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햇볕의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표지,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

그러나 곱씹을수록 어려운 관계이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추려는 사람이라면 발전이 없는 관계이므로 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누구에게든 무해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작가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의 지점을 포착하여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그래서 남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의 7편의 단편들에는 30대 중반의 처지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다양한 만남에 대해 섬세하게 성찰하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를 읽을수록,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쳤을 순간들이 떠오른다.

 

(209)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렵지만,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순간들도 많을 것이다. 주춤거리다 을 품고 사느니,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성찰하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다. 그래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느낌도 든다.

 

1. 그 여름

(56) 수이는 시위하듯 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경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경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서 감정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이는 단 한 번도 자기 상처를 과시한 적이 없었다. 자기 상처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일이 가장 역겹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했고, 그게 무엇이든 모든 것을 삼켜내려 했다. 그런 수이가 소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고 있었다.

이경은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수이의 울음이 자신의 마음을 아주 조금씩 돌려놓을 없다는 사실에 놀란 채. 수이 또한 이경의 그런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경은 울 자격이 없었다.

✎ 남들이 동정할만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 덕분에 힘들지 않았다던 수이. 하지만 달라진 상황 속에서 사랑은 흔들리고 그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수이의 마음은 그대로인데 변한 이경이가 문제일까, 아니면 여러 상황이 변하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수이가 문제일까.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외로움..

   

2. 601, 602

(76) “남의 집 일에 나서는 거 아니야.”

네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져?”

오늘 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 말을 하는 엄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넌 여자애야.”

엄마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거짓말을 했어. 엄마는 늘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했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슬픔 속에서도 엄마의 반응에 분노를 느꼈다. 외로움이 서린 분노였다.

✎ 어떤 도덕적인 기준보다 남자가 우선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자연스럽게행복해질까? 그 부담에 그 아들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고, 자식에 의존하는 여자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생각의 변화보다 시대와 가치관의 변화가 몇 배나 빠른 시대, 이전 세대들의 고립을 보는 것 같다.

 

3. 지나가는 밤

(101) 자정이 가까운 시간,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주희의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반대편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주희는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버스가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희는 주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그런 주희를 바라봤다. 초겨울 날씨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주희는 내내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네 대의 버스가 왔지만 주희는 어떤 버스도 타지 않았다. 그냥 그곳에 가만히 앉아서 바닥을 바라봤다. 윤희는 주희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있었다.

✎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형제자매이다. 나이 터울이 많고 뭔가 해야할 일이 많은 처지에서 동생은 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또 한편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외로움을 대면했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이다.

 

4. 모래로 지은 집

(179) 영원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 긴장하며 읽었다. 공무, 나비, 모래 중 꼭 누구 하나가 죽을 것 같은 불안함이 느껴졌다.

외로웠고, 그래서 의지하고 그에게 탓을 돌리고, 그렇게 갈등하면서도 결국 상대방도 의지했고. 책 제목이 사상누각의 의미일 수도 있고, ‘모래가 중심이 돼 관계가 지속된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무해한 사람은 누굴까, 당시에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나 결국 진심을 알게 된 상태이지 않을까

   

5. 고백

(195)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 친구 3명 사이의 이야기이다. 친구가 되면 서로의 성향 쯤은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일 수도 있다. 말보다 표정으로 드러나는 혐오’. 혐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일까, 공감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감정일까.

 

6. 손길

(235) 언니,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 혜인이는 집안 사정으로 숙모 손에 길러진다. 그런데 숙부가 사고를 당한 후 숙모와 헤어지고 그 뒤로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숙모와 헤어져서 슬프기도 하지만, 자신을 쉽게 떠난 숙모에 대한 서운함이 어느 날 만난, 숙모에게 데면데면했다. 어린 시절 혜인이는 전라도 출신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숙모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편견 속에서 살고 있다

 

7. 아치디에서

(260) 너 왜 여기 있어? 하민은 그렇게 물었다. 몰라. 나는 입술을 움직여 그 말을 했다. 엄마도 예전에는 그런 말을 했었지. 그나마 내게 인간적인 기대가 남아 있었을 때는. 너 왜 여기 있어? 그 말 이후에는 언제나 싸움이었다.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말했을까.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나는 엄마의 그 말을 떠올렸다. 랄도, 너 왜 여기 있어? 나를 보던 일레인의 회색과 초록이 섞인 눈동자를 떠올렸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답했지만 그날, 지붕 아래에 앉아서 나는 그때의 내 대답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너 왜 여기 있어?

✎ 왜 여기 있어?’ 존재의 의미를 몰랐던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만났다. 존재에 대한 고민 때문인지,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발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남녀 간의 관계를 사랑이 아닌 우정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얽힌 관계를 끊고 새로운 공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할 수도 있다.


내게 무해한 사람
국내도서
저자 : 최은영
출판 : 문학동네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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