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김이윤)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내면의 문제로 고민할 때
- 2012. 6. 8.
결말이 뻔히 보이는 비극적 성장소설이라니. 비극적인 결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취향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주인공 여여가 엄마의 죽음을 준비하는지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작가는 애초에 결말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인지라, 주인공을 일부러 강하게 설정한 것 같았다. 특히 여여의 어른스러운 태도에 한두 번 놀란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입을 상처가 내심 걱정되지는 않았다. 미혼모의 딸에, 엄마는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리고 따뜻한 이웃과 친척들, 그리고 세미와의 흔들리지 않는 우정, 또 혼자서 드럼까지 배우는 배짱까지 겸비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력이 더욱 여여를 평범한 여고생으로 보이지 않게 했다.
시리우스와의 짧은 사랑과 이별도 세미와의 끈끈한 우정도 홀로 남을 여여에 대한 작가의 배려인 양 느껴졌다. 또 사족처럼 느껴지는 생부와의 만남까지. 그렇게 강하고 안정적인 여여는 두려움과 만나도 흔들리지 않고 가슴 속에 발광 바이러스를 안고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작부터 거리두기를 한 지라 솔직히 감동을 흠뻑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여여 엄마에게 두 가지 정도는 배워야 할 것 같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여유를 줄 것과 자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부모의 건강을 먼저 관리하라는 것이다. 최근 이웃에 사는 사십 대 후반 이장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특히 후자를 더 강조하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
41 “이런 말 하면 학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는데, 많지 않은 내 임상 경험으로는 자궁암은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에 더 많이 걸려. 학생도 여성이니까 알아 두면 좋겠지. 건강한 성생활이 몸 건강과 정신 건강에 모두 중요하다는 뜻이야.”
세상에, 말도 안 돼. 그럼 세상의 수녀님들과 비구니들은 다 병원에 입원해야겠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나?”
“아, 아니요. 그러니까 자신의 몸에 대한 예의를 지켜서 모든 중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런 말씀?”
⇒ 특별하게 마음이 쓰인 구절이다. 의사의 말도 의미심장하고, 여여의 생각이나 답변도 의미심장하다. 근데, 여여는 전체적으로 여고생답지 않은 정신수준인 것 같아 읽는 내내 눈높이를 맞추기 힘들었다.
50 “난 네가 딸인 걸 안 순간부터 아무 걱정 안 했어. 적어도 남자들처럼 바보 같지는 않을 거고. 더구나 내 딸이잖아. 멋있는 여성으로 키울 자신이 있었어.”
“엄마, 엄마가 생각하는 멋진 여성이랑 내가 생각하는 멋있는 여성이 같을 거 같아? 내 인생은 내 거라고. 엄마가 결정하는 게 아냐.”
⇒ 딸이라 안심했다? 만약 아들이었다면? 혼자서 아이를 키울 결심을 했을까? 내가 너무 보수적이고 소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엄마의 선택이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이 크다.
54 그래, 엄마도 쉽지 않았겠지.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라면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엄마는 남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남보다 힘든 선택을 했으니, 풀어 가는 과정도 힘들었을 거야. 불쌍한 엄마, 근데 어쩜 좋아. 엄마 생의 뒷부분도 남들보다 힘들게 되었으니…….
⇒ 이렇게 이해해주는 딸을 만난 걸까? 아님 이렇게 길렀을까? 자식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다 키운 게 아닐까? 이미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59 “근데 시험도 그 모양으로 본 놈이 웬 망원경은 목에 걸고 다니는 거야?”
시리우스는 고개를 들더니 창밖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이거요? 멀리 보려고요.”
멀. 리. 보. 려. 고, 요.
‘멀리’ 라는 말에서, 누군가가 내려친 스틱에 크래시 심벌이 쨍, 채쨍 울렸다.
⇒ 시리우스라는 이름에서 캔디의 안소니, 테리우스가 겹쳐 조금 웃음이 나온다. 나름 멋진 대사다.
103~104 드럼 교실을 나오는데 한 시간 내내 시리우스 생각만 한 내가 미워졌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앞에 나를 마주 세워 놓고 뺨을 세차게 때려 주고 싶었다. 마주 선 나의 몸이 휘청하도록, 마주 선 나의 뺨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오늘은 58+24일. 엄마 몸에서는 암세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담. 죄책감에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작가가 의도한 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시리우스와의 짧은 사랑이다.
144 5월에 받은 또래 상담 교육에서 배운 대화법의 머리글자가 ‘어, 기, 역, 차’다.
어- 어떤 문제인지 들어주기
기- 기분이 어떤지 듣고 이해하기
역- 입장 바꿔보기
차-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기
또래 상담에서 배운 것만으로도 우리는 봉사 활동 시간을 세 시간이나 채울 수 있었다.
“그럼 나한테 어기역차 해줄래?”
기대고 싶다. 세미에게든 그 누구에게든.
“잠깐 기다려. 침대에 가서 누울게.”
“그럼 나도 침대로 가서 누울게.”
⇒ 여여가 힘든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세미 공이 크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지막까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우정 하나가 꼭 존재하기를 바란다.
158 “선배는 그럴 수도 있잖아. 다른 사람과 다를 수도 있잖아!”
“응, 어쩌면 그럴 수도 있어. 근데 넌? 너도 그때가 되면 다시 돌아온다고 확신할 수 있어? 네가 성인이 된 뒤에도 나를 계속 좋아할 자신이 있어? 넌 별자리도 아닌데?”
시리우스는 다시 담배를 꺼냈다.
난 그럴 수 있어! 선배만 깨끗한 영혼이면 나는 얼마든지 선배만 바라볼 수 있다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나는 마음으로만 고함을 질렀다.
“여여야, 누구나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럼 현재를 충분히 즐기면 된다고 하고 싶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불가능하잖아. 무엇보다 나는 나를 못 믿어.”
⇒ 결코 별자리 같을 수 없었던 시리우스와의 짧은 만남. 여여에게 엄마와 아빠의 짧은 만남과 사랑을 이해시키기 위해 등장시킨 작가의 뻔히 보이는 장치 같지만, 나름 효과적이었다.
172 온실 안은 바람 한 점 없는데, 수많은 하트 모양의 잎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들었다. 날 봐, 나도 좀 봐, 나도 하트야, 나도 나도, 나도 하트야……. 셀 수 없이 많은 하트가 나를 둘러싸고 빠르게 빙빙 도는 통에 어지러웠다. 하트가 이렇게나 많단 말인가. 사랑은 이런 거였나.
⇒ 여여는 정말 건강한 아이다. 스스로 치유법을 찾을 줄 아는.
194 “그래, 네 안에는 빛이 있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모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빛이 답을 가르쳐 줄 거야. 어둠 속에 있을 때도 빛은 너를 이끌어 주고, 네가 밝음 속에 있을 때도 반짝이면서 잘 하고 있다고 알려 줄 거야. ……네 안에 살고 있는 그 빛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름 짓기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골똘히 생각을 모았다.
“음, 발광 바이러스는 어때? 빛을 내는 바이러스가 내 안에 살고 있는 거야.”
~ “오, 그래, 그 주문 좋다. 빛나라, 발광 바이러스야, 얍!”
⇒ 이 글이 실린 소제목이 ‘엄마의 유언은 짧기도 하다’이다. 한국적인 캔디 버전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어쨌든 촌스럽지만 힘이 되는 말일 것이다.
196 “엄마, 나 시험 망쳤어!”하고 호들갑을 떨며 엄마에게 투정하던 날은 이제 와 생각하니 얼마나 행복한 날이었는지. 나는 이제 시험이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시험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아이는 행복한 아이임에 틀림없다.
⇒ 시험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아이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대목이다.
208 엄마 손은 따뜻했다. 죽은 사람 같지 않아.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아. 눈언저리와 입술이 좀 보라색이긴 하지만 아플 때와 다르지 않아. 엄마 얼굴을 만져 보았다. 얼굴도 따뜻하다. 이제 엄마와 헤어지는 건가? 이렇게 영영 이별인가?
⇒ 그 동안 계속 이 순간을 향해 달려온 것 같다. 마지막 이별 장면이 아직은 온기가 남았는 엄마를 만져보는 장면이라니.. 이 장면에서 눈물이 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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