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하멜(김영희)

 

<하멜표류기>의 단촐함과 간략함에 이 책을 골라 들었다.

 

굉장히 메마르고 건조한 하멜의 기록에는 하멜일행들의 인간적인 체취를 맡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13년이나 지낸 그들은 정말 단순히 부역이나 하고 제주에서 한양으로 다시 병영, 여수로 옮겨다니는 수동적인 생활만을 했을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았을까?


김영희 작가는 400쪽이 넘는 소설 속에 그들의 체취를 담았다. 그리고 효종, 현종 시대의 문화, 역사, 당쟁으로 인한 소모적인 정쟁, 현실성 없는 북벌 정책, 그리고 청나라 정세, 일본의 정세, 유럽의 정세까지 담아냈다. 

특히 하멜 일행을 제대로 쓰지 못한 당시 조정의 임금과 사대부들에게 화살을 돌린다. 그들을 제대로 쓰지 못해 뒤의 아픈 역사를 가져왔다고. 나름 일리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인상 깊은 구절-

(253) (부안에서) 조선소의 수군 장교들이나 조선 기술자들은 나른하게 늘어진 자세로 그날그날 맡은 일을 하는 것 말고는 나라의 앞날도 조정의 북벌 계획에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로스는 탄식을 했다. 이놈의 나라에는 임금의 세상과 백성의 세상을 이어주는 줄도 없고 다리도 없어. 위아래 할 것 없이 혼곤한 잠에 빠져 있어. 

(272) 하멜은 고독이라는 소재 하나로만 빚은 입상이 있다면 아마도 환갑을 넘긴 저 노인의 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상의 벨테브레를 바라보는 하멜은 쇠스랑으로 가슴속을 훑는 아픔을 느꼈다. 우리가 있어서 행복했다는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을 거야.

(286) 하스는 집 둘레에 어린아이 키 높이의 돌담을 쌓았다. 그는 논두렁과 뒷산에서 파온 찰흙을 염도가 낮은 강물에 이겨서 목침 크기의 네모꼴 벽돌을 빚고 빗살무늬를 새겨 넣어 돌담 상단부를 장식했다. 하스는 집집마다 마당 가운데 벽돌로 저수장을 만들어놓고 병영천에서 고랑을 파서 물을 끌어왔다. 
~ 이웃에 사는 조선인들도 몰려와서 빗살무늬 돌담과 병영천에서 끌어온 물이 찰랑거리는 저수장을 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쏟아냈다.

(370) 병영은 그들에게 정은 안 들었어도 생활의 터전이 잡힌 곳이다. 선원들은 7년 전에 병영에 와서 집을 짓고 병영천에서 물을 끌어와 저수장을 만들고 화단을 꾸미는 일에 소박한 재미를 붙였다. 그들이 살던 골목의 빗살무늬 돌담은 이웃 고을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몇몇 선원들은 그때 수령이 수백 년이나 된다는 동성리 은행나무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그늘 아래서 자주 네덜란드의 민요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래던 은행나무를 영영 떠나는 것도 가슴 저린 일이었다. 병영에 와서 몇 사람 말고는 각시를 얻어 자식도 낳고 살았다. 닷새 안에 이런 생활의 흔적을 뒤로 하고 또 낯선 고을로 떠나라니.

(440) 부교의 심문은 그물망처럼 촘촘했다. 그에 비하면 13년 전 제주목사와 한양의 훈련도감에서 조선 관리들한테 받은 심문은 구멍이 숭숭 뚫린 엉성한 바구니였다. 조선 관리들의 심문은 서투르고 형식적이었다. 나가사키 부교의 심문은 빈틈없고 전문적이었다.
나가사키 부교가 준비한 질문은 54개 항목이나 되었다.

(448) 조선이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둠의 길을 가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조선은 야판에 의해 가혹한 시련을 맞을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에 하멜은 불안했다. 그래도 조선은 장가선의 나라요 돌선과 곧 태어날 우리 아이의 나라인 것을.

(468) 하멜의 동료들은 하멜이 쓴 표류기를 가지고 먼저 귀국했다. 
하멜의 표류기는 바로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되고 네덜란드와 유럽 전역에 화제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하멜은 귀국하기도 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멜표류기를 읽고 마음이 조금 움직인 동인도회사 본사는 선원 한 사람에 많게는 300길더, 적게는 150길더로 총액 1530길더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행복한 책읽기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간의 꽃(고은)  (0) 2013.07.13
세한도의 수수께끼(안소정)  (0) 2013.06.30
그치지 않는 비(오문세)  (0) 2013.06.14
노서아 가비(김탁환)  (0) 2012.08.12
마에스트로(자비에 로랑 쁘띠)  (0) 2012.01.19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