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헤르만 헤세)



책이 잘 읽히지 않았다.

그동안 읽기 쉬운 책을 주로 읽어서 나타난 부작용인 것 같기도 하고, 데미안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철학적인 이야기라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100쪽까지 두세 번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며 몇 마디 메모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9)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인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작가 서문)

 

데미안은 를 찾는 이야기이다. 인습에서 벗어나 개별적으로 던져진 에 주목하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가 적지 않은데도 데미안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 책 속에 인류의 철학적 고민이 그대로 녹아 있어, ‘를 찾으려는 노력을 투쟁에 빗댈만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 해설(232)에서 낭만주의 및 고대 신화세계와 결합시켜 시대착오적이며 실패라고 평가하는 번역자의 해석에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물론 나의 공부가 깊지 못하지만.

 

이 책은 1919년에 발표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이성을 믿었던 근대성의 파괴성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사건이었다. 신이 모든 것을 결정했던 중세 시대는 가 화두가 된 근대에 밀렸다. 근대의 문제는 주체인 는 누구일까이다. 데카르트는 인식하는 나로, 베이컨은 경험하는 나를 주장했다. 이들의 논의는 우리가 윤리 시간에 배운 대로, 절대이성, 절대정신=신의 승리(데카르트-칸트-헤겔)로 끝났다.

그러나 근대의 주체-객체 구도는 세계를 대상화한 끝에, 일찍이 없던 풍요로움과 함께 전쟁이라는 페허를 가져왔다. 이런 일방적인 구조에 대항했던 노력이 자연에서 본질을 찾자는 낭만주의(루소), 성서의 자유로운 해석을 통한 조화(슐레이어 마허), 의지와 같은 비합리적인 것(니체, 쇼펜하우어), 물질에 대한 대항(유물론), 물질과 대립해 있는 정신을 삶으로 구체화하려는 생철학(딜타이, 베르그송)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삶의 모색들이 거의 그대로 데미안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48) 사람들이 이 일을 다정하게 받아들이고 나를 몹시 아껴주며 실로 유감스러워 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운명이었는데, 사람들은 일종의 궤도 이탈로나 보리라는 것을.

*수상한 빵집과 52장의 카드나 이 책이나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운명으로 보는 것 같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으니. 다만 개인의 성장 과정을 통과의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해석해야 하는 존재로, 개별적으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79) 그 당시 나도 이따금씩은 시험을 해보았다. 그와 똑같이 내 의지를 무엇인가에, 내가 그것에 틀림없이 도달하도록 한데 모아보았다. 나에게는 충분히 절실해 보이는 소망이 있었던 것이다.

*데미안에는 의지라는 단어가 무척 많이 나온다. 자료를 검색해 보면, 헤르만 헤세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우리 철학사에서 이성이 아닌 의지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던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이다. 개인적인 의지이지만, 모든 개별적 존재들은 동일한 우주적 의지(살려는 맹목적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 이해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니체의 의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초인’.

 

(140)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때때로 기괴한 형태를 가진 자연물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냥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마력, 그 얽히고 설킨 깊은 언어의 온통 몰두하여 관찰했다. (중략)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비이성적이고, 얽히고 설킨, 기인한 자연의 형태들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들 내면에서, 이 영상을 이루어지게 한 우리 내면의 의지와의 일치감을 낳는다. (중략) 그 분위기 속에서 우리 망막 위의 이 영상들이 바깥의 인상들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내면의 인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철학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로 감성, 이성 외에 오성이리 있다. 오성은 물자체(사물자체)’를 인식하기 위해 뇌에서 구성한 현상을 인지하는 걸 말한다. 근대는 물자체는 이성이 없으므로 인식할 수 없다고 믿었는데, 쇼펜하우어는 의지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의지에 따라 대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으므로.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인도 베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123)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데미안의 쪽지)

*압락삭스는 결국 상극이 통합된 세상이다. 정반합이 통합된 변증법적 세계관일 수도 있고, 장자의 호접지몽의 세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사람으로서 홀로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벽을 깨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홀로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발췌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도자와 격려자가 있다. 줄탁동시라는 말처럼. 자신의 벽을 깬 사람은 이상적 세계에 들어선 것이므로,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본질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를 찾는 헤르만 헤세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다.

 

(217) 그들 모두가 한순간 그 가림 없는 얼굴을 들여다본 운명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병영에서 나와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많은 얼굴들에서 나는 표적 하나를-우리들의 표적이었다-아름답고 가치 있는 표적 하나를 보았다. 사랑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18)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

 

*낡은 관념이나 인습을 쓸어버리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대위가 되었던 데미안과 1차세계대전 자원했다는 헤르만 헤세의 모습은 그동안 철학적인 인식에 반한다. 헤르만 헤세의 이런 결정이 당시 현대 철학의 한계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데미안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전영애역
출판 : 민음사 200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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