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이금이)

 

책장 정리를 하다 다시 펼쳤지만 마치 새로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금방 빠져들었다. 작가의 필력 덕분일 것이다. 내가 나이 들어 기억을 못 하기보다는.ㅎㅎ

그런데 프롤로그를 펼치자 이야기 흐름을 대략 그려졌다. 서로 닮은 김수남과 윤채령의 운명은 어떻게 연결되고 엇갈릴까.

이틀 새벽 2시까지 읽었다. 이야기가 끝에 다다를수록 안타까움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바라지 않는 결말이었지만 역사적인 상황으로 보면 가장 현실적인 결말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청소년소설인데 좀 더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었을까. 연말 이틀을 우울하게 보냈다.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은 인생을 개척해 가는 수남이의 삶의 태도다.

"거기내가 가면  돼요?"라는 제목처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수남이의 호기심은마치 인류의 진화 과정을 짐작해 보게 하는 부분이다우리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안정의 욕구가 있다그러나 '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한 호기심 역시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 힘의 결과가 지금 우리 인류 문화를 만들었다.

수남이의 호기심은 배움과 삶으로 이어진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한글과 일본어를 익히고영어중국어까지 익힌다삶의 공간도 그만큼 넓어지고, 그 시대에 대학공부까지 배움의 내용도 넓고 깊어진다.

 

지금보다 훨씬 넓었던 삶의 공간도 매력적이다.

일본 교토, 요코하마, 하얼빈, 충칭, 상해, 뉴욕, 샌프란시스코, 중앙아시아, 바이칼 호수 등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삶이다. 물론 당시에는 일제의 폭력으로 인해 만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징용이나 징병, 일본군 위안부로 동남아시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원치 않는 삶의 공간의 확장이었으나,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휴전으로 인해 반도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제한된 삶의 공간에 갇혀 사람 우리 민족에게 다양하게 섞이며 더 큰 꿈을 상상할 수 있는, 대륙의 삶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 

 

그리고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한다. 수남이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은 '사랑'이었다. 혈혈단신으로 고관대작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야 했던 수남이에게 작은 호의에서 싹튼 감정은 사랑으로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 사랑이기에 사별과 사고로 인한 슬픔은 굳센 수남이의 삶마저 흔들리게 했을 것이다.

또한 채령이에게도 '사랑'은 신분이나 처지의 한계도 뛰어넘게 만들고, 준페이에게는 몇 년이란 시간을 사랑하는 이의 배경에서 사랑을 지키고 기다리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크다. 

반전이 있어 속 시원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사회경제적, 역사적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고생하는 사람은 그 고생에서 벗어날 수 없고, 부유하게 살아온 사람은   부를 너무 쉽게 대물림하는가. 적어도 일제강점기 및 현대사에서는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35년을 일제에 저항하며 우리 힘으로 승리하고자 했으나 갑작스러운 미국의 원폭투하로 전승국의 지위를 갖지 못한 한계 때문이다. 결국 우리 힘으로 분단을 극복했을 때, 사회적 정의도 이루어진다는 의미일까.

한편 수남이가 상해에서의 사고로 흔들리며 그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의 원인이 철저히 외부의 폭력에 의한 것이며, 그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소설로서, 복선이 의도적으로 드러난 부분, 비현실적인 큰언니의 존재, 광복 후의 삶이 에필로그로 형식으로 간단히 서사만 제공되는 면은 한계로 느껴진다. 수남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았으면서도 비슷한 시기의 출간된 "푸른 늑대의 파수꾼(김은진)",  "그래도 나는 피었습니다(문영숙)"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메모한 구절>

(1권, 119) 술이네의 속내를 알리 없는 수남은 열심히 글을 익혔다. 태술은 수남이 열성인 데다 실력이 쑥쑥 늘자 신바람이 나 조선글을 다 깨치면 일본어까지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수남은 아는 글자가 하나 늘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청소할 때면 채령의 교과서 중에서 조선어로 된 것을 읽어 보곤 했다. 모르는 글자뿐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태술에게 물어 깨쳤다.

 

✎ 배우는 즐거움이 잘 나타났다. 새로운 어휘 하나에도 하나의 세상이 담겨 있으니. 태술이는 술이네의 큰아들로 수남이에게 호감이 있었고 사랑을 고백했지만 수남이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길로 태술이는 다른 꿈을 찾아 떠나고 크게 좌절해 돌아온다. 태술이는 강제로 징용을 가는데 이 또한 윤형만의 계략 때문이다.

 

(1권 234) “채령이는 감옥 대신 황군여자위문대에 가야 한다.”
수남은 죗값을 갚을 수 있다는 형만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거, 거기 제가 갈게요. 황군......”
황군여자위문대가 어떤 곳인지 몰라도 감옥 대신 가야 하는 곳이라면 편한 데는 아닐 것이다. 채령이 간다면 사흘도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채령은 지금 연인이 잡혀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장면이다. 소설에서는 종군 간호사가 되는 걸로 알고 떠난다. 비단 수남이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여자들이 황군여자위문대로 끌려가 처절하게 살아간다. "그래도 나는 피었습니다"에서는 방직공장에 취직 가는 걸로 속여서, "푸른 늑대의 파수꾼"에서는 친일부역자의 딸 대신에 끌려간다. 

 

(92) 중년 부인은 흔쾌히 모델이 돼 주었다. 돈을 받는 게 아닌 만큼 준페이는 개인 작업처럼 편하게 그렸다. 그사이 안개가 스러졌다. 준페이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완성된 그림이 만족스러워 초상의 주인에게 주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중년 부인은 그림을 가지고 돌아갔다.
며칠 뒤 공원에 갔을 때 준페이는 그 중년 부인을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나이 든 신사도 함께였다. 준페이가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신사가 자기는 티가든의 대표 하기와라라며 이야기 좀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 수남이는 채령이 대신 황군여자위문대로 끌려가고, 채령이는 아버지 회사의 경리를 보던 일본인 준페이와 위장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래도 준페이는 채령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미국에서도 채령이의 배경이 되어준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준페이는 그림으로 미국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몰입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158) 그렇지만 주인에게 실망하기보다 보잘것없는 동양인인 자기한테 남다른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에 늘 고마워했다.
돌이켜 보면 수남은 태어나면서부터 차별받으며 살아왔다. 딸이라서, 가난해서, 신분이 낮아서, 못 배워서, 조선 사람이라서... 그동안 수남은 그게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신분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한테, 무식한 사람이 많이 배운 사람한테,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213) 수많은 질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일곱 살 수남이 ‘거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대답했다. 강휘가 여기까지 온 널 존경한다고 했던, 바로 ‘여기’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수남이 품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열망 덕분이었다. 어쩌면 더 거슬러 올라가 수남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큰언니가 들려준 바깥 세상 이야기가 삶을 포기하려던 배 속의 수남에게 마지막 힘을 내게 했다. 그 뒤에도 수남은 늘 무엇이 있을지 모를 그곳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런 생각들을 하자 목적지가 뚜렷한, 강휘에게로 가는 길은 오히려 안전하고 쉽게 여겨졌다.

(268) 하루 반나절 만에 목포항에 도착한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아 배에서 내릴 수 없었다. 이틀을 항구에서 대기하던 배는 부산으로 가서야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미군들이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몸에 살충제를 뿌려 댔다. 수남을 비롯한 귀국 동포들이 해방된 조국에 도착해 처음 받은 대우였다.

 

✎ 대학 때 광복의 상황을 다루었던 책들을 읽으면서 광복 후 중앙청에 일장기 대신에 올라간 게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는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아니 해외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군, 광복군들이 남과 북으로 갈려 서로를 죽인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면 슬픈 현실을 개탄해했던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강의가 새삼 생각난다.

 

(299) 좁은 땅덩어리마저 반으로 나뉘어서 같은 국토를 가진 현재의 우리에게, 70년도 더 전에 한반도 남쪽 끝에서 출발해 국경을 넘고, 대륙을 횡단하고,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 땅에 다다랐다 돌아온 이야기는 상상만으로도 내 가슴을 뛰게 했다. 그 길을 진짜 걸었던 사람은, 기억을 가로챈 채령이 아니라 어깨에 총상의 흉터를 지닌 수남이다. 세상에 나오는 일 자체가 운명과 맞서는 일이었던 김수남이다.

 

✎ 외화의 서술자의 목소리이지만 작가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1~2권 세트(전2권)
국내도서
저자 : 이금이
출판 : 사계절 20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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