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야할 역사 서대문형무소(9.6)

결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지가 대전 현충원이었는데 빗속에서 군인들이 운구하고 조포까지 쏘며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내의 외할아버지는 나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나석현 님이다. 기록에 따르면 "광주농업학교 재학 시절 일본인이 교사로 오자 이를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고 이후 도쿄로 건너가서 지속적인 항일 운동을 펼쳤고 귀국해 야학당을 열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다 다시 체포되었다"라고 한다. 1980년에 돌아가셨는데 1990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으셨다. 그것도 장인어른이 관련 자료를 뒤늦게 찾아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아내의 외가는 독립운동 후 가세가 크게 기울었던 것 같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상황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서대문형무소'는 10여 년만에 찾는다. 올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임시정부가 부정되는 상황이어서인지 서대문형무소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조금 일찍 일어나 숙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소년 소설 "흑룡전설 용지호"에서 학교폭력으로 힘들어하던 지호가 자전거를 타며 에너지를 회복했다던 '안양천'이 보였다. 좀 걸어보고 싶었으나 둔치로 내려가는 길이 공사로 막혀 다리에서 한강쪽을 바라보았다. 아침 6시가 살짝 넘었는데 서울은 벌써부터 분주하다.

 

양화교에서 바라본 한강 쪽 풍경

 

아이들의 아침도 분주했다. 수학여행 마지막날 일정으로 어제 늦게까지 롯데월드와 서울스카이를 여행한 뒤라 늦잠을 자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이들의 숙소가 2인 또는 3인 1실이다 보니 숙소 열쇠를 반납하고 나서야 아직 자고 있는 학생들이 파악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기행문을 보고야 알았다. 2인 또는 3인 1실의 숙소에서도 아이들은 방의 경계를 뛰어넘어 영상통화로 노래도 부르고 각종 게임을 하며 늦게까지 보냈단다^^) 그래서 급하게 일어나 짐을 챙겨 버스를 타는 학생들이 적잖았다.

숙소가 목동에 있어 서대문형무소까지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에는 이슬비가 내리더니 서대문형무소 곳곳을 돌아다닐 때에는 가랑비도 내렸다. 가랑비와 이슬비가 오락가락했다. 아이들의 맨 마지막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동했다.

 

서내문형무소역사관 입구
10여 년 전과 태극기의 위치가 달라졌다. 이곳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대형 태극기 왼편, 독'방에서 독립까지', 독립운동의 극한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수학여행 마지막날 일정은 이곳밖에 없어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아이들은 역사 수행평가를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나에게도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답을 몰라 같이 찾아보자며 함께 돌아다녔다.

 

10옥사 안의 모습. 왼쪽은 광복 79주년기념 공동기획전 '독바에서 독립까지'가 전시되고 있었다.

 

역사관을 지나 옥사 안으로 들어섰다. 10옥사 입구에서 왼쪽 건물은 공동기획전이 열리는 옥사, 오른쪽 옥사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가 소개되고 있었다.

 

9월, 12월의 독립운동가. 특히 12월의 독립운동가는 외국분들이다.
공동기획전 입구

 

'독방에서 독립까지' 공동기획전은 독방에 갇혔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수감 이전과 이후 달라진 모습으로 감옥 생활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영상이 많다. 여운형 선생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사실 놀라웠다. 여운형 선생님의 연관어는 '건국준비위원회'  또는 '인민위원회'로 지금 정권이 경계하실만한 분이니까.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민족이 먼저인가, 이념이 먼저인가.

그런 차원에서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큰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인데 식민지 시대 자기 나라 말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 있었으며 심지어 사전까지 만든 사례가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지배층이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오히려 지배층의 위세를 드높일 수 있는 문자가 있는데도,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든 사례 또한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경우'일 것이다. 수학여행 이후 '한글 창제의 원리'가 주 학습 내용이라 눈이 더 갔다.

 

(왼쪽 사진) 안창호 선생님의 모습. 질문이 적혀 있는 나무상자를 올려 놓으면 안창호 선생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오른쪽 사진) 우리말 큰사전 제작 과정
영화 '말모이'를 통해 잘 알려진 '우리말 큰사전'의 집필 과정. 국어교사로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옥사를 빠져 나와 서대문형무소 외곽을 돌았다. 잔잔한 연못처럼 보이는 아래의 풍경은 사형 집행소로 사용되었던 곳이었고, 건물 외벽에 하얀색 표시가 있는 부분은 화장실로 사용된 부분이었다고 한다.

 

추모비 '민족의 혼 그릇' 일제에 맞서 싸우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통곡의 미루나무. 1970년대 사형수가 이 나무를 잡고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고시었기에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한을 통곡하였다는 이야기다 입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격벽장. 수감자들이 운동하던 수용시설로, 수감자를 감시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한다. '판옵티콘'이 떠오른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물을 보았다.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부터 우리나라의 국통을 찾는 게 당연한 일인데, 일제 강점기 때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주장을 장관 청문회 때 버젓이 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작금의 상황이 아이러니다.

'대한민국' 정신에 맞는 국가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서대문형무소 주차장에서 임시정부기념관이 바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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