘정민’이는 한참을 생각하다 ‘이러나저러나’어쩔 수 없이 살아야한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회사 생활을 시작한 정민이에게 학교와 가정보다는 회사 사람들과 관계가 더 가까워질 것이고, 여러 가지 상황이 계기가 돼 그물망의 거리나 흔들림이 다양하게 변할 것이다.

 

(185) 나이도 힘이었고 직책도 힘이었으며 강 조장의 팔뚝에서 꿈틀거리는 흉터와 거대한 근육도 힘이었다. 노조가 저렇게 투쟁을 할 수 있는 것도, 회사가 협상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반장들이 이상한 투쟁을 벌이는 노조에게 와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별말 없이 현장으로 이동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직책이 가지는 힘이었다. 강 조장의 씁쓸한 표정도 떠올랐다. 그건 자신에겐 없는 힘에 대해 씁쓸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어떤 힘이 있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퍼버벅, 하며 사포가 터져버렸다.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그만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옛날엔 그 소리에도 큰일이 난 것처럼 엄청나게 놀랐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져서 쯧! 하고 혀를 차곤 그냥 사포만 갈고서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익숙해지는 힘?’
나는 그 힘이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최소한 빼빠치다 심장마비로 죽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260) 묘한 상실감이 느껴졌다. 나를 지켜주던 울타리에서 나는 쫓겨난 것이다. 거기서 쫓겨난 나는 힘을 잃어버렸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고 큰 울타리 안의 법칙에 다라야 하는 것이다. 여기는 넓어서 얼핏 자유롭게 보이지만 실은 훨씬 엄격한 곳이다. 작은 울타리에선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던 한직이를 이제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놈도 마찬가지였지만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놈은 학교에서처럼 초라하지 않고 오히려 나보다도 훨씬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녀석보다도 못한 놈이 것이다.
나는 그제야 한직이가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작은 울타리의 추억에 빠져 있는 동안 한직이는 현실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넓혀갔다.

⇒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기회임이 분명하다. 그 새로움은 익숙해지기 전까지만 새롭다.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긴장감이 떨어지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짜를 기준 삼아 의미를 부여해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들 애쓰는 것 같다. 익숙함과 긴장감이라는 길항 관계가 수시로 줄다리기하는 일이 있다. 교직이 그렇다.


안녕, 마징가
국내도서
저자 : 이승현
출판 : 실천문학사 201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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