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파는 상점(김선영)

 

이래저래 '시간'이 큰 이슈가 됐던 여름이었다. 펜싱 에페 준결승 경기 중 신아람의 마법같은 1초 사건은 개그, 드라마의 단골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 소설은 올해 4월에 첫출간 되어 올림픽 사건과는 무관하다. 가장 길면서도 짧았던 1초처럼,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는 객관적인 시간 크로노스와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 사이에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찾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매우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요즘 청소년문학의 단골 소재는 성과 사랑 또는 임신, 폭력이다. 물론 매우 의미있는 소재들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며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새로운 소재 '시간'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카이로스적인 시간, 즉 오늘을 오늘답게 아름답고 소중하게 만들어갈 시간(기회)이 있음을, 그것을 꼭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이 갖는 폭력성"에 대해 지적하는 엄마의 말은 우리가 꼭 새롭게 새겨야 할 문장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새로운 소재와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 추리기법을 통한 소설전개 방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분히 박수를 받을만하다. 또한 온조, 이현, 난주, 일찍 돌아가신 소방관 아빠, 환경운동가 엄마, 담임 선생님, 작은 선생님, 강토와 강토 할아버지 등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들이 하나같이 따뜻하고 사람냄새가 나서 좋았다. 다만, 내 착각일지 모르지만 이현과 강토가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생각이 많이 빗나갔다. 조금 아쉽기도 했고.

우리 아이들과 이 책을 함께 읽으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까 무척 궁금하다.

 

(26)  삶은 '지금'의 시간을 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아쉬운 건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아빠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빨리 갔을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 온조가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38) 그런데 백온조,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딱딱하게 각져 있지만은 않다는 거, 그리고 시간은 금이다, 라는 말이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도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39) 온조는 로봇 같은 경주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왜 뛰는지는 알아야 경주에서 이기든 지든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43) 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게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그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47) 시간은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몸에 켜켜이 쌓이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66)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 있는 것이다. 왜 어른들이 걸핏하면 밥 먹자는 말로 인사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같은 공기 속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마주 보고 밥을 먹는다는 것은 묘한 힘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밥을 함께 먹는 친구는 따로 있다. 반이 달라도 급식실에서 기필코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는다. 인간의 본능 중 행복한 행위를 함께 하고 싶은 욕구, 그게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그 시간이 하나의 의미로 남는 것.

(81) 판사는 마지막으로 방청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모두 이 소녀의 가해자라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소녀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주는 것뿐이라고. 소녀가 다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뿐이라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면서 눈물의 판결을 내렸다는 이야기야.

(100) 강토 애비가 고3 막 올라가던 때였어. 그놈이 공부를 좀 했거든. 명절 때는 고사하고 시골의 노모가 다 죽어가는 데도 데려가지 않았어. 공부하라고.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 아무리 되돌리려고 해도 이미 늦은 헛걸음이야. 그런 나한테 몹시 화가 났지.

(106) 시간은 그렇게 안타깝기도 잔인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인가. 삶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 사이의 전쟁 같기도 했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는 그렇게 애달파 하고, 싫은 사람과는 일 초도 마주 보고 싶지 않은 그 치열함의 무늬가 결국 삶이 아닐까?

(137) 나는 그냥 내가 나인 게 좋을 뿐이야. (가네샤와 대화 중) 네가 본 건 나의 자유분방함도 자신감도 아닌, 내가 나를 그냥 인정하는 것을 본 건 아닐까?

(150) 엄마는 늘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 시간은 어떤 예고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늘 바쁘다고 하면서 필요 없는 시간들을 너무 많이 소비하면서 시간 없다고 한 거라는 것을 알았어. 엄마는 다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엄마는 소중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그게 결국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믿어.”
엄마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건 온조가 가장 바라는 거였다.
엄마 옆에 새로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아빠와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얘기야. 조금 흐릿해진 빛깔만큼 누군가 대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지금의 감정을 부정하고 싶지도 피하고 싶지도 않아. 그게 엄마의 솔직한 심정이야. 그치만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우리 온조니까, 네가 상처받고 싫어한다면 당연히 엄마는 접을 거야....

(178) 엄마는 돈이 개입되지 않으면 훨씬 더 좋은 경우가 있다고 했다. 시민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을 움직이는 힘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신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돈이 개입되면 사람들은 시간 대비 자신의 수고를 계산하기 때문에 신명은 그만큼 줄어들어 단박에 시들해진다고 했다.

(193) 그런 부모를 욕보일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래. 남의 물건에 손댔을 때 엄마가 병적으로 반응했던 것을 떠올린 거지.

(203) 시간이 지나면 새 발톱은 나올 것이다. 임마, 그거 아니? 새로 나온 발톱이 예전 것보다 훨씬 두껍고 힘이 세다는 거?

(250) 현재란 결국 과거가 되어버리는 점(點)과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을 그러한 점을 죽 늘어놓은 직선처럼 상상한다. 어떠한 현재도 과거와 함께 있으며 과거와 동시에 있기에, 사실 현재는 단순히 현재로서 생동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란 이미 언제나 현재와 과거의 복합체이고 결정체이다. 기억을 단순히 지나간 약해진 지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 지각의 각인과 잔상이 아니라 무한한 과거의 연쇄와 상호 침투로 이러우져 있다. 지속으로서 생동하는 시간에서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현재가 아니며, 현재는 결코 과거와 단절되어 있지 않다. 현재와 과거는 절대로 동시적이며, 현재란 상호 침투하고 상호 연쇄하는 잠재적 과거의 집적의 선단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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