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규정 관련 논의에 대한 생각
- 행복한 글쓰기/가르치고 배우며
- 2007. 8. 27.
"안녕하세요. 개학이 정말 내일모레입니다. 방학과제, 용의단정 살펴주시고요 건강하세요. 1-3강현올림."
개학을 며칠 앞두고 우리반 학부모님께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개학 후 첫 주는 방학과제 점검과 용의규정 준수 확인이 가장 중요한 교육활동으로 부각될 예정입니다. 특히 용의 규정 준수는 이전부터 특히 방학식과 방학 중 가정통신문을 통해 여러 차례 강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담임교사이며, 학생부 담당 교사이기에 학생 여러분과 가장 많이 부딪칠 것 같아 예전에 블로그에 써 놓았던 글을 조금 수정해 학교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생활 지도를 하려고 교문에 서는 제 마음입니다.
*이 글은 2007년 4월 10일경에 학교 홈페이지에 류○○ 학생이 올린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에 대한 답글임을 참고해서 읽어주세요.
류○○ 학생이 올린 글 잘 읽었습니다. 용의규정에 관한 논의는 작년에 일단락됐지만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하지 못했기에 학기 초, 학생회 선거 후와 맞물려 적절하게 문제를 제기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에밀 졸라의 말을 통해 결국 '용의규정'이 국가주의적인 사고이며 인권 침해 요소가 많다는 지적을 효과적으로 펼쳤다고 생각합니다. 류형경 학생의 글에 대한 학생들의 댓글 대부분도 우리 학교 용의규정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류○○ 학생의 글을 읽으며 토론회 당시 논의에 참석했으며 관련 업무를 맡는 교사로서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2007.4.10) 다시 10여 분 정도 홈페이지를 살펴보았지만 류○○ 학생의 글을 찾지 못해 그때 읽었던 내용을 떠올려 류○○ 학생의 글에 대해 반론 내지는 주장을 펴고 싶습니다.
류○○ 학생의 주장을 기억나는 대로 정리하면,
'용의규정'이란 것 자체가 인권 침해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 못지 않게 학생 역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데도 용의규정은 주체를 객체로 전락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용의규정을 둘러싼 교사, 학생, 학부모 학교 구성원 간의 토론회 역시 절차상의 민주주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학생회를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으며, 토론 과정 역시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것보다는 학부모나 교사의 입장을 강요하려는 측면이 많았다고 지적했고, 그런 면에서 작년 학생회는 직무유기를 범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학생회 선거 과정에서 후보자들의 의식이 실현성이 극히 미비한 '비데 설치'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거나 용의 규정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는 점에서 학생회의 의식 개선과 함께 용의규정을 없애도록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용의규정에 대한 교사 토론회에서 줄곧 현재의 용의규정이 필요 이상으로 제한이 많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3학년 학생들이 2학년 국어 시간에 배웠을 "나의 그녀"라는 책에는 "기본적으로 어른들에게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아이들에게도 문제가 없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사 토론회 결과는 제가 주장했던 내용이 대체로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불만족스럽지만 제 생각에 대한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고, 다수 선생님들이 생각하시는 우려 점은 시간을 가지고 신뢰를 얻어 공감의 차원으로 나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의규정의 인권 침해적 요소에 대한 우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통해 국가 역시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가위원회의 성격이 개인과 소수 인권을 환기시키고 문제제기를 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현실과 구성원들의 사고에 비해 진보적인 측면을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합의를 거쳐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가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류○○ 학생이 지적한 용의규정을 둘러싼 교사, 학생, 학부모 토론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공감합니다. 학생들의 의견을 내세우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학부모와 교사의 상당수가 자유로운 용의규정이 가져올 문제에 대해 경험적인 비판을 내세워 대등한 관계에서의 합의의 자리가 아니라 1:2로 기울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용의규정을 결정하는 과정의 '절차적 민주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가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설문조사와 대표들의 의견수렴 과정이 왜곡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민의에 바탕을 두는 사상이고 그만큼 사상의 자유를 허용합니다. 사상의 자유를 누리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해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최대한의 합의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상당수는 새로 바꾼 용의 규정 역시 억압적이며 특히 남학생들은 더 심한 억압과 함께 학생들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긍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사와 학부모의 상당수는 기존 용의규정의 억압적인 측면이 많이 완화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다른 학교에 비해 진일보한 용의규정을 만들어 놓고도 지키지 않아 학생과 학교에 대해 불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용의규정이 절차적으로나 본질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제기보다는 합의한 내용을 준수하여 학생, 학부모, 교사 사이의 믿음을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용의규정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머리카락의 길이나 치마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을 독립적인 주체로 보느냐 의존적인 존재로 보느냐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깊습니다. 용의규정에 관한 설문조사, 대토론회를 통해 학교 구성원들은 학생들을 여전히 의존적인 존재로 보고 있으며 그래서 학생임을 식별할 수 있는 용의규정, 학생다운 용의규정을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을은 선선해 놀기에도 좋지만 공부하기에도 좋습니다. 그런데 선선한 가을은 일 년 중 매우 짧습니다. 교문에서 규정에 맞는 단정한 모습으로 여러분과 2학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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