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과거와 미래, 항주와 상해 여행

1. 책 속 여행
지난 여름 방학 ‘열하’에 다녀왔다. 250여년 전의 선비 박지원 선생의 눈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그리고 열하까지 배움의 눈으로 중국의 모습을 세심하고 다양하게 살펴보았다. 특히 열하일기 속에 그려진 삶의 모습은 한 가지 기준으로는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다양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한족 중심의 중국은 실은 다양한 소수민족의 삶과 역사가 혼재돼 지금의 ‘중’국이 된 것이다. 


책을 읽으며 중국을 여행하고 싶었다. 2003년, 첫 해외 여행으로 중국을 찾은 건, 중국 소설가 ‘차오원쉬엔’의 “빨간 기와와 “까만 기와”였다. 성장소설이란 측면에서 문화혁명을 비롯한 중국 현대사가 아이들에게 끼친 영향도 인상적이었지만, 운하를 배경으로한 중국인의 삶이 우리네와 너무 달라 가보고 싶었다. 독서 모임을 함께했던 교사들과 상해, 항주, 소주, 무석, 남경 등을 돌아다니며, 운하와 생활, 운하와 환경, 음식 등 물과 함께한 중국인들의 모습을 겪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하 우리 민족의 방랑에 가까운 도피를 가슴 아프게 느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이번에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국제교류 체험학습의 인솔 교사가 되어 다시 상해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전 여행과 코스가 거의 비슷한, 그래서 좀더 세세하게, 발전한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인솔의 부담보다는 다소 들뜬 마음마저 들었다.

 

 

2. 바다 위의 도시 ‘상해’
상해(上海)는 ‘바다 위의 도시’라는 뜻으로 중국 역사에서 바다가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열강의 침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도시다. 지금도 황포강을 경계로 100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외탄'은 '중국 속 유럽'으로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상해는 2010년 해양 엑스포를 앞두고 있어 도시 전체가 공사중이다. 많은 건물이 리모델링을 했고, 지역별로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중국의 과거를 보려면 서안을, 중국의 현재를 보려면 북경을, 중국의 미래를 보려면 상해를 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포동(황포강을 경계로 외탄의 맞은편)에 있는 마천루, 다층적으로 이루어진 고가도로와 지하도로로 보이는 중국은 이름만큼이나 거대한 존재로 다가온다.
상해 관광은 전형적인 현대 문명의 관람이다. 일단 외세에 의해 문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던 조계지들의 문화와, 이후 중국 자체의 발전에 따른 변화를 한꺼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는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지, 화려하게 불밝힌 야경이라든지.

 

그래서 상해임시정부와 청나라 때의 정원 ‘예원’의 느낌은 다소 어둡다.
가정집을 공관으로 사용했던 상해임시정부는 나라 잃은 국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제의 눈을 피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세운 임시정부, 그러나 수 차례 옮길 수밖에 없었던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은, 현재도 재개발의 위협 속에 존폐 여부마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어지고 있다. 또 국내에서도 작년 '광복절'을 '건국절'이라 하여 일제부역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려했던 사건은, 일제 하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일이,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역설적으로 짐작하게 해준다.

예원은 신정 연휴를 맞은 중국인들의 방문과 엑스포를 앞둔 리모델링으로 혼잡했다. 아이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느라 예원 입구까지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 올해는 예원을 만든지 4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아버지를 위해 18년간 지었다는 예원은, 공들인 시간만큼 웅장하고 섬세했다. 특히 담장이나 회랑을 기와로 여러 겹 쌓아 올려 용의 비늘을 표현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용은 임금이나 황제를 상징한다. 용을 인테리어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 앞의 두꺼비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장식에서는 재치가 느껴진다. 다만 태호의 돌을 주워다 만들었다는 정원석(태호석)은 경관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 번 여행에서 중국사람들이 가고 싶다는 10대 관광지에 해당하는 무석의 원림 ‘졸정원’에도 그런 돌들이 많았다. 자연을 그대로 살려 동산을 만들려는 우리식 ‘원림’과 사고의 차이를 보여주는 정원이다.

 

용의 턱아래, 두꺼비!


중국에서 먹은 첫 저녁은 비교적 입에 맞았다. 특히 아이들이 잘 먹었다. 골고루 다 맛보았는데 콩나물이 제일 맛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새로 뚫린 고속도로를 2시간 남짓 달려 항주시 ‘여항’ 숙소에 도착했다. 고도속도 바로 옆에 교각이 있고 한밤중인데도 교량 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숙소엔 식당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이 많았다. 밤늦게까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시끄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해 텔레비전을 찾았다. 우리나라 방송과 외국 방송이 몇 보였는데, 더빙을 해 놓았거나 중국어 자막으로 제공되고 있어 방송을 볼 수 없었다. 정보화 측면에서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세계화에 불리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외국어도 자기식대로 문자를 새로 만들어 자국인들이 언어생활을 하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는 문자 생활만큼은 부럽고 배울만한 점이다. 원격조정기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소설책 임시정부 청사 방문 전 보려고 가져왔던 “백범”을 펼쳤다. 분노보다 차가운 슬픔을 주제로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당시의 상황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12시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첫날을 마무리했다.

 


3. 송나라 수도 ‘항주’
항주는 절강성의 성도다. 절강성은 면적이나 인구수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중국인들은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인간 천당은 소주와 항주다”하여 이곳 항주를 인간 천당이라 말하며 이곳 항주를 살고 싶은 도시로 꼽는다고 한다. 벼농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으로 먹을 것이 풍부하며, 지금도 의류, 신발,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단이 많아 생산적이며 자연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항주의 첫 번째 여정은 “악왕묘”다. 악비는 남송 시대의 장군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끝까지 막아냈으나 간신배와 전쟁에 겁을 먹은 황제로 인해 죽임 당하는 불운한 영웅이다. 악비‘묘(廟)’는 악비 장군의 사당으로 중국인이 많이 찾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삶을 뛰어 넘었기에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칭송받고 있다. 반대로 악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진회’와 같은 간신배들은 악비묘(墓)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데 ‘침을 뱉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을 정도로 죽어서까지 크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 중국 욕에 “진회 같은 X”이 가장 큰 모욕이라는데 '악왕묘'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눈앞의 현실로 보여준다.

 

부인 왕씨도 악비를 모함한 사람이었다고!!


점심은 서호 근처 식당에서 먹었다. 한국인의 거의 없는 식당으로 중국의 향료 냄새가 많이 났다. 큰 호수가 있어서인지 물고기 반찬이 여러 개 있었으나 서호는 낚시가 금지돼 있으므로 이곳 고기는 아닌 것 같다. 잉어탕과 청경채로 밥을 먹고, 동파제를 걸어 유람선으로 서호를 둘러보았다. 


서호는 오랜시간 호수의 바닥을 파서 쌓은 제방이 있고, 그것으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전단강에서 물을 끌여 정수 과정을 거친 후 물을 유입하기에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고 있다. 서호에서 바라보면 삼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에 도시가 있어 자연과 인문이 함께하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서호 주변엔 지붕이 금으로 도금된 건물을 보게 되는데 모두 절이다. 항주는 불교의 도시다. 불심으로 재해를 막거나 막힌 기운을 풀기 위해 뇌봉탑이나 육화탑 같은 탑은 그 증거다.

 

아침에 입장하려다 여권이 없어 오후에 방문하게 된 “서계천당”은 1500년 전부터 내려온 도시 습지라고 한다. 지역적으로 도시 근처에 있어 도시습지라고 하는데, 습지에 응당 있기 마련인 각종 조류보다 사람들과 함께해온 습지였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30분을 탐방했다. 습지가 그렇듯 진흙이 많고 진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수로 옆을 통나무를 세워 쌓았다. 관광용 배가 아닌 홀로 배를 타고 지나갔다면 습지의 고요함이 좋았을텐데 사람이 많아 자연적인 운하를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에서 내려 청대에 형성된 마을을 산보하였다. 운하(수로)를 중심으로 마을은 형성되고 이어졌다. 마음의 중앙에는 나무로 지은 하저탑(河渚塔)이 있어 도시 속 습지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멀지 않는 곳에 공단이 있어 도시 속 한가로움이 더 했다. 전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습지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녁은 녹차로 유명한 용정에서 먹었다. 우리 나라 사람이 많이 찾는 관광지라 반찬으로 김치가 나왔다. 지난 번 중국에 왔을 때, 여기서 마신 차맛에 반해 녹차를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와서 먹으니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물맛의 차이라 생각했데, 다시 생각해보니 음식맛의 차이인듯 싶다. 지난 번 제대로 먹지 못했던 '동파육'도 이번에 먹을만 했다. 녹차맛이 우리나라 녹차맛과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인근에 있는 ‘송성’에서 가무쇼를 보았다. ‘송성’은 일종의 테마파크다. 입구를 들어서면 <이웃집 토토로>에 나올만큼 큰 느티나무에 극원(극장)까지 거리를 따라 인형극부터 식당까지 볼거리가 많았다.
“송성가무쇼”는 항주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신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송나라를 건국한 이야기, 송나라의 위상을 보여주는 궁중 연회, 악비 장군 이야기, 견우와 직녀 이야기와 비슷해 보이는 서호 전설과 용정차 소개, 마지막으로 타지마할 묘당을 배경으로 인도춤과 아리랑을 배경으로 장구춤과 상모돌리기를 보여주었다.
우리 나라에 이런 볼거리가 없기도 하지만, 영상으로 독특한 무대 분위기를 형성하거나, 전쟁을 표현한 장면에서 실제 말을 타고 등장하거나 관객을 향해 대포를 쏘고, 무대 전체에 비를 뿌리는 장면 등 규모가 컸다. 특히 앞좌석이 수시로 옆으로 이동하며 무대를 크게 사용하는 점, 용정차를 소개할 때에는 VIP석에 직접 차를 대접하는 장면 등은 내용과 형식, 관객에 대한 서비스 모든 면에서 항주 사람들의 자부심이 잘 드러났다.

 


4. ‘상해’의 과거
셋째 날 일정이 빨리 끝나 다소 여유 있게 상해로 떠났다. 2시간 쯤 차를 타는 동안 김별아의 “백범”을 읽었다. 익숙하지 않는 어휘, 역시간적 구성, 또 김구 선생 집안의 이야기를 읽으며, 치열하지 않는 삶은 없고, 매번 새로 시작하는 게 우리 삶이다 싶었다. 다음 날 ‘상해금사과학교’ 일정도 있고 해서 버스 안에서는 중국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중국의 학제는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중학교 진학까지는 쉬우나 고등학교부터는 입시성적이 좋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비평준화) . 대학시험제도는 지역별로 인원이 정해져 있어 입학 점수가 다를 수 있으며, 소수 민족에겐 가산점이 있다고 한다. 교육열이 우리만큼 높아 사교육비 또한 많이 들어간다. 9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돼 이번 교류할 학교는 시험기간이라는 것. 특히 대입 제도와 서열화된 대학, 유학생들에게 비교적 문호가 쉽게 열려 있으나 졸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가이드의 체험이 수반된 이야기여서 아이들도 관심 있게 들었다. 점심은 상해의 코리아타운에서 삼겹살과 된장찌개를 먹었다. 얇은 삼겹살, 큰 상추, 맛과 함께 여기가 우리 나라가 아니라는 느낌을 환기시킨다.

<초한지>, <삼국지>가 잘 말해주듯, 중국이 현재와 같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수천 년 전쟁의 결과다. 가진 게 많은 부자들은 일가를 이뤄 산으로 피했는데, 그렇다 보니 사람의 성씨에 ‘家’가 붙은 지역이 많다. ‘주가각’ 역시 주씨 일가가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다. 인근 강에서 수문을 열어 운하로 활용하여 생활하는 전형적인 청나라 촌락인데,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청나라 우체국까지 15분 정도 이동한 후 자유롭게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좁지만 깔끔하고, 생활 물건을 내놓아 판매하고 있었다. 열띤 호객행위도 없어 정말 여유롭게 걸었다. 중국에서는 나룻배를 타고 관광지를 돌아보는 일이 잦다. 땅이 넓고, 평지가 많은 중국 땅에서는 효과적인 이동수단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 빨래를 하고 음식물을 씻는 원주민의 모습들, 끓여 먹지 않으면 배탈이 날 수 있는 물사정을 감안하면 물을 고이게 하여 운하로 이용하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특히 우리 나라 상황에서.

 

골목이 좁기 때문에 집수리도 운하에 배를 띄워 하고 있다.


상해는 우리나라보다 남쪽에 있어 기온이 높지만 바닷바람 때문인지 홍구공원까지 가는 길이 쌀쌀했다. 번화한 도로 곁에 있는 홍구공원을 여기서는 뤼쉰공원이라 한다. 홍구공원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곳으로, 상해사변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패배해 대국의 자존심에 상처받은 중국인들에게 조선을, 대한민국을 자각하게 만든 사건이었다고 한다.
실제 의거 장소에서 떨어져 있는 기념비와 기념관(매헌)처럼, 이곳을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분히 의례적이다. 새삼 비분강개할 것은 아니지만, 조국애는 아니더라도 철학이나 인생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이지만 그런 긴장감은 없다. 오히려 어설프게 우리말로 윤봉길 의사를 소개하는 ‘공작원(안내원)’이 목소리가 더 경건하고 숙연하다. 김별아의 "백범"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적.물적.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진 임시정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윤봉길 의사는 아내와 자녀가 둘이나 있었지만 죽을 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친일부역자들은 일제 시대에 민족과 나라 개념이 없었다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여기에 와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저녁은 ‘태가촌’이라는 중국 소수민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가무를 보며 먹었다. 그리고 상해기예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몇 번 본 공연이고 그래픽으로 만든 가상현실에 익숙해서인지 대체로 밋밋했다. 간접체험의 일상화로 더이상 놀랄 것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더 큰 자극을 원하고 그 자극도 현실감 있게 느끼지 못하며 자신과 쉽게 분리된다. 요 며칠 언론에 보도된 졸업식 추태는 이런 요소들이 다양하게 얽힌 것이라 생각한다.
숙소 시설은 불편하지만 조용해서 좋다. 숙소에 인터넷 시설이 잘 구비돼 있는데 노트북을 가지고 오지 않아 아쉽다. 한국 방송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책이나 읽어야지.

 

5. 금사과학교
넷째 날은 금사과학교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아침 식당에서 만난 아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추웠다고 한다. 반팔만 입고 잔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된다. 4년전 이 호텔에 묵었을 때 나도 추웠다.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반팔 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난방을 제대로 하지 않고 생활하는 이곳 문화를 잘 몰랐으며 한편으로 한 겨울에 반팔 입고 생활하는 생활 모습도 바꿔야 한다.

 

금사과학교는 국제학교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금사과’를 따왔다고 한다. 학교는 단과대학 크기의 규모로 매우 컸다.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국제부 부장 선생님이다. 이 학교에는 국내부와 국제부가 있으며 2300여명의 학생 중, 150여 명의 외국인이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육과정은 12년이며, 기숙학교다. 영어와 중국어를 기본으로 교육하며 국제학교이기에 외국어를 강조한다고 한다.
도서실과 강당, 교실 몇 곳을 둘러보았는데 도서실은 2층 구조로 우리보다 규모가 작았고, 강당과 운동장은 훨씬 컸다. 교실 입구에는 학급 단체 사진이 붙어 있고, 학급 정원은 국내부는 30명 정도, 국제부는 10명 정도라고 한다. 학생 어깨에 한자로, ‘一, 二, 三’ 표시가 있는데, 반장, 분단장, 모둠장을 표시한 거라고 한다. 수업 시간 등 학교 생활은 우리와 중국이 거의 비슷하다고. 

이 학교는 사립학교다. 그런데 공교육기관으로 교육청의 지원과 지도를 받는 우리나라의 ‘사립학교’와 달리 학생들의 학비로만 운영되는 일종의 기업체로 모(母)그룹이 있다. 그렇다보니 학비가 비싸서 한 학기 등록금이 우리 돈으로 내국인은 300만원, 외국인은 500만원 정도 든다고 한다. 일반학교가 아닌 ‘귀족학교’의 '국제반' 활동 모습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오기 전 부산에서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가 있지만 더 이상 교류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비슷한 사정이지 않을까 한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국제교류 체험학습도 장기적으로 준비하면 그 효과가 좀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여기에 적을 수 없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우리 몸은 하나라서, 말은 아낀다. 

 

점심을 먹은 뒤에 상해의 랜드마크 ‘동방명주탑’을 둘러 보았다. 동방명주탑은 이름답게 높이, 그리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숫자 8개 구슬이 형상화되었다. 예전에 둘러보았을 때에는 전망만 볼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두 번째 큰 구슬의 아랫부분을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깔아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을 주도록 바꿔 놓았다. 중국은 이런 방법으로 관광지를 조금씩 개방해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높은 건물이 많다보니 동방명주탑에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동방명주탑 1층에 있는 ‘상해박물관’이 인상 깊었다. 1800년대까지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상해의 오늘은, 사실 제국주의의 수탈의 결과다. 박물관에는 상해의 전통적인 생활모습과 상해가 어떤 과정으로 개방되었으며, 그런 과정이 드러난 사진과 실물, 각 나라의 특색이 반영된 건축물들이 모형으로 전시돼 있었다. 설명을 세세하게 읽을 수 없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실물로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능했다. 동방명주탑을 나와 광주의 충장로와 같은 ‘남경로’를 둘러 보았다. 기온은 영상 7~8도 하는데 바닷바람 때문인지 너무 추웠다. 자유시간 45분 정도를 아이들은 가게 안에서 보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교장 선생님의 훈화와 퀴즈가 이어졌다. “동방명주탑에서 무엇을 보았나!” 아이들의 다양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는데, 아이들의 대답은 추상적이었고, 교장 선생님은 구체적인 꿈을 그려 대답하도록 요구하셨다.

 

 

6. 상해를 떠나며.
‘동방명주탑’에서 무엇을 보았나. 

지금이나 2003년이나 뿌연 안개로 풍경을 멀리까지 볼 수 없지만 동방명주탑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상쾌했다. 목포에서 상해까지 배를 24시간이나 타고 온 뒤라 어지간히 답답했고, 그렇게 높은 건물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6년에 상행에 왔을 때는 당시 가장 높다던 진마오빌딩(금무대하)에서 상해를 내려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때부터 속도 경쟁에 내심 질렸고, 일사분란한 중국 사회를 표상하는 건물을 성지 순례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두 번째 큰 구술 위에서 내려본 풍경.

생각해 보니, 난 뭘 보러 중국에 간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 여행을 부추기는 모 항공사의 광고가 생각난다. 세상의 속도를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상해’보다 ‘장가계’나 ‘황산’과 같은 넓은 자연을 바라보고 걸으며 내 인생을 돌아보고 설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대륙과 잇닿아 있지만 분단돼 섬나라 국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얼마나 빠른지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 빨라 허전하고 외롭고 우울한. 
이왕이면 중원을 벗어나 실크로드까지 수십 일을 걷는 중국여행이면 좋겠다. 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열하일기>를 읽고 열하를 걸어보면 되겠구나. 박지원에 눈에 비친 풍경과 인문을 바라보며 나의 본질을 만날 수 있겠구나.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