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터(이희영)

 

깨진 거울에 소년의 얼굴이 반반 나뉘어 있다. 평범한 얼굴 반쪽과 실험 장비가 연결된 얼굴 반쪽, 그리고 테스터라는 제목에서 소설이 내용을 예측해 본다.

 

반전이 많은 이야기다.

반전이 있을 거라 예상하면서도 반전의 내용이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다. 이야기는 반전을 통해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인간의 이기심을 생각해 보게 한다. 또한 과학의 발전이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지, 인간과 휴머노이드 사이의 차이를 통해 인간의 본질도 생각해 보게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마주치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과 과학의 폭력적인 욕망과 이에 대한 개인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중학교 1학년도 금방 몰입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

 

 

인상 깊은 구절.

(28) 아버지는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부쩍 말수가 줄었다. 사업은 날이 갈수록 확장됐고, 위태로웠던 호텔 셀레나마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외롭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제도 없었고, 아내마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편보다 일을 더 사랑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어붙은 마음에 새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늘 보던 노을마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달은 물론 화성까지 테라포밍해 이주하고 로봇과 휴머노이드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서도 결혼과 가정, '아이'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는 게 인상적이다. 최첨단의 시대에서도 바뀌지 않는 인간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

 

(99) 선생님을 만날 때면 마오는 어쩐지 편안했다. 보보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기분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공감이라는 사실을, 마오는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마오는 인간, 보보는 휴머노이드다. 인간과 휴머노이드는 소통은 가능하지만 감정까지 나누지는 못한다. 그래서 공감을 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감정과 공감 등은 인간과 기계의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런 이야기 흐름에서는 반려 동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채우지 못한 감정-외로움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113) “물론 각 나라의 군대와 과학자, 연구원, 그리고 화성을 개발하려는 사업가들도 몰려가 있어. 하지만 그들은 민간인 거주 지역으로 개발된 곳에서 살지 않아. 안전한 특수 센터에서 살고 있지. 민간인 거주 지역을 개발한 것은 로봇과 휴머노이드야. 그러니 진짜 인간들이 살면 어떨지 전혀 알 수 없잖아? 그곳이 어떤 땅인지, 무엇이 있는지, 인간에게 어떤 위험물질이 숨어 있는지. 단순한 데이터만으로는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어.”

 

과학과 정치의 이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화성 이주권 복권'은 화성이 인간이 살아가기에 안전한 곳인지 '합법적'으로 실험하기 위한 사회정치적 이벤트다. 어느정도 데이터를 확보하고도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시도인데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는 최소한의 데이터도 없이 실험하고 우리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안전하다고 홍보하고 있으니 그 이면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118) 인간에게 가장 큰 경쟁력은 바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노화를 막기 위해 흐르는 세월마저 멈춰 세웠다. 그렇게 손에 넣은 시간을 각종 유희를 위해 썼다. 윤택한 삶의 척도이자 성공의 기준은 누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여유롭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미래 사회는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수명이 상당히 길어지겠지만 결국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고 이를 즐겁게 활용하는 것이 성공의 기준이 될 것 같다.

 

(122) 번데기가 되지 않는 한 날개를 가질 수 있는 애벌레는 세상에 없었다. 종의 차이만 있을 뿐 지구의 모든 생물은 성장을 위해 힘든 과정을 생략할 수도, 지루한 시간을 건너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이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 했다. 신이 정해놓은 자연의 규칙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오는 문득 자신이 그 건방진 도전장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신에 도전하는 인간과 같은 생명체 역시 진화의 한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과학자 '카르다쇼프'의 문명 척도가 생각난다.

 

(195) 로봇에게 의심이 없다는 건 욕망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보보는 인간을 통해 얻고 싶은 게 없었다. 그래서 멋대로 추측할 필요도, 넘겨짚을 이유도 없었다. 인간도 처음에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보이는 그대로 상대를 믿고,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너무 많이 진화했는지도 몰랐다. 그결과 스스로조차 믿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간과 휴머노이드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욕망을 지녔기에 종잡을 수 없는 인간,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 가능하지만, 그에 비해 기계는 욕망이 없기에 솔직하며 수정 가능한 존재로. 인간이 기계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통제되지 않는 즉흥성을 지녔다는 것인데 이것을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본질과 상충되는 것이라 본질적으로 모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모순적이므로, 인간이 생각하는 대안으로서의 과학 역시 모순적인 방향으로 가거나, 발달한 과학의 입장에서 모순적인 인간을 통제하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특이점이라고 부르고.

 

(210) 아무리 세심하게 원격진료를 보는 시대라 해도, 인간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말한, 현대 의학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꾀병을 다시 불러내야 할지도 몰랐다.
달에 호텔을 짓고 화성에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하는 위대한 존재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결국 인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형체가 없는 것들에 평생을 휘둘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과학은 우리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즉 발전이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학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이를테면 아이러니하게 전쟁이나 전쟁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인류를 크게 도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 확장된 해결의 영역만큼 문제 영역 또한 계속 등장한다. 완전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특히 변하는 것에서는우주도.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 소설 상당히 철학적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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