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감의록(이지영 옮김)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9. 8. 16.
24~25 다음에 춘의 시를 읽었는데, 공이 갑자기 화를 내면서 종이를 던져 버렸다.
“어린 자식이 이리도 막돼먹었으니 우리 집안이 망할 징조다.”
춘은 놀라서 황급히 머리의 관을 벗고 당 아래로 내려갔다. 성생이 나아가 말했다.
“명을 받들어 갑작스레 시를 짓다보면 잘못 지을 수도 있습니다. 혹 흡족하지 않으실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요.”
공이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시를 짓고 못 짓고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경박함과 음탕함이 시에 가득하니, 이런 놈은 앞으로 집안을 어지럽힐 게다.”
✎ 불행의 씨앗이 보이는 대목이다. 이렇게 대놓고 차별하고 꾸짖는데, 춘이 마음으로 반성할 수 있을까? 시 한 수로 집안의 길흉화복까지 꿰뚫어 보는 아버지가 왜 아들을 다르게 감화시킬 방법은 알지 못할까?
62 (채경아가씨가 어머니께서 채봉아가씨를 모시는 말씀을 듣고) 옛날 곧은 선비가 무례하게 주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남어사 댁 아가씨가 마음이 곧고 깨끗하다면 굶주리고 춥자고 해서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까? 소녀가 보니 시녀의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습니다. 그걸 보면 주인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지금 전하시는 말뜻이 무례하여 업신여기는 듯하니 남어사 댁 아가씨는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 말 한 마디에도 법도와 존중의 마음을 담으려 했던 옛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78 너희 두 자매의 우애가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너희들의 평소 소원대로 결국 한 사람에게 함께 시집가게 되었구나. 이 아비는 이제 당장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 죽어서까지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자매는 결국 한 사람에게 시집가서 행복했을까? 소설 속에서는 죽음을 넘나들며 서로의 의리를 다 하고 행복하게 결말을 맺지만 현실 속에서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다처제의 그늘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고, 두 자매의 우애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126 (채봉아가씨가 청원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며, 청원이 하는 말) 예로부터 성인들 중에 액운을 만나지 않고 도를 터득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석가모니께서 설산에서 어려움을 겪으신 것이나 공자께서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져 곤경을 겪으신 것이 그러합니다. 부인처럼 세상에 뛰어난 자질을 갖추신 분이 그냥 편안하게 살고 특별히 심한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세상은 부인이 있는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부인을 격발하여 덕이 천하에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남부인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상살이에 지친 독자들에게도 큰 힘을 주었으리라.
155 (여옥이 옥화분장을 하고 가서 엄세번의 추행을 뿌리치며) 저는 이부시랑을 지낸 귀한 집 딸입니다. 상황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애초에 그대를 뽕밭에서 만나 사귄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도 무례하십니까? 나리께서 화진의 억울함을 씻어주어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신 다음, 친척들을 불러 예로써 저를 맞아주신다면 저는 끓는 물에 들어가거나 불을 밟으라고 하셔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이 책에는 남장은 물론 여장도 등장하며 독자들에게 다양한 흥밋거리를 제공한다. 옥화와 닮은 여옥이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엄숭의 집에 들어가 그 아들 엄세번을 희롱하는 장면은 여러 사람들에게 통쾌함과 즐거움을 선사했들 듯. 남녀 쌍둥이가 서로 역할을 바꾸는 이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떠올리게도 한다.
166 (의남매인 남부인의 소식을 듣고 눈물 흘리는 윤여옥을 보며 화진의 말) 성씨가 다른 오누이도 이렇게 서로를 아끼는데, 형제라고 하는 우리는 어찌 이 모양일까?
✎ 같은 피를 나누었다고 우애가 저절로 솟아날 리가 없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다 느끼고 있지 않을까?
201 (임어사의 부탁으로 유학사가 윤중승을 찾아가) 자신 때문에 그 형이 죽었는데, 어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 (윤중승이 정상서를 찾아가) 화형옥은 우애가 지극하기로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형이 아침에 죽으면 아우는 저녁에 목숨을 끊을 것입니다. 악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은 통쾌하지만, 어진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안타깝지 않습니까?
✎ 이건 뭐, 릴레이 탄원 작전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것보다 인복 많은 화진이 부럽기만 할 뿐.
241 (화부인의 위로를 듣고 심씨가 진심으로 회개하며) 네 말도 늙은 어미의 잘못을 숨기려는 것이지, 진정으로 하는 말은 아니구나. 어미가 만약에 ‘평생에 저지른 악행은 참소를 곧이들은 탓이고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면 이는 겉만 변하고 속마음은 고쳐지지 않은 것이다.
✎ 진심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대목. 그 동안 등장했던 고전 속 악인들 중 정말 진심일 것 같은 캐릭터.
250 (누급이 화공을 죽이라는 범한의 협박을 듣고) 죽여선 안 될 사람을 죽이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느니, 차라리 죽일 만한 놈을 죽여서 일을 이루고 살길을 얻는 것이 낫지 않을까?
✎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 중에 하나는 주인공이 힘을 얻어 단죄하기 보다는 악인 무리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자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467 (해설) 작자의 소설쓰기는 사마천이 ‘백이열전’에서 천도(天道)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여 역사를 저술한 것에 비견될 수 있다. 사마천은 도적과 같이 남을 해치고 세상을 어지럽혔던 도적놈은 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잘살았는데, 안연처럼 어진 이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일을 예로 들면서 현실에서 천도가 행해지는가에 대한 강한 회의를 표했다. 사마천이 역사를 저술한 것은 바로 천도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도를 실천하다가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과 악행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 역사가 포폄(褒貶)을 통해 보상과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점에서 『창선감의록』의 작자는 사마천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작자는 허구로 꾸며낸 역사를 통해서 천도가 실현되는 세상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 창선(彰善)이 남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드러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감의(感義)가 의로움에 감동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면을 볼 때 이미 제목부터 아주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9. 6. 25.
|
'행복한 책읽기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나 카레니나(레프 똘스또이) (0) | 2019.08.28 |
---|---|
사씨남정기(김만중) (0) | 2019.08.28 |
이반 일리치의 죽음(레프 톨스토이) (0) | 2019.08.15 |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찬권) (0) | 2019.05.29 |
백범일기(도진순 역) (0) | 2019.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