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우연(김수빈)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친구,학교,사회 문제로 갈등할 때
- 2024. 4. 29.
제목과 표지로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고요한 우연’이라. 우연한 일은 대체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고요하기 쉽지 않을 텐데 어떤 만남을 이야기할까. 표지를 가득 채운 초록빛 숲과 고양이 두 마리, 소녀의 모습에서 인간과 동물과의 교감을 담은 내용일까, 그러다 차례를 보니 우주와 관련된 이야기인가도 싶었다. 읽어보니 틀린 예상은 아니었고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주요 등장인물 4명은 모두 같은 반이다.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서로 친하지는 않다. 주인공 수현이는 정후를 좋아하고, 특별한 교류가 없었던 우연이 꿈속에 나타나며, 자신과 다르게 똑 부러진 성격에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친구들에게 배척받는 고요가 마음에 쓰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우연이 접속한 비공개 SNS를 알게 되고 거기서 고요, 우연, 정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때 이들 친구들을 알게 되는 과정에, 달 착륙과 달이 중요한 소재가 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주요 인물 4명은 많이 만나는 인물의 유형을 나타낸다.
-수현: 스스로도 지나치게 평범한 게 스트레스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밝게 비추는 아이.
-고요: 스스로 빛을 내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가까이 가기 어려운 아이.
-정후: 두루 무난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
-우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침전하는 아이.
이야기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국 연결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 아마 성장 과정을 잘 이겨낼 거라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수현이와 같은 인간 관계의 보석을 만난다.
주인공 수연은 스스로 빛나거나, 적어도 백사장의 반짝 빛나는 모래빛이라고 되고 싶었으나 지나치게 평범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은 수현이를 보는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답답하게 보이지만 다른 사람의 힘겨움에 공감하고 도와주려는 사람, 비록 그것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착한 콤플렉스로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이의 삶에 영향(참견)을 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수현이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지나친 평범함에 열등감을 가질지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 평범이란 단어처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힘을 냈으면 좋겠다. 아참 그런 수현을 받아주며 곁을 함께하는 지아 역시 좋은 친구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에겐 '달'도 '별'이라서 떠오르는 게 있다. 1990년대 삼성 광고 중에 세상이 1등만 기억한다며 최초의 달 착륙자로 '닐 암스트롱'만 부각한 덕에, 두 번째 착륙자인 버즈 올드린, 그리고 대원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달에 발을 딛지 못하고 홀로 달의 뒷면에서 연락두절 상태로 동료들을 기다렸던 마이클 콜린스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 소설은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이야기로도 들린다. 그래서 연말 방송 시상식에서 단골처럼 등장해 뻔하게 들리는 스태프들이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라는 말도 이젠 조금 더 집중하며 봐야겠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20여년 전 청소년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때가 떠올랐다.
이른바 고전 위주의 필독서를 접하며 아이들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과 막상 아이들과 만나보니 다들 나름의 문제상황을 가지고 있어 아이들의 상황이 잘 드러난 청소년 소설을 추천하여 책을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며 힘을 얻을 수 있는 독서 교육을 고민했던 그때가. 하지만 지금은 청소년 소설이 너무 많아 내가 끼어들 틈이 없는 상황이라 생각했는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을 들으며 그때가 다시 떠올랐다. 이 책은 다양한 친구들의 문제 상황과 연결된다. 불확실한 미래, 무기력함, 친구들과 소통의 어려움, 화목하지 않은 가정의 문제 등을 진지하면서도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잘 그려낸 좋은 작품이다.
(104) 슈퍼맨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게까지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드넓은 백사장에는 예쁜 조개껍데기도 있고 바다에서 떠밀려 온 미역 줄기도 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모래알이 있다.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반작이는 모래알이 되고 싶은 것뿐이다. 신발 끈을 안 풀리게 묶는다거나 지도가 필요 없을 만큼 방향감각이 좋다거나 가위바위보 승률이 유난히 높다거나, 이렇게 아주 사소하게 반짝이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그러나 나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그 작은 반짝임 하나가.
(131) 이우연은 나만큼이나 본인의 삶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SNS를 구경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림은? 너는 그림을 좋아하잖아.
▷입시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됐어. 난 삶을 그림으로 채우는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걸.
(139) “사람이 사는 데 이유가 꼭 필요해? 사람이니까 살아가는 거지. 사람만이 아니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갈 권리가 있고,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
지아가 내 옆얼굴을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자기만의 소소한 행복도 찾고 즐거움도 찾고 뭐 그런 거지. 아니야?”
(165) “착한 아이 콤플렉스 있어? 정신 차려, 그거 착한 거 아냐. 답답하고 미련한 거지.”
고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고, 내키지 않는 일을 할 때도 많았다. 특별한 사람은 될 수 없으니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얕은꾀가 아닐까, 항상 내 마음을 의심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하고 싶지 않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했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순간이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185) “태양이랑 달은 제외하면 지구에서 가장 밝게 보이는 별인데, 금성은 사실 빛을 내는 별이 아니잖아.”
정후가 금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학 시간에 배웠던 행성과 항성의 차이점이 떠올랐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인 항성과 다른 항성의 빛을 반사해서 반짝이는 행성.
“그렇지만 저렇게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기도 하지.”
정후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현이 너도 그래.”
(207) ▷어느 특정한 시점에 누군가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것, 그걸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나는 그것도 위치 선정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코를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았다. 캄캄하게만 여겨졌던 나의 지난 밤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215) “착한 게 아니야. 그냥 내가 별거 없는 애라서,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뿐이야.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고 내 몫을 덜어 주고 가끔은 비겁해지기까지 하는 거.”
“사람들은 그걸 공감과 양보, 배려라고 불러.”
지아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수현, 너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야. 나처럼 조금 삐딱하고 매사에 의심이 많은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감성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너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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