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송이(우리는 조선학교 학생입니다)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9. 10. 5.
사무실 짝꿍 샘이 읽어보라고 주신 걸 책꽂이에 꽂아 두었는데, 노란색 표지가 여러 번 눈에 띄었다.
학교비정규직 파업으로 ‘바위처럼’도 들리고 ‘광야에서’도 들리는 교육청의 점심시간, 한숨 돌릴 겸 책을 들었다. 일본의 ‘조선신보사’가 공모한 작품들을 엮은 글모음집 “꽃송이”, 일하다 틈틈이 시간 내며 읽다가 집에까지 가져와 마저 읽었다.
하루하루를 전쟁터에서 살고 있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글이 비장하면서 활기차다. 그런 삶이 누누이 쌓여 역사가 되고, 그것을 이어나가는 3~4세대 조선학교 학생들의 글을 이렇게 편하게 읽어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글모음집에는 학생들과 시와 수필과 함께 그림, 활동사진, 노래가 담긴 동영상, 조선학교의 학제, 재일조선인의 역사, 현재 쟁점인 고교무상화운동 등 정보까지 담겨 있어 조선학교 생활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면서 10여 년 전 보았던 홋카이도 조선학교 이야기가 담긴 다큐멘터리영화 “우리 학교”가 떠올랐다. 한걸음만 내딛으면 일상적인 차별이 날카롭게 다가오고, 조선학교에 오기 위해 한두 시간 통학, 기숙사 생활을 감수하는 학생들을 보며, 우리 민족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었다. “우리 학교”를 보고 난 뒤 10여 년이 흐름 지금, 다문화한 우리 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학생들의 글 속에는 차별이 일상화된 혐한 사회의 일본 분위기도 느껴지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도 읽혀진다. 또 일상적인 삶에서의 성찰도. 학생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되는 건, 치열한 삶이 잘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글을 형상화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기 때문이다. 일본학교를 다니다 조선학교에 편입하는 학생들도 많은 것 같은데 짧은 시간에 우리말을 이렇게 잘 부려 쓸 수 있다는 건 국어교사로서 글쓰기 수업에 대해 시사하는 것도 많다.
읽으면서 접었던 구절들을 펼쳐 본다.
(76) 운동회날, 저학년장애물경기의 시간이 돌아왔다.
<두번째, 녀동무 준비됨!>
<의사, 가수, 저고리, 물고기집!>
우리 도구계는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는것처럼 호흡이 맞아가고있었다. 우리는 쉴새없이 경기장을 둘러보며 소리내여 일을 해나갔다.
<쾅쾅!>
경기가 끝나자 나의 눈앞에는 예쁜 저학년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 어머니들로 꽉 차있었다. 나는 도구계활동이란 무엇인가 직접 경험해보고 더잘 알게 되였다. 그렇게도 내 눈에 멋있게 보였던 도구계의 모습이란 하나와 같이 일하는 단결된 모습이였다는것을.
나는 도구계를 하면서 알게 된 <단결의 힘>을 하급에서도 꼭 발휘해나가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쓴 ‘도구계’란 글이다. 조선학교의 행사는 졸업생과 부모 등 조선인들의 축제다. 그런 체육대회에 진행 물품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도구계’를 맡은 학생의 글에는 여느 작업 현장 못지않은 긴박감이 느껴진다. 문제에 대한 여러 번의 토론 끝에 완벽하게 도구계 임무를 수행한 학생의 글에서 긍정의 에너지를 경험하고 키워가는 ‘학교’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 본다. 믿어주는 만큼 학생들은 성장한다. 학생들을 품어준다는 의미가 잘 느껴진다.
(108) 세나는 지금 오사까조고의 교복을 입고 오사까조고 축구부의 경기복을 입고 행복속에서 학교생활을 보내고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지금의 사회는 옛날과 달리 차별도 없어졌다.> 라고. 아니다. 옛날도 지금도 조선사람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고있다. 숨소리를 죽이고 항상 우리 곁에서 숨통을 노리고있는것이다.
차별문제가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이 력사속에서 우리는 계속 민족교육을 받으며 자라난다. 올해 졸업을 맞이하는 나 또한 력사의 한사람이 된다. 한걸음 밖에 나가면 무서운 일본사회가 기다리지만 어떤 차별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가 우리 조선학생에게는 있을 것이다. 아니, 꼭 있어야 한다.
✎ 고3 학생의 ‘행복’이란 글이다.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 일본고등학교로 진학한 동생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 다시 조선학교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통해, 한 걸음만 벗어나면 엄혹한 차별이 날카롭게 들어오는 일본사회이지만 차별에 굴하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담은 글이다. 조선인들이 일본에게 강제로 살게 된 과정을 가르치지 않는 일본 정치인들, 이를 이용해 사회의 부작용을 해소하려는 일본 우익들의 뻔뻔함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그러한 한편 재외동포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약소국의 한계도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최근 3개월간 우리와 일본의 무역마찰이 우리와 일본 사이의 평등한 관계로 재정립되길 기대한다.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어야 하고.
(196) 지금도 일본정부는 재일동포들을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정책을 감행하고있다. 거기에는 오끼나와사람들도 포함되여 있다는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지금의 상황을 낳고있는 원인은 바로 극소수의 사람의 리익을 위해 힘없는 약자를 무참히 짓밝고있는것이라고… 또한 그걸 알아야 할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이 무관심하고 리해가 전혀 깊지 못하다는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2 학생의 ‘내가 본 오끼나와’란 글이다. 오끼나와 미군기지와 관련된 문제를 직접 오끼나와에 가서 확인하며 식민지를 경험한 조선과 오끼나와의 공통점, 재일동포나 오끼니가 차별당하는 모습이 결국은 같은 문제임을 통찰하는 글이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게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인 일본인들의 정치의식도 문제다. 전쟁을 경험하며 극우로 변해버린 우리의 노년세대들과, 전쟁을 경험하지 않아 극우로 변한 일본 청년세대들의 보며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그렇다고 우리의 청년세대들이 생산적인 세대 논쟁을 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교사로서 내일이 아닌 것처럼 비판하기도 어렵다)
(206) 나는
내가 사는 자연 풍요로운 마찌다를 사랑하고
닭알모양, 3다3무의 섬 제주도를 그리며
나날이 발전하는 우리의 수도 평양을 언제나 마음에 두는
<조선사람이다!>고
마찌다에 살면서
평양-제주도사이 통일렬차 달리는 그날 위에
조선학교에서 당당히 배우는
<조선사람이다!>고
✎ 중2 학생의 ‘계속 말해가자’라는 글이다.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인 중에는 뿌리가 남한인 경우가 많다. 당연히 제주도나 전라도와 같은 남도 지역에서 일본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4.3항쟁 관련 연수를 들으며 그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학교는 오랫동안 북한의 지원을 받고 있기에 마음의 고향을 북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 보았던 “우리 학교”에서도 홋카이도 조선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북한으로 다녀온 것으로 기억한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선’이란 제3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조선인들. 분단 이전 식민지의 아픔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237) 그래, <느낌>은 언제나 변덕 부리며
날 괴롭힌다
안타까움만 남긴다
사실은 머리속엔 세계가 펼쳐지는데
막상 글에 옮겨봤더니 싱거워져
수많은 말 가운데서 뭘 고르면 되는거니
뮛이 좋은 느낌이니 답인거니
아, 그래서 난 시짓기 싫단 말이야
아마도 이 갈등은 또 래년에도
닥쳐올거지 이겨내야지
나도 어서어서 즐겁게
내 맘 펼쳐보이고싶어 시에 담아서
맘에 드는 시적발견 못 찾았지만
안타까움과 사귀려는 각오는 다져졌네.
✎ 중1학생의 ‘시짓기’란 시이다. 글쓰기의 어려움이 잘 느껴지는 시이다. 하지만 고민할수록 ‘느낌’이 잘 표현될 것임을 믿는다.
256 결승전까지의 다섯시합, 여러 동무가 문지기를 맡아서 꼴문을 끝까지 지켜내였다. 모두가 유성의 문지기장갑을 끼고 유성과 마음을 같이 하고 열심히 지켜내였다.
<유성아, 한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야!..>
결승전에서는 중간방어수를 맡은 내가 기어이 우승하겠다는 마음으로 1점을 넣었다. 시합종료를 알리는 혹각소리.
2대 1, 우리의 기쁨은 폭발하였다. 끝까지 우리의 꼴문을 지킨 유성의 문지기장갑이 만세를 하고있었다.
✎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유성의 문지기장갑’이란 글이다. 골키퍼 유성이가 연습 중 공격수와 부딪쳐 다리가 부러졌다.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는 유성이가 전해 준 골키퍼장갑을 들고, 미리 패배감에 빠져있던 친구들의 투혼이 느껴지는 글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필력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 속 치열한 삶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꽃송이(우리는 조선학교 학생입니다)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 글그림,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엮음, (주)너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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