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찬권)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9. 5. 29.
16세기 양반들의 생활사를 미시적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생생하고 재미있었다. 마치 그 당시 어느 한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은 것처럼 실감나게 전달이 되었다. 특히 미암과 덕봉, 김인후, 허균 등 많이 알려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방굿덕, 은우어미, 옥석, 마귀석, 대공, 몽근, 치산, 유지 등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까지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등장할 때마다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원문을 읽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미암일기>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풀어 쓴 정창권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 <미암일기>에 대해 정리
1. 미암이 55세가 되는 해인 1567년 10월부터 1577년 5월까지 11년에 걸친 한문 일기
2. 11책, 일기 10책과 덕봉의 시문집 1책
3. <선조실록> 편찬에도 중요한 사료의 역할을 담당함. 보물 206호
4. 종가인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 소장되어 있음.
5. 내용 : 조정의 정치사, 집안의 대소사, 개인의 신변잡기 (왕실 소식, 정국 동향, 사신 접대 등의 역사적 사실과 미암이 홍문관에서 근무할 당시 경연에 관한 기록, 가계의 수입‧지출과 이사, 집수리, 건축, 혼례풍습, 집안잔치 등의 집안의 대소사, 부인 송덕봉과 자식들의 생활 모습, 그들 주변에서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노비, 첩, 서녀, 의녀, 기녀의 생활 등)
※ 사계절 : 6개 테마 (관직생활,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증식, 부부갈등, 노후생활)로 분류
미암을 비롯한 16세기 사람의 생활상을 설명 + 일기의 실제 사건과 상황을 상상을 가미하여 이야기로 꾸밈
<인상 깊은 구절>
47 세간에 유향소(지방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의 종들이 오히려 방자하다는 소문이 나도는데, 하물며 재상집 노복들은 더욱 삼가야 한다. 너희들이 만약 논일을 하면서 남과 물을 고루 대지 않거나, 시장에 들어가 남과 이익을 다투거나, 그밖에 권세를 믿고 남을 침해하는 일을 일체 해서는 안 된다. 감히 내 명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볼기를 때리고 종아리를 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발바닥까지 칠 것이니, 너희들은 각별히 조심하고 삼가라.
68 그렇다고 두 사람이 항상 웃고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1674년 여름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 은우어미가 여종에게 화를 내며 덕봉에게 대들자 덕봉이 ‘저렇게 사납고 못된 딸년하고는 살 수가 없다!’라고 하니 미암이 크게 꾸짖어 꺾었다. 당시 은우어미는 남편 윤관중이 첩을 둔 문제로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는데, 아마 거기에서 비롯된 마찰이었던 듯하다. 두 사람의 갈등은 두 달이 지난 가을 9월에 은우어미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남편과 함께 부모에게 술을 올리면서 점차 풀어졌다.
93 “내가 본시 이가 많은 사람인데 근래와 와서 보기가 드물어 의심을 했소. 근데 전일부터 다시 많아지기 시작했으니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소.” “좋기도 하겠수.”
이 시기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는 이가 없어진다고 여겼다. 며칠 전에도 ‘내 몸에 이가 많아졌다, 적어졌다 하면서 끊이지 않으니 기쁘다’라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100 한 번은 미암이 <상서>를 교정하는데 ‘술이 국(麯:누룩)이 많으면 쓰고 얼(糱:엿기름)이 많으면 달다’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덕봉에게 물었더니 그녀가 이렇게 일러주었다.
“얼이란 보리나 밀을 물에 담갔다가 짚섶에 담아 따뜻한 곳에 놔두면 자연 싹이 트고, 그것을 햇볕이나 불기운에 말려 찧어서 가루를 만들어 술을 만들 때 넣으면 달게 되는 것이니 누룩에 조금만 넣으면 좋답니다.”
그러자 미암은 “내가 오늘 새벽에 부인과 동료가 된 셈이다!”라고 하면서 무척 기뻐하였다.
119 나아가 그들은 꿈을 통해서 서로 만나기도 하였다. 특히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여 누군가가 찾아갈 수도 없고 편지마저 보낼 수 없을 대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꿈을 통해 서로 만났다. 심지어 그들은 꿈을 통해 죽은 자와도 서로 만났다. 그들은 꿈속에서 죽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꿈으로 인해 마음의 균형을 잃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단지 꿈을 생각이 독실해서, 또는 낮에 한 일이 꿈에 나타난 것쯤으로 여겼다.
151 덕봉은 본래 담양부 태곡리에 살았다. 오늘날의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이 바로 그곳이다. 장산리 장동(獐洞)은 속칭 노랑골로, 부근에서 으듬 가는 마을이다. 뒤로는 노루가 많이 산다는 노루봉이 점잖게 버티고 앉아 있고, 앞과 옆에는 두 개의 또 다른 봉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삼면에서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165 당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주로 밥밖에 없어 쌀 소비가 많았고, 또 양반들은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일가친척과 수많은 집안 노비들까지 부양해야 했다. 게다가 양반들을 봉제사 접빈객, 곧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어지간한 중소지주라도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고 별도로 자본을 축적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오히려 양반 관료는 관아에서 자주 식물을 부탁하여 부족한 생계비를 충당하였다.
184 덕봉이 쓴 장문의 편지 (1570년 6월 12일)
나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소. 가볍게 여기지 마시구려.
당신은 몇 달 동안 독숙을 하고서 붓끝의 글자마다 공을 자랑했지만, 나이가 60에 가까우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크게 이로운 것이지, 결코 내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오.
186 <착석문 서>에서
1571년 봄에 미암이 마침 이 도의 감사가 되어 혹 숙원을 이룰 수 있을가 마음이 부풀어 있었으나 감사란 폐단을 없애는 직책이니 사적인 일은 돌볼 수가 없으므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반드시 사비를 들여 이루도록 해야 하오”라고 하였다. 나는 가히 졸렬함을 잊고 이 글을 썼다.
187 <착석문>에서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이 장가오던 날 ‘금슬백년’의 시구를 보시고 어진 사위를 얻었다고 몹시 좋아하셨는데 당신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하물며 당신의 나의 지우로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비하며 백년을 함께 늙자고 했으면서 불과 40, 50말의 쌀이면 될 일을 이렇게 귀찮게 여기니 통분해서 그만 죽고 싶소.
237-238 (허균) 김인후가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그가 전염병에 걸려 위독했으나 사람들은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은 당시 성균관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애석히 여겨 자기 집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김인후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뒷날 미암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하나 있는 자식이 매우 어리석었다. 김인후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온 집안이 찬성하지 않았지만 끝내 듣지 않고 혼인을 치루니 사람들은 미암과 김인후를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266 미암과 덕봉은 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비철리에 쌍분으로 나란히 묻혀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묘지 오른편 약간 아래에 첩 방굿덕이 잠들어 있다.
269 결국 16세기 한국 가정은 서로 독립적인 개체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아간 공동체였으며, 그 성격도 권위적이지 않고 개방적이었다. 지금가지 우리는 조선 후기적 시각에 사로잡혀, 전통 가정을 철저히 닫힌 공간이자 부(夫에) 의한 지배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 보았듯이 16세기만 하더라도 한국 가정은 열린 공간이었고, 여성의 힘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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