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 이야기가 잘 드러난다. 단수와 간절한 목마름.
다행히 가뭄과 단수로 인해 고통을 받은 적은 없지만, 통계치를 갱신하는 날씨가 여러 해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1월 중순이 되도록 눈다운 눈도, 한파도 몰아치지 않았다. 대신 포근한 날씨에 세찬 겨울비, 학교 담벼락에 일찍 핀 개나리꽃이 어색하다. 얼마 전 100세 인구가 2만 명 가까이 된다는 뉴스를 들으며 우리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 시대를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가 오래 살아서 이상 날씨를 볼 수도, 만들 수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심각하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관성의 법칙대로 그렇게 경험하지 못한 새 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인 캘리포니아는 여러 해 물 부족이 예견되었지만 갑작스럽게 단수가 시작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11일 만에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 소설은 단수가 시작되고 일주일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받고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다양한 인물들의 눈과 관찰자적 시선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460쪽이란 분량도 훌쩍 넘긴다.
인간은 70%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물을 확보하는 것이 생존이며, 이를 위해 자제력을 잃는 ‘워터좀비’는 특성에 적확한 명명이다. 하지만 모두 또는 대부분이 워터좀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작은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도우며 인간성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위기를 예견하고 홀로라도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위기에도 자기 것만 챙기며,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인류가 이렇게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는 것은 선한 사람들의 인간다움 덕분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성’을 성찰하게 한다.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을 때조차 서로를 구할 힘은 기어이 우러나오는 것이다(421)”
주인공이자 서술자들이 청소년인 것도 상황과 사태를 날것으로 전달해 준다.
풋볼부 활동을 하는 평범한 여학생 얼리사, 얼리사를 짝사랑해 호의를 보이지만 비호감 이미지를 갖는 켈턴, 강한 개성을 정신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판정받아 학교와 가정 밖을 떠도는 재키, 위기를 성공의 기회로 활용하며 이익에 충실한 헨리. 이렇게 개성 강한 4명이 ‘함께’ 물을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갈등과 선택을 통한 성장 속에서 희망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당연히 100%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모습을 치환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곧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면 영화로 제작하기 적절한 소재에 구성이라는 느낌도 든다. 여러 인물이 서술자로 등장하고 피란 과정과 가뭄에 대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3인칭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도 카메라로 보여주기에 적절해 보인다. 또 인물간의 갈등과 거듭되는 반전도 영화의 몰입도를 높일 것 같다. 그래도 영화가 책을 뛰어넘을 것 같지는 않다. 헐리우드 재난영화하면 떠오르는 구성과 결말들이 있어서. 그래서 필자의 힘이 느껴지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상 고온과 바람으로 4개월 넘게 불타고 있는 지역이 있다. 얼른 호주에 비가 내려 불길이 잡히고,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평안을 주면 좋겠다.
(35) “뭐, 재난 관리청이 제구실만 한다면 뉴스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있겠어?”
“상관있어요.” 내가 언론에 대해 한 가지 아는 바가 있다면, 정부와 국민에게 뭐가 우선이고 뭐가 나중인지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뉴스라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대형 방송사들은 단수 보도에 충분한 분량을 할애하지 않을 것이다.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는 수준의 자극적인 자료 화면을 확보하지 않는 한.
뉴스에서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할 때는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란 용어가 떠오른다. 기존 언론에 인터넷 언론사, 유튜브의 개인 언론이 많아지면서 갈수록 자극적인 소재와 화면으로 언론이 원하는 기사만 선택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언론에 흔들리기보다 언론의 역할을 꾸준히 감시해야 한다.
(155) 어느새 주먹다짐이 일파만파 번지더니 사람들은 죄다 이성의 끈을 놔 버린 듯했다. 군중에게 일어난 일은 이른바 ‘탈개인화’였다. 경찰이 제복을 걸쳤을 때, 혹은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써서 상대방에게 자기 눈빛을 감출 수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 평소의 자신을 벗어나 딴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딴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증상. 워터좀비에 둘러싸인 목마른 이들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 그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이 소설의 여러 상황에서 물을 차지하기 위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군중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적절하게, 또는 필요한 순서에 따라 나누기보다 다 같이 갖지 못할 때까지 다투는 인간의 상태를 ‘워터좀비’로 표현한 단어는 참 적절하게 느껴진다. ‘결핍의 심리학’과 ‘군중심리’가 결합된 상태라고 책에서는 표현하기도 한다.
(330) “단수 이틀 뒤에 고속도로를 탔다가 꼼짝없이 갇혔지. 애초에 남들보다 상태가 안 좋았어. 협압약 때문에 경주마처럼 땀을 흘렸거든. 탈수 증세가 심각한데 물은 한 방울도 구할 수 없어서 결국 쓰러지고 말았어. 그때 물의 수호자가 날 발견하고 살려 낸 거야. 기력을 회복하고 나서는 줄곧 채리티를 따라다녔지. 어느새 수십 명이 함께 일하며 서로 돌봐 주게 되었단다.”
“무슨 공동체 같네요.” 켈턴이 말했다.
“뭐 그런 식으로 발전한 셈이지. 다들 각자 능력껏 한몫하니까. 알고 보니 나도 꽤 쓸모가 있더라고.” 맥스가 뿌듯하게 웃었다.
“저희에겐 생명의 은인이에요.” 내(얼리사)가 말했다.
(406) 막상 그녀가 여기서 나가 봐야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외딴 숲 속 한가운데 홀로 남아서. 불을 피한대도 이내 갈증으로 죽겠지. 어쨌든 나는 등을 돌렸다. 결단을 내렸으니까. 내 동생을 살리기 위해 누가 죽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물을 빼앗고 죽게 내버려 둘 테다. 헨리가 맞았다.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돼야 할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괴물이다.
✎ 물 부족 속에 많은 사람들이 워터좀비가 됐지만, 고속도로에서 작은 노상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은 본래 악할까, 선할까. 상황에 따라 다르다. 집단의 크기도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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