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김탁환)

 

아침부터 후텁지근하다. 아이스 커피믹스를 찬물에 타서 얼음을 몇 개 넣은 뒤 잔을 돌려가며 한 모금씩 마신다. 컵에는 마신 만큼씩 시원한 물방울이 흔적을 남긴다. 달달함을 느끼며 뉴스에 대한 이야기나 오늘 할 일을 가족들과 나누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요샌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하러 술집에 가는 것보다 카페에 갈 때가 더 많다. 메뉴들 사이의 세세한 차이들을 구분하기 어려워 ‘아메리카노’로 정하고 곧장 이야기에 빠진다. 이야기에 빨리 빠지고 나면 리필도 잊지 않는다.

카페가 많이 생겼다. 몇 블록 건너 이름을 달리하는 카페가 있고 체인점도 많다. 늘어난 카페와 메뉴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간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가는 것인지, 이야기하는 촉매제가 필요해서 카페에 가는 것인지, 여하튼 커피는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러시아 커피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그런데 ‘노서아 가비’란 말 속엔 청나라 냄새도 난다. 읽어보니 구한말 아관파천 즈음의 청나라와 러시아가 배경이다. 조선과 청, 러시아를 넘나드는 속임수와 그런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는 정치 이야기가 여러 사건과 익숙한 인물, 반전까지 얽혀 있어 이야기에 쉽게 몰입된다. 

재미있었지만 작가의 말처럼 ‘개화기 유쾌한 사기극’이라고  풀어 버리기엔 덜 유쾌했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 역사적인 배경도 그렇고, 속이면서 살아야하는 삶도 그렇고, 100년 전보다 더 고립되어 살아가는 답답한 현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서아 가배’로 외로움을 달래고 위로받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커피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끊임없이 외로움을 달래고 위로받으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겹쳐, 외로움 역시 우리 사람들의 삶에 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커피 한 잔의 치유 같은 것.

 

읽다 다음 구절이 기억에 남아 메모한다.

 

(120) 한 굽이를 지나면 또 다른 굽이가 오고, 그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기다린다. 단숨에 돌파할 생각은 버려라. 삶도 사랑도 사기 치는 짓까지도 언제나 첩첩(疊疊)하다.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적는 것도 첩첩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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