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해?(존 업다이크)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여러 상황이 담긴 단편집
- 2011. 1. 8.
연말연시를 병원에서 보내게 되리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해?’라는 책으로 2011년을 열었다. ‘친구와 적에 대한 16편의 이야기’, 또는 미국의 일선 고등학교, 대학교 교사들이 필독서로 꼽는다는 등의 홍보문구가 무척 끌렸다.
각 작품마다 깊이와 감동의 편차가 컸지만, 16편이라는 작품 수만큼 느낌도 다르고, 감동도 달랐다. 원어로 읽었다면 좀 더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특히,
[이럴 수가-민들레 와인-중에서]는 배경과 인물의 심리가 섬세하게 그려지는데, 영어로 읽으면 문장이 매우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몰입하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첫 작품부터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뒤로 갈수록 매력적인 작품들이 눈길을 붙잡아 주었다.
납치와 강간의 위기에 처한 커니의 이야기 [어디 가, 어디 있어어?]와
가난한 흑인 소녀의 열심히 달리는 이야기 [레이먼드의 달리기],
애완견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소년의 이야기 [소년과 개],
씰리아를 돌봐야 하는 주인공의 상처를 그린 [등 뒤의 씰리아],
베트남 전쟁 이야기 [매복],
이웃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아는 아네]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문화와 언어 등 넘기 어려운 장벽도 있지만, 단편이 주는 강렬함과 성장의 단면들은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가난, 전쟁, 폭력, 우정, 상처와 치유를 경험하며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다. 몇 편의 작품을 발췌해서 읽으며 아이들과 함께 토론해도 좋을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
89 [레이먼드의 달리기]
그 애는 축하하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씩 웃는다. 나도 씩 웃는다. 우리는 경의를 담아서 서로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서 있다. 여자애들은 정직하고 존경스러운……그러니까……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보다 꽃이나 요정, 딸기가 되기 바빠서 날마다 진짜로 웃는 법을 연습할 시간이 없다. 그 점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면 가장 진짜에 가까운 미소가 아닐까 싶다.
✎ 달리기밖에 모르는 가난한 흑인 소녀의 이야기. 오월제 달리기에서 1등을 한 후 내내 경쟁자였던 그레첸과 나누는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답고 감동스럽다.
92 [소년과 개]
나는 곧 열다섯 살이 되는 열네 살인데, 앨폰스는 아흔네 살이 되는 열세 살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 나는 앨폰스와의 관계가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평생 들어줄 줄 알았다. 녀석이 죽으면 누구한테 비밀 이야기를 해야 할까? 허브 몰킨한테도 하지 않는 이야기는 녀석에게만 하는데.
✎ 동물과 사람의 우정을 다룬 영화는 많은데, 소설은 드문 것 같다. 특히 성장소설에서는. [소년과 개]는 개와 함께 성장한 소년이 사랑하는 개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유머스러우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냈다. 어쩔 수 없이 개를 죽여야 하는 이상권의 단편 [성인식]과 비교해서 읽어도 좋을 듯.
111 [등 뒤의 씰리아]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우리 동네에는 뺨이 불룩하고 반질반질한 데다 아주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는 여자애가 있었다. 이름은 씰리아였다. 워낙 특이하고 어른스러운 이름이라 우리들 사이에서는 항상 놀림감이었다. 우리가 씰리아를 자꾸 놀린 이유는 뚱뚱했고, 당뇨병 환자였으며, 놀리면 잘 삐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씰리아한테 잘해줘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잖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일곱 살 때부터 그게 얼마나 불공평한 처사인지 간파했다. 인간은 누구나 어차피 죽기 마련이고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모두들 나한테 잘해주거나 서로 잘해주려고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 우리는 종종 장애아와 소외된 사람들을 진심이 아닌 의무감으로 돌아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진심이 아닌 의무적인 도덕성을 강요하기도 한다. [등 뒤의 씰리아]에서는 씰리아가 아닌 씰리아를 의무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엘리자베스의 마음 속 상처가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 물론 엘리자베스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지만. ^^;
186 [꼴통]
그때 내가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는데,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고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지만, 인간은 누가 자기를 너무 우러러보면 그 사람을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자기한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을 우러러보게 된다. 이런 상황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이야기.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231 [매복]
나는 그 젊은 남자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를 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도덕이라든지 정치라든지 군인으로서의 의무라든지 하는 문제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였다. 속에서 레모네이드처럼 시큼한 과일 맛이 올라오는 것을 계속 삼키려고 애썼다. 나는 겁이 났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생각은 없었다. 수류탄이 그를 처치하려는 순간-사라지게 만들 것이다-뒤로 기대고 앉아 있는 내 머릿속이 텅 비었다 다시 채워지는 게 느껴졌다. 수류탄을 던지자고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전에 이미 던져버린 상태였다.
✎ 연평도 사건으로 전쟁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 <슈팅 더 문>의 오빠가 느낀 전장의 처참함이 섬세하고 슬프게 그려져 있다.
240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중에서
“할머니한테 듣자 하니 책을 아주 많이 읽는다면서? 틈이 나는 대로 읽는다고. 그것도 좋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종이에 적힌 것보다 말이 더 중요하거든. 인간의 목소리가 단어에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부여하는 거란다.”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미묘한 차이를 부여한다는 부분을 기억했다. 무척이나 설득력 있었고, 마치 시처럼 들렸다. 부인은 책을 몇 권 줄 테니 눈으로 읽지 맑고 큰 소리로 읽으라고 했다. 최대한 여러 가지 말투로 문장을 읽어보라고 했다.
✎ 16개의 단편 중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라는 작품을 읽고 싶을 정도로.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데 발췌된 부분에서 왜 주인공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작가 후기를 보고 알게 되었다. 여덟 살 때 강간을 당하고 입을 닫아버린 것.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다정하게 감싸주는 플라워스 부인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특히 책을 읽는 방법과 인생의 교훈을 이야기하는 아래 부분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243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내가 과자를 먹는 동안 부인은 ‘내 인생의 교훈’이 된 이야기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부인은 무지는 용납하지 않되, 문맹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도 대학교수보다 더 교양 있고 똑똑한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부인은 시골 사람들이 말하곤 하는 ‘우리 어머니 말씀’을 귀담아들으라고 했다. 집에서 전해 내려오는 명언들 속에는 몇 세대에 걸쳐 축적된 지혜가 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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