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도 먹고 살았으면.

교과서를 달달 외워야했던 대입학력고사가 끝나자 내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기타와 컴퓨터였다. 기타는 낭만을, 컴퓨터는 진보를 뜻하는 듯 느껴졌다. 둘 다 손가락으로 하는 것이지만 자판을 외우고 도스 명령어를 외워야했던 컴퓨터 보다 기타 치는 재미가 더 쏠쏠했는데 Dm, Am 등 코드 몇 개만 배우면 쉽게 연주할 수 있는 노래가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닥불", "꿈을 먹고 사는 젊은이" 제목마저 다분히 옛스럽고 낭만적인 이 노래들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겐 내가 아이들보다 부모님 세대에 더 가깝다는 기억만 줄 그런 노래들이지만 반복되는 음률 속에 젊음과 추억, 동질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외우지 못한 코드 때문에 연주를 멈추기도 하고, 감정이 격해지다 보면 기타를 뒤집어 타악기로 쓰기도 했지만 힘겨웠던 시절을 돌아보며 국어교사의 꿈을 키우게 한 주된 수단이 되었다.

"타오르는 꿈을 안고 사는 젊은이여~" 로 시작하는 '꿈을 먹고 사는 젊은이'라는 노래. 하지만 우리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꿈도 꿈이지만 돌아볼 추억 역시 없는 경우를 자주 본다. 막연한 미래를 위해 1년 365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야 하는 아이들. 과거 없는 현재가, 현재 없는 내일이 없다고 할 때 꿈을 먹고 사는 것만큼 추억을 먹고 사는 일 또한 중요한 것 아닐까.

우리 국어 수업은 추억을 되새겨 보는 일이 많다. 국어의 절반이랄 수 있는 문학 감상도 우리 조상들의 생각과 느낌을 간접적으로 되새겨 보는 활동이며, 국어 시간에 쓰고 있는 생각 공책 역시 멀지 않은 미래에 공책 분량만큼의 추억을 담아가는 활동이다.

1학년 2학기 첫 번째 주제 "생활의 발견"은 생활글을 쓰며 자신을 재발견하는 활동이다. 30여 일이 넘는 여름 방학을 돌아보거나 가장 일상적인 문화 생활인 영화를 소개하는 것인데 여름 방학 글쓰기는 "인상 깊었던"이란 제한 아래 기억할 만한 사건, 사람, 책 따위를 정리해 계획대로 되지 않았거나 기간이 길어 다소 허전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는 활동이다.

과거는 의미 있는 세세한 내용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고 있느냐에 따라 되새겨볼 내용도 많아진다. 하지만 우리는 분위기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세세한 일이나 감정을 잘 담아두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생활글은 사건만 나열하고 만다. 그래서 친구들의 질문과 조언으로 조금더 세밀하게 적어보는 모둠활동이 포함되었다.

우리 남학생 대부분은 방학 동안 인상 깊었던 기억이 없다고들 한다. 학원에 몸을 맡겼기에 특별한 일이 없다고도 하고, 가족과 함께 피서를 갔지만 으레 그러려니 하고 만다. 오히려 이 둘을 합한 학원에서 피서 간 일이 재미있어 기억난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대부분 방학동안 했던 일이 “던전이니, 스타니, 메이폴스토리니..” 컴퓨터를 붙잡고 레벨업을 하거나 아이템을 확보하는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천편일률적이란 말이 이렇게 적절할 수 있는지 정말 생활을 돌아볼 일이 없었거나 돌아볼 힘이 약하거나.

“영화 소개하기”는 2학기 첫 번째 모둠활동으로 교사가 추천한 영화를 함께 감상하고 활동 내용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활동이다. 어릴 때 작은 문화적 경험이 더 큰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공익광고를 어릴 때 작은 추억이 더 큰 꿈을 키워갈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무리가 있을까.

아이들의 발표 내용을 들어보며 아이들의 추억을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한 수업의 문제를 ‘되새겨’ 본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수업이지만 10월 말 이야기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리 아이들의 추억을 되돌아 볼 기회가 있다. 

추억은 박제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 갑자기 흥얼거리게 되는 유행가 가사처럼 자꾸 되씹어보며, 든든한 기억으로 남거나 가끔은 앞을 내딛는 든든한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방학동안 특별한 일이 없다던 우리반 영남이가 여름방학 때 가장 기억나는 일로 쓴 "수박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결국 똑같은 하루란 없다. 돌아보면, 모든 게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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