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열하기행, 사람을 만나다

1. 경계에서

이 강물은 두 나라의 경계선으로서, 경계란 물이 아니면 시울이 될 것 아닌가? 도대체 천하 백성들이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저 강물 시울 짬과 같은 것일세. 도를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저 물시울 짬에서 찾아야 될 것이네.
(열하일기 上 ‘도강록’ 중 30쪽 -보리출판사-)

 

어둑하던 기운이 걷히고, 회색빛으로 물든 인천공항이 제 모습을 보일 때 3시간 30분 만에 공항에 도착했다. 시계는 정확히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길이 막힘없이 시원하게 트였다지만, 기사님의 능력을 칭찬하기에 앞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쾌속(과속?)질주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속도를 느낄 틈 없이 곤히 잠들었지만, 동승한 몇 분의 선생님들은 긴장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새벽녘의 공항은 한산했다. 여행사와 약속한 ‘L카운터’에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은 7시. 중국 여행은 세 번째지만 인천공항을 경유한 것은 처음인지라 그 규모에 감탄하며 은행이며, 음식점, 카페, 화장실 등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2월부터 쉼 없이 달려온 열하모임(광주국어교사모임 고전문학기행-이하 ‘고전모임’)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는 기쁨에 기다림도 지루하지 않았다. ‘일야구도하기’, ‘야출고북구기’, ‘호곡장론’, ‘허생전’, ‘호질’ 등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열하일기>를 부분으로 더듬기만 했기에, <열하일기>는 미지의 신세계이고, 갈증을 부르는 오아시스였다. 마침 보리출판사와 인연이 있어 <열하일기> 두꺼운 양장본을 상, 중, 하 세 권으로 소장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소장’만.

하지만 모임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올 수 있었다.
“혼자 읽으면 어려우니 함께 읽어 볼까?”하며 평가회 자리에서 던진 말이 사람을 모으고, 배움의 열정을 현실로 만들었다. 광주국어교사모임을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지치지 않았던 힘은 바로 ‘사람’과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배움과 나눔이 생활이 되고 철학이 된 사람들이 모여 아이들을 생각하고, 수업을 고민하며, 배움을 나누는 모임이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자부한다. ‘고행(고전문학기행)모임’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2월에 첫 모임을 갖고, 3월부터 먼지만 쌓여 있던 보리출판사의 <열하일기>를 한 장 씩 열어 나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본이면서 우리말을 잘 살린 북한 작품(리상호 옮김)이라는 것이 박지원의 숨결을 제대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더 큰 기대를 갖게 했다. 그린비 출판사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로 모르는 내용을 보충하기도 하고,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함께 읽으며 고미숙 선생님의 열정과 찬탄을 나누어 갖기도 했다. 그리고 그린비 출판사의 무료 동영상 ‘열하 강의’(각 회별 70분 이상의 대단한 동영상)로 부족한 목마름을 채워 나갔다.

10~12명 정도의 선생님이 매달 함께 했고, 특히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문희숙 선생님과의 인연은 매 모임마다 감동으로 다가왔다. 전남 보성여중에 재직하고 계시면서 한 달에 한 번 광주까지 달려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우리에게 깊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열하’를 보여 주신 호모 쿵푸스 문희숙 선생님! 선생님으로 인해 연암의 안의현에서의 발자취와 <연암집>, 박제가의 <북학의>, 그리고 김탁환의 열하 시리즈까지 맛 볼 수 있었다. 비록 여행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열하까지 깊이 있는 발걸음을 함께 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렇게 읽어나가다 실제 열하기행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자료를 수집하다 2004년 중국 전문 여행사 ‘알자여행’에서 김풍기 교수님을 모시고 ‘열하기행’을 다녀온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사에 연락해 보니, 올해에도 여행계획이 있다고 했다. 진정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그리고 고미숙 선생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라니! 모임에 가속도가 붙었다. 흥분과 설렘으로 모임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열하’를 읽어가며, ‘열하’를 기다렸다.

공항을 둘러보며 1시간 남짓 기다리는 동안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강현(신광중, 필자의 남편, 소심하지만 맡은 일은 책임을 다하는 믿음직한 광주모임의 회장님), 김은희(고흥 도화중, 거리의 문제로 인해 모임은 함께 못했지만 모임 첫 시작부터 마음만은 함께 하고 책을 읽어 나간 참하고 귀여운 선생님)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임 회원들이 하나둘 씩 모이기 시작했다.

김수현(성덕중, 언제나 차분하고 배려심이 강해 맏언니처럼 우리 모임을 챙겨주신다), 정수희(치평중, 욕심이 많아 문어발처럼 여러 모임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절대 허투루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 범혜영(각화중, ‘열하일기’를 손으로 옮겨 쓰는 과도?한 애정행각을 펼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며 해외에 나가면 ‘울증’에서 급‘조증’으로 전환하는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 장수미(화정중,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성격에 적극적인 실천력으로 ‘고행’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다), 김선희(무진중, 승덕 이후 저질체력의 진수를 보여주었지만 서글서글한 성품으로 믿음을 주고 있다), 한선희(전자공고, 또 다른 저질체력의 소유자로 여행말미 고열로 인해 검역을 통과하지 못해 병원으로 급행했지만 그 정도로 ‘열하’에 열정을 쏟아 부은 조용한 투지의 소유자), 옥현정(무진중, 김선희 선생님에 이끌려 모임에 참여한 정보 선생님, 필자와 초등,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고 모임의 중요성을 또 한 번 느끼게 했다), 윤민광(성덕중, 김수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온 지리 선생님으로 해박한 해외여행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문수미(진남중, 절대 동안의 소유자로 안정적인 분위기로 여행을 이끌어 주셨다) 선생님까지 모두 12명의 선생님이 모였다.


하지만 문제는 ‘알자여행’ 조창완 사장님!

박재동 화백이 그려주신 사장님 캐리커처 (사장님 블로그에서 퍼옴)

7시까지 만나기로 했는데, 40분이나 시간을 넘겨 도착했다. 불만이 많았지만, 팬더같이 수더분한 모습에 정신없이 여권을 챙기고, 바쁘게 항공권을 끊는 모습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조용하고 수줍은 성품일 것 같은 예상은 빗나가고, 4박 5일 동안 정말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도진순(창원대) 교수님과 버스에서 번갈아가며 중국에 대한 지식을 해박하게 쏟아내던 모습(주로 서술어가 없이 문장을 건너뛰어서 듣는 내내 힘들었다는 일부 선생님의 의견과 현대 중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 좋았다는 일부 의견이 양분하고 있다, 또는 내내 졸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기도 하다)과, 동생 같은(실제로 형동생 하는 사이) 가이드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던 순박한 사장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여행지마다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여행 직후 멋진 사진을 바로 메일로 보내주는 센스와 함께,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고 중국에 대한 책을 다수 집필한 이력들은 단순히 이윤을 보기 위해 여행사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조창완님의 블로그를 살펴보면 엄청난 내공을 느낄 수 있다. http://blog.naver.com/chogaci,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직접 집필한 12권의 중국 관련 책이 일간지에 소개되고 있다) 나중에 승덕 호텔 뒤풀이 자리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번 여행의 이윤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충격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존경심이 일기도 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9시 40분. 짐을 먼저 부치고 탑승 수속을 마치고 다시 기다림으로 이어졌다. 면세점이 즐비하지만 무언가를 사기엔 이르다는 생각으로 그냥 비행기 탑승을 기다렸다.
<열하일기> 첫 시작인 ‘도강록’ 부분에서 연암이 수석통역관인 홍명복에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도(길)’는 바로 저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의 물시울 짬(사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고미숙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변이형’이라 말한 ‘매 순간 삶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진리’의 도(道)!
‘길(도)’을 찾는 여행자로서 알듯 모를 듯 그 뜻이 희미하게 다가오지만, 지금 시대의 ‘경계’에 선 나는 ‘물시울의 짬’에서 사람이 흐르고, 인종과 국가가 역동적으로 흐르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경계는 구분이 아닌 만남과 교류와 화합의 도가니였음을.
그렇게 베이징 행 비행기에 올랐다.

 


2.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을 보다

수레를 몰아 정양문을 나서서 유리창을 지나면서 몇 칸이나 되냐고 물었더니 누가 대답하기를, 도합 27만 칸은 된다고 했다. 대체로 정양문에서 선무문까지 가로 겹쳐 다섯 동리가 다 유리창이라고 하여 천하의 재화와 보물은 여기 다 몰려 쌓였다는 곳이다.
나는 어느 다락집에 올라가 난간을 기대고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 여한이 없을 것이거든!”
(열하일기 上 ‘관내정사’ 중 412쪽 -보리출판사-)

 

이번 여행의 목적은 연암처럼 호기심 가지고, 기록하기였다. 그의 학식과 안목, 글솜씨, 유머, 철학, 세계관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 <열하일기>에서 보여주었던 호기심과 사교성, 철저한 기록자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따라잡고 싶었다. 여행준비물 1호로 준비한 수첩을 들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렇게 4박 5일을 연암처럼 고스란히 담아보리라 결의했건만, 지금 생각해 보건대 ‘호기심, 사교성, 기록, 주량’에 모두에 걸쳐 절대적인 ‘범인(凡人)’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드디어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규모가 인천공항보다 큰지 비행기에 내려 모노레일열차를 타고 한참 만에 짐을 찾고 입국 수속하는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공항을 나서니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몸집이 자그마하면서 강단진 인상을 가진 조선족이었다. 이름은 ‘정현자’. 연길 연변대학을 나와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 베이징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버스에 올라타고 이동을 하자마자 가이드로서 역할을 잊지 않고 중국에 대한 상식을 쏟아낸다. 가이드만의 패턴화된(?) 연변식 사투리에 간결하고 다부진 말투.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또박또박 전해지는 말소리가 천상 교사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먼지가 많고 메마른 기후로 인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심의 가로수를 호위 삼아 베이징의 중심부로 이동하였다. 앞좌석이나 중간 통로 앞의 좌석은 보험에서 제외되기에 가급적이면 앉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960만㎢의 광활한 땅에 14억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이 많은 나라 중국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도심의 모습을 살폈다. 암탉의 모양에 비유한 중국 땅에서 흑룡강, 길림성, 요녕성, 내몽고 자치구, 신강 위구르 자치구, 티벳 자치구, 복건성, 광동성, 홍콩, 대만을 머릿속으로 찾아보지만 매캐한 매연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지고 만다.

장기판과 같은 도시 베이징. 2008년 올림픽을 정점으로 과포화 상태에 이른 비대한 도시의 중심부로 달려가 점심을 먹었다. 비행기에서 늦은 아침을 든든히 먹었기에 점심에 대한 생각이 그다지 간절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만나는 현지식이라 기대가 컸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기자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예의 그 원형의 탁자에 예전(2006년 1월 장가계 여행)에 비해 그다지 진하지 않은 향을 가진 중국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행용 고추장을 준비했지만, 첫 식사부터 꺼내든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중국 특유의 향이 많이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올림픽 이후로 음식도 세계화가 되어 가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이제 중국음식에 적응한 것 같다’는 소소한 기쁨이 밀려왔다. 물론 이런 작은 기쁨은 다음날 아침부터 무안하게 잊혀지고 말았지만.

점심을 먹고 왕부정 거리를 지나, 류리창 거리로 향했다. 강수량이 적은 베이징의 시목(市木)이측백이라는 것과 16,400㎢에 1920만 명이 사는 거대 도시라는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마음은 류리창 거리로 내달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청나라 건륭제 당시 27만칸이나 되는 세계의 보물창고, 류리창! 연암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던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 청나라 초기 상업이 날로 번창하여(가이드 말에 따르면 봉급이 따로 없던 내시들이 하사품 또는 몰래 훔친 궁궐의 물품을 팔아 더욱 번창했다고 한다) 쓸쓸했던 성문 밖 유리공장 일대가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 골동품, 탁본한 글자와 그림, 문방사우 등을 중개 판매하는 특색있는 상점거리가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상인·관리·학자·서생 등이 끊이지 않는 문화의 거리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연암에 앞서 홍대용이나 박제가 등이 다녀가며 이곳에서 우정의 네트워크를 싹틔웠다고 했던 그곳이다.

 

<류리창 거리>

몇 분 주어지지 않은 시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류리창에 대한 첫인상은 ‘초라함’이었다. 옛 명성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은 차치하고라도 낡고 먼지가 앉은 고루함은 물론 중국 시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업화된 가게들은 실망스러움보다 어딘지 모를 슬픈 느낌이 앞섰다. 또한 여기서 파는 물품의 101%가 가짜라는데, 그렇기 때문에 신비함보다는 상술이 더 눈에 띄어 호기심은 계속 줄어들 뿐이었다. 독특한 향에 이끌리어 들어간 티벳 관련 상점에서는 쭈뼛거리는 중국말을 몇 마디 더듬다 나오고 말았다. 연암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필담을 나누었을 텐데. 어찌해서 나는 ‘두어 샤우첸(얼마에요?)’이라는 말만 입가에 맴도는지. 그렇게 터벅터벅 걷다 만난 어느 가게 앞의 여치 소리만(작은 새장 속에 울고 있었다)이 그 옛날의 흥성스러움을 홀로 전하는 듯 했다.

점점 뜨거워지는 베이징의 햇빛을 피해 다시 차에 올랐다. 다음 일정은 베이징의 중심 천안문과 정양문 아래(남쪽) 대책란 시장. 중국말로 ‘다자란’시장. 명나라에 형성되어 청나라에 번성을 누린 옛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시장. 대다수의 점포가 명청(明淸) 시기 이후의 전통적 지명과 저잣거리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천안문이 가까워 혹시라도 천안문을 둘러볼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무척 넉넉하게 주었다. 차가 다니지 않아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았지만(간혹 전철이 다니지만 여행객을 위한 전시운행이었다) 베이징의 뜨거운 태양은 걸음을 무척 더디게 했다. 시장 입구에는 스타벅스 등 서구화된 상점들이 많았고,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베이징 카오야(오리) 요리로 유명한 ‘전취덕’이라는 가게 입구도 지나쳤다. 시장 내부로 들어서면 현대화된 중국 상점들이 많았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천 원 샵’같은 ‘10위엔(元) 점포’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문구류, 장난감, 의류, 신발, 사탕 및 과자류 등을 진열하고 손님을 끌고 있었다. 극장도 있었고, 청심환 상점과 차를 파는 가게들도 꽤 규모가 있어 보였다. <열하일기>를 살펴보면 조선 청심환은 믿을만하다 하여 연암과 약간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청심환을 요구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 청심환이 어떻게 대접받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사실 청심환 가게보다는 아들을 위해 선물을 사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일곱 살 난 아들이 중국 여행을 포기하면서(‘고행’모임을 시작하면서 모임마다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중국 여행을 함께 하자고 꼬드겼다. 하지만 유례없는 폭염에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우리 부부는 8월 초에는 아들의 중국 여행을 다양한 설득 작업을 통해 포기시켰다) 조건으로 내 건 중국 팬더곰을 어디서든 꼭 사야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들른 10위엔 점포에서 중국 의상을 입은 팬더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점원은 30위엔을 불렀다. 중국에서 흥정은 무조건 반값부터 부르라 하기에 15위엔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성질이 급한 남편은 다른 가게에서 살 수 있을 거라 하면서 재촉을 했다. 사실 여행 초반이기에 급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굳이 흥정을 오래 끌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재촉하는 남편 앞에 점원이 더 다급해져 결국은 20위엔으로 흥정을 끝냈다.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푸른 색 중국 의상을 입은 팬더곰을 들고 나섰다.

대책란 시장에서 목표는 달성했으니 새로운 도전 의욕이 솟구쳤다. 그다지 멀지 않다는 천안문 광장으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우리 부부만 남게 되었고 홀가분하게 정양문을 지나 지하도를 건너 모택동 주석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는 모택동 기념관 앞에 다다랐다. 불행히도 오전에만 개관하기에 내부를 둘러볼 수 없었다. 그리고 오른 쪽 모퉁이를 돌아 천안문 광장을 찾아 나섰다. 특별히 이곳이 천안문 광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찾아 나섰지만 삼엄한 경비를 보고 분명 천안문으로 가는 길목임을 직감했다. 정양문 지나 지하도를 건너면서 가지고 있는 소지품들을 마치 공항에서처럼 카메라 투시하는 것이나, 천안문 길목에서 중국의 인민경찰 공안이 라이터 하나까지도 꼼꼼하게 수색하는 것을 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이 ‘가장 열린’ 광장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국말로 텐안먼. 중앙에는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으로는 모주석 기념당, 정양문(正陽門)(전문, 前門)이 설치되었고, 광장의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전국인민대표대회 의사당), 동쪽에는 중국국가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천안문 북쪽으로는 자금성과 맞닿아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광장은 그야말로 열기의 도가니였다. 이렇게 더운데도 외국인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았고, 곳곳에서 사진 찍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중국의 중심이라고 할만한 그곳에는 그저 여름의 태양만이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1989년 그 열기는 사그러들고 물리적인 더위만이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그네들은,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찍는 걸까? 과거, 현재, 아니면 미래?
그곳에서 김수현 선생님과 윤민광 선생님을 만났고, 김수현 샘이 생수를 사주셨다. 약간 비릿했지만 시원함은 정말 최고였다.(김수현 선생님, 고마워요~)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대책란 시장 입구에서 일생을 만났다. 

 

<천안문 광장, 엄청 더웠다>

 

그리고 다시 이동.
다음 여정은 왕부정 거리! 중국말로 ‘왕푸징(王府井)’은 일찍이 명나라 시대, 여기에 왕부(왕족 저택)의 우물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외국인 유치를 위해 전략적으로 거리를 조성했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명동과 흡사하다고 했다. 왕부정 거리는 대책란 시장보다 더 활기에 넘쳤다. 류리창이 중국의 과거를, 대책란이 현재를 나타낸다면 왕부정 거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익숙한 삼성이나 롯데백화점도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왕부정 서점’이 있었다.

왕부정 거리를 탐색하기에 앞서 중국의 서구 문명의 시작점인 천주교 성당을 먼저 들렀다. 중세 고딕풍의 아름다운 건물 외양보다 시원한 그늘 아래 쉬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베이징에는 여기 왕부정에 있는 동당을 비롯해 자금성을 중심으로 북, 서, 남쪽에 모두 네 개의 성당이 명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연암도 이 성당을 보고 야소교에 대한 생각을 펼쳐 나간다. 교당 앞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웨딩포토가 한참이었고, 우리도 웨딩포토를 찍는 것처럼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정면이 아닌 측면에 난 문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미사를 지켜보았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성당에서 다시 왕부정 거리에 들어섰다.
쇼핑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에 들러보기로 했다. 왕부정 서점은 7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 층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디든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이 우리나라 서점의 풍경과 다를 바 없어서 정겹기도 했다. 특히 외국소설 진열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수십 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혹시나 우리나라 소설이나 작품이 진열되어 있을까봐 여러 차례 돌아봤지만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1층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이 잘 보이는 곳에 진열돼 있었다고 한다.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서점은 매 층마다 주제가 다른 책들로 채워져 있었고, 7층에서는 가전제품이나 문방구를 팔고 있었다. 책갈피와 중국 학생들이 사용하는 공책 몇 권을 사들고 서점을 나섰다. 나중에 범혜영 선생에게 서점에서 ‘I'Q84 책을 봤다고 했더니 충격을 먹은 얼굴로 ‘언니가 이럴 줄 몰랐어요’한다. 선배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지금에서야 고백한다. 범 선생, 난 하이타니 겐지로나 에토 모리, 시모무라 고진 책은 좀 읽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오. 하하.^^*

 

집결 시간보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 그 유명하다는 꼬치의 거리를 찾아보았다. ‘올림푸스’라는 거대한 간판이 걸린 건물 뒤에 빽빽하게 상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흥성스러운 점원들의 사람 끄는 소리,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독특한 향은 진짜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안내받은 대로 그곳에는 사탕, 과일, 개구리, 오징어, 양고기, 전갈, 불가사리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꼬치들이 즐비하였다. 자그마한 전갈들이 꿈틀거리며 열댓 마리 엮여 있는 꼬치를 보며 군침이 아닌 마른침이 삼켜졌다. 역시 큰 나라는 먹는 것도 스케일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 꼬치의 거리를 나와 어떤 건물 계단참에 앉아 일행을 기다리는데, 몹시 역한 냄새가 나 주위를 둘러보니 작고 네모난 어떤 것을 꿴 꼬치를 맛있게 먹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냄새. 냄새를 피해 일행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장님께 그 작고 네모난 꼬치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발효한 두부를 튀긴 꼬치라 한다. 우리나라 청국장이나 삭힌 홍어와 비슷하다는 이야긴데, 아무리 바꿔 생각해도 도저히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독특한 향’으로 기억되는 나라 중국이다.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드디어 고미숙 선생님이 계신 2팀과 합류한다. 그 동안 베이징을 함께 주유했던 우리 1팀은 나를 포함한 광주 선생님 12명을 더하여 총 28명이다. 거기에 1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고미숙 선생님을 포함한 31명의 참가자가 더해져 59명이 4박 5일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사실 패키지라는 것이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서 함께 여행하는 것이지만, 썩 마음에 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여행 전에 참가자가 60명 가량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대로 공부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소중한 만남이고 인연인지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유쾌하게 보냈다. 그리고 ‘여행’은 ‘구경’이 아닌 ‘만남’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여행 중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된 분들의 이야기는 빠트리지 않고 이 글에 남길 예정이다.
일단 점심시간에 함께 자리에 앉게 된 수원에서 온 용감한 삼형제. 경래, 홍래, 성래. 중학교 2학년부터 초4까지 2년 터울로 여느 삼 형제라면 시끌벅적 다투기에 바쁘지만 의젓하고 점잖다. 놀라운 점은 부모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 사장님 사모님과 친분이 있어 여행에 참여한 것이라지만 아들 셋을 외국으로 보낸 부모님이나, 부모님 없이 비행기 타고 떠나온 아이들이나 참 놀랍고 대단해 보였다. 삼 형제는 가는 곳마다 귀엽고 과감한 쇼핑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렇게 쇼핑한 고깔 모자를 셋이 쓰고 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워낙에 이동 거리가 많은 탓에 이튿날 약간의 탈진 상태를 보인 나에게 초콜릿을 건네 준 경래, 홍래, 성래야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고미숙 선생님을 비롯한 2팀과의 합류로 저녁시간에는 더욱 활기가 넘쳤다. 안타깝게도 2팀은 비행기가 연착되어 류리창 등 예정했던 여행지를 다 들러 보지 못해 조금은 지쳐 보였다. 10명 기준의 원형탁자이기에 우리 부부는 대부분 다른 분들과 합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 저녁도 그렇게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영욱군, 선정?양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 영욱 군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번 여행도 배움의 과정이라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일종의 기사로 싣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여행에 대해 자세히 질문하고 대답하며, 음식을 먼저 먹어보고 건네기도 하며 식사를 마쳤다. 대학을 가지 않고 군대를 다녀왔으며 수유너머 공간에서 진짜 배움을 일궈가는 영욱 군과 배움의 도반 선정 양! 그들의 젊음과 도전, 배움의 자세가 부럽고 감탄스러웠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다 보니, 함께 여행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흥분으로 4일의 여정이 기다려졌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이동했다. 베이징이 아닌 열하(승덕)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려영이라는 옛 조선족들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했다. 피곤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은(상하이에 비해) 거리를 차창으로 흘려보내며 하루 여행을 정리하고 있는 중 가이드에 이어 사장님이 일어나 말문을 여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1시간가량의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 앞서 밝혔지만 어투는 분명 경청을 이끌어내기에 힘들었지만, 내용은 무척 신선했다. 10년 이상 중국에 체류하며 얻은 삶의 지식과 공부의 흔적이 잘 녹아들어 있었다. 시작은 중국에 남아 있는 조선인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사군에서 신라방, 고려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언어도 동화돼 버려 흔적도 없지만 성씨만 남아있는 요녕성 ‘박씨 마을’ 이야기, 중국에는 없지만 조선에 남아 있는 중국 성씨 ‘명씨’ 이야기. 

그리고 1850년 청나라 말기, 조선의 대기근으로 시작된 조선인 이주의 역사. 특히 경술국치 이후 조선인 이주는 급격한 물살을 타고 단동, 간도, 연길, 용정, 도문, 흑룡강 등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중국 속에 남아 삶을 이어가던 당시 조선인의 영향력은 광동성 광주 꼬뮌에서 희생된 조선인이 150이라는 사실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아리랑의 김산과 양세봉, 이운광, 이충렬 등 이름 모를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해방 후 귀향이냐 정착이냐를 두고 고민할 때 조선 출신 주덕해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최초의 조선족중학교가 건립되고, 연변조선족 자치주를 성립하고, 연변대학, 연변가무단으로 교육과 문화의 기틀을 다져지기까지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역사가 차근차근 정리되었다. 하지만 현재 자치주에는 조선족들이 상하이나 베이징으로 흩어져 40%도 남지 않아 자치주 유지도 힘들어지고 있다 하였다. 이렇게 한사군, 신라방, 고려영, 조선족 자치구로 이어지는 중국 속 조선인 이야기에서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살고 있는 100만 명 이상의 한국인, 이른 바 ‘신선족’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리고 현재 중국과의 외교관계까지 보충해 주신다. 현재 한국의 중국 수출 비중은 해외수출 전체 27%로 미국의 3배, 일본의 6배가량 된다고 한다. 그런데 5년 후에는 50%가 넘을 거라고 하며 점점 커지는 한국의 대중의존도에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특히나 위기에 취약한 한국이 아니던가? 병자호란 때는 5일 만에, 임진왜란 때는 15일 만에 수도가 함락된 역사가 있는 한국은 현재 대중외교에서 아무런 실리를 취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천안함 사태로 인해 더욱 더 막혀만 가고…….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은 사장님의 이야기는 고려영온천호텔에 차가 정차하면서 막을 내렸다.

9시 넘어 도착한 고려영은 어둠이 아니라 해도 조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중국의 평범한 작은 마을이었다. 호텔은 구석구석 낡고 부실한 흔적이 많았다. 첫날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호텔 안에 있는 주점에 모여 5위엔 짜리 연경맥주를 마셨다. 모임 회원이 아니어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윤민광, 문수미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일행 중 도진순 교수님, 사장님과 몇 분이 술을 마시고 계셨고, 사장님이 오셔서 닭발이며 맥주, 배갈을 보충해 주셨다. 거기서 배갈, 맥주 폭탄주를 맛있게 먹는 법도 배웠지만, 도저히 닭발만은 도전할 수 없었다.
1시 넘어서야 남은 닭발과 배갈을 챙겨 다음 일정을 위해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호텔은 낡고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지만, 잠은 푹 잘 수 있었다.

 

 

3. 2010, 고북구를 나서며

산을 따라서 성을 쌓았는데, 깍아지른 듯한 골짝은 깊은 계곡은 아가리를 벌린 듯이 둘러 꺼져서 흐르는 물이 부딪쳐 뚫고 본즉 성을 쌓을 수도 없어 이런 데는 정장(亭鄣)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홍무 연간에 수어천호를 두어 오중관을 지키게 하였다. 내가 무령산을 돌아서 배로 광형하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 나갈 때는 밤이 벌써 삼경이나 되었다. 겹으로 된 관문을 아놔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는 높이를 재어 보니 여남은 길은 되었다. 필연을 끱어 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벽을 어루만지며,
“건륭 45년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
(열하일기 中 ‘산장잡기’ 중 446쪽 -보리출판사-)

 

8월 13일 금요일.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8시 정도에 길을 나선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열하 기행 시작이다. 장성 밖,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에 계곡이 많고, 지세가 험해서 거의 무박 4일의 강행군을 해야했던 사신단의 고달픈 여정이 <열하일기> ‘막북행정록’(여기서 ‘막(漠)’이란 사막을 뜻하고, ‘막북’은 사막의 북쪽을 일컫는다)에 실감나게 펼쳐진다. 오죽하면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며 ‘일야구도하기’같은 명문장을 남겼을까?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 밀운에서 승덕(열하)까지 3~4시간 정도로 단축되어 차로 시원하게 달린다. 창대까지 버리고 가야 했던 연암의 처지를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지만, 베이징과 사뭇 달라진 풍경에 더 눈길이 간다. 베이징에 없던 푸른 산들이 나타나고, 산이 있기에 물도 많다. 그래서 밀운(미윈)에는 댐이 있어, 베이징 시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한다고 한다.

차 안에서는 풍성한 배움의 향연이 펼쳐졌다. 창원대에서 현대사학을 가르치고 계신 백범 연구의 권위자이신 도진순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으신 것이다. MBC ‘느낌표! -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되기도 했던 <백범일지>를 주해하여 돌베개 출판사에서 책을 펴내신 한국 현대 사학의 거목이 우리 여행에 동행하신 것이다. 이번 여행이 연암의 <열하일기>와 고미숙 선생님으로 인해 씨실과 날실로 엮이었다면, 도진순 교수님으로 인해 틈새를 촘촘하게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창완 사장님은 물론. 여행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옌산 산맥을 따라 중국 대륙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별을 보며 이동했던 유목민족의 실크로드부터, 고분에 새겨진 별의 이야기와 하늘을 보러간다는 의미의 명나라 조공 사신의 ‘조천’이 청나라에서는 ‘연행’으로 바뀐 사정으로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또한 연암이 천체에 대해 지식이 매우 과학적이었음도 하늘을 많이 바라다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씀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초원에서는 경치가 훌륭하지 않아 오히려 하늘을 보며 명상하기 좋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다음으로 베이징이 왜 수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리, 역사학적으로 풀어주셨다. ‘서안’이 서역과 문화교류의 중심이었다면, ‘북경’은 농경사회와 북방유목사회를 조율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유에서 선택된 수도였다는 것. 우리가 목적지로 삼은 ‘열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황제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한 휴식처이지만, 장성 밖 오랑캐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안보와 고급 외교 정치의 숨은 수도라는 것도 설명해 주셨다.

창밖으로 장성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장성 이야기로 넘어갔다. 진.한나라부터 시작해서 명나라까지 증개축이 이어져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오랑캐를 막고자 세웠기 때문에 오랑캐가 다스린 왕조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한족 왕조 집권 시(당나라 제외)에만 증축이 이뤄졌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 때에 장성 보수에 대한 건의가 있었지만, 과거의 어떤 정권도 장성 밖 외적에게 위협받아 멸망한 적은 없다며, 명나라 오삼계를 예로 들며 내부의 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장성개축 의견을 물리친다. 대신 장성 밖 열하를 여름 피서지로 삼아 평소에는 사냥터로, 안보와 외교의 요충지로 이용한다. 그렇게 다져진 국방의 힘으로 강희 61년, 옹정13년, 건륭60년 동안 청나라 문화의 화려한 꽃을 피운다.

도 교수님의 강의가 무르익을 무렵 10시 정도에 고북구 터널을 지나쳤다. 연암은 낮은 산줄기를 올라 한밤중에 고북구를 지났지만, 우리 일행은 오전에 장성 아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연암집>을 엮은 김택영이 ‘오천 년 이래 조선 최고의 명문’이라고 찬탄한 ‘야출고북구기’를 탄생시킨 곳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터널로 지나야 한다니 너무 아쉽기만 했다. 터널을 지나 고북구 기념비에서 잠시 연암의 자취를 찾았다. 고미숙 선생님의 짧은 강연이 있었고,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사실 ‘야출고북구기’가 명문장이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지만, 짧은 안목에 어떻게 감히 평을 할 수 있을까? 다만 삼경에 지나가며, 피로와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형세와 고북구에 얽히 역사적 사실을 더듬고, 또 그 아래 쓸쓸히 버려진 전쟁의 원혼들을 떠올린 연암의 감성과 체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술로 먹을 가는 낭만까지도.

 

다시 차에 올라, 금산령을 향해 달렸다. 금산령 장성에 11시 못 되어 도착했다. 대개 만리장성을 보려 팔달령을 많이 찾는다지만, 너무 상업화, 현대화 되어서 장성이 지닌 맛을 제대로 맛 볼 수 없다 한다. 그래서 옛 자취가 많이 남아있는 금산령을 찾았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높은 산등성이에 물결치듯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 10여분 줄을 선 후 유리창이 깨지고 뭔가 엉성한 케이블카를 15분 정도 타고 능선에 도달했다. 케이블카에 내려서도 5분여를 걸어서야 장성에 도달했다. 한국 관광객은 우리 일행뿐이고, 내국인 관광객과 외국인들이 간혹 보였다.


성벽은 웅장하며, 견고했고, 아름다웠다. 급하게 경사진 계단을 올라 장성에서 굽어본 중국 대륙은 말 그대로 광활했다. 장성 위에도 길이 있어 5~6사람은 손을 잡고 지나가도 될 만큼 폭이 넓었다. 실제 이동이 용이해 말 다섯 마리, 사람 10명이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첫 번째 돈대부터 보수가 안 돼 허물어진 돈대까지 열심히 걷고 사진기를 눌러댔다. 누군가 장성을 누비는 트레킹도 괜찮겠다고 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곳곳이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간혹 귀퉁이 진 곳은 소변이나 대변으로 악취가 심하기도 했다. 장성 위에는 마을 주민들이 화보를 팔고 있었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장사를 할 의지가 그다지 없는지 사진을 찍어주며 연방 생글거린다. 분명 케이블카로 내려다본 작은 마을이 생활의 터전이리라.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며 이인호 선생님과 따님인 두루양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연극모임을 통해 범혜영 선생의 소개로 딸과 함께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모님도 선생님이고, 광주에 몇 번 강의를 나가신 적이 있다고 하여 다시 여쭤보니, 바로 박경이 선생님의 남편 되시는 분이었다. 작년 봄 ‘열정’과 ‘생각’, ‘긍정적 체념’으로 기억되는 멋진 강의를 해 주신 선생님이 떠올라 너무도 반가웠다. 따님과 티격태격 하는 모습이 무척 정겹고 따뜻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행에 가족들이 많다. 초등학교 6학년인 동제와 엔지니어이신 아버님, 고등학생 용원이와 한솔교육 팀장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되시는 정태헌 교수님 가족, 도진순 교수님도 대학생인 유승군, 사모님과 동행하셨다. 그리고 사장님의 조카분도 있고.


금산령 장성을 내려와 바로 아래 식당에서 음식을 먹었다. 많이 걸었더니 밥보다는 맥주가 더 반갑다. 식사 자리에서 경향신문 경제부 박병률 기자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바리스타 김이준수씨를 만난다. 남자 친구 둘이 하는 여행이라는데, 꽤 재미있는 조합이라 눈에 띄었다. 점심때는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이날 밤부터 삼 일 간 좋은 술동무가 되어 주었다. 옆자리에는 감격스럽게도 고미숙 선생님이 함께 자리했는데, 인사를 드리고 광주모임에 대해 말씀 드렸더니 많은 관심을 보여 주셨다. 작고 단아한 체구에 동영상에서 듣던 그 목소리 그대로 실제 모습을 접하고 보니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떨렸다. 더 적극적으로 묻고,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저녁 강의를 기다리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열하를 향해 달렸다. 차 안에서는 여행에 가져간 김탁환의 <열하광인>을 읽었다. 박진감이나 긴장감은 <방경각 살인사건>에 못 미쳤지만, <열하일기>를 중심으로 한 정조와 백탑파들의 애증(?)관계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집중해서 읽을 수 있을 만큼 재미도 있었다. 그래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주인공 이름이 ‘이명방’이라는 것. 특정 인물과 겹쳐지니 눈부신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가끔 거리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열하, 지금의 승덕(청더)에 2시 30분 정도에 도착했다. 바로 피서산장에 들렀다. 100위엔이 넘는 고가 입장료만큼 기대가 컸다. 입장 후 2팀 가이드가 전동차를 타고 돌거나 걸어서 가는 것 중에서 선택하라고 했다. 모두들 걷는 것을 택했지만, 그만큼 규모가 클 것 같아 긴장되기도 했다. 피서산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역시 한국인 관광객은 우리뿐이었지만, 중국인들도 휴가를 여기로 다들 몰려오는지 여기저기 중국말로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고 가이드 말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이 매년 4월에서 9월까지 묵었다는 곳이다. ‘열하(熱河)’라는 지명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물이 얼지 않아 생긴 것이라 한다. 황제가 이곳에 머물면서 나라 일을 볼 때 중신들이 따라왔으며, 각국 사신들도 이곳에서 황제를 알현했다. <열하일기> ‘태학유관록’에 보면 당시 세계의 모든 문물과 문화가 이곳에 집중되어 중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피서산장은 강희, 건륭제보다는 서태후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강희 황제의 친필 등이 여러 곳에 남아 있지만 화려한 칠보골동품이나 보석으로 만든 화분, 비단으로 만든 강아지 덮개 등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피서산장 주인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 했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던 피서산장이 건륭제 사후 70년(1860년) 만에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만드는 곳이 되었다고 하니, 시쳇말로 세월이 무상하다. 
워낙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황제가 집무를 보던 ‘담박경성전(擔迫敬誠殿)’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화려할 것 같은 위용이 지금 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나에게는 단출하기만 하다. 어찌 보면 ‘담박(번잡하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은 것)’으로 뜻을 밝히고, ‘경성(경건하고 성실한 마음)’한 강희제의 뜻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아닌지…….

피서산장 궁궐 한 편에는 도진순 교수님이 발견한 박지원, 유득공 기념비가 있다. 한국말로 씌어진 기념비가 어찌나 반갑고 감동스러웠던지, 기념사진을 찍으며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그 기념비에는 박지원과 유득공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 있을 뿐이었는데도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피서산장은 ‘궁전구, 수원구, 평원구, 산구’로 나뉜다는데 궁전구를 벗어나 평원구, 수원구를 걸어 ‘열하발원지’를 찾아 나섰다. 황제의 사냥터였다는 말처럼 호수를 끼고 있는 평지는 정말 넓었다. 궁전구를 나서며 우리 식으로 밑이 트인 ‘풍차바지’를 입은 두 살 배기 아이도 보았다.(정말 시원해 보였다, 그리고 중국 곳곳에서 밑이 트인 바지를 입은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호수 근처에서 철사를 몸에 감고 손님을 모으고 있는 차력사는 <열하일기> ‘환희기’를 떠올리게 했다. 굉장히 흥미 있게 읽은 부분인데 당시 사대부들은 눈을 현혹시키는 요술을 금기시했다는데 연암은 당시 열하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요술 세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정말 신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마지막에 ‘요술쟁이가 군중을 속인 것이 아니라 군중이 스스로를 속인 것’이라며 명철한 통찰력으로 결론을 맺으며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비껴나가는 센스까지 보여준다.

 

<피서산장에서 만난 차력사 아저씨>

 

호수에 달그림자가 비치는 <사고전서>를 소장한 문진각을 지나 ‘열하 발원지’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또 저혈당 증세가 있어 용감한 삼형제에게 초콜릿을 부탁했다. 정말 그때만큼은 용감한 삼형제가 지구를 구하는 독수리 오형제보다 고맙고 든든했다.
열하발원지는 정말 ‘담박’했다. 그래도 열하 발원지라는 비석 앞에 섰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열하’라는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직접 보았다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이 소박한 뿌듯함. 역시 나는 평범한 여행객에 지나지 않는다. 부부 및 단체 인증샷을 찍고 피서산장의 기행을 마감했다.

 

저녁식사는 만주식 교자연이라 한다. 교자는 중국식 ‘만두’라고 하는데, 그래서 오늘 저녁식사에는 바로 ‘교자’가 주인공이었다. 저녁 식사에서는 CBS 김영태 기자와 따님인 송원중 소정이를 만날 수 있었다. 소정이가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하니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북경특파원이셨던 황의봉 기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연극모임 성원기 선생님과 사모님 최지영? 선생님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자의 향연. 연달아 나오는 네 가지 교자에 서로 순위를 매기며 맛을 품평하였다. 대개는 세 번째 나온 새우 살이 섞인 교자를 으뜸으로 생각했고, 네 번째 나온 교자를 가장 낮게 품평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 번째 교자는 어떤 동물인지 모르지만 간이라고 했다. 의외였던 것은 ‘동파육’이었다. 첫 번째 중국 여행지였던 상하이에서 맛을 보았던 기름지고 짠 그 동파육이 아니었다. 간도 적당하고, 입맛을 돋우는 양념이 버무려져 여러 차례 젓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닭 비슷한 조류를 요리한 것이려니 했는데, 동파육이었다고 하니 더욱 그 맛이 놀라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4성급 승덕 호텔! 낡고 어딘가 부실했던 고려영의 기억을 되살리며 조금 더 깨끗하고 편리해진 숙박시설에 만족하며 여장을 풀고 고미숙 선생님의 강의를 기다렸다.  호텔에서 10여 분 걸어 길 건너편 건물 5층에서 강의를 들었다. 여러 모로 기억에 남는 강의였지만 엘리베이터 안 담배연기와 세미나실 바로 옆 당구대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강의가 목적이 아닌 유흥과 오락의 장소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니 더욱 더 흥분되었다. 냉방기가 잘 돌지 않아 빽빽하게 앉은 자리는 조금 후텁지근했다. 

8시 10분경에 강의가 시작되었다. 우리 모임은 주로 셋째 줄에 앉아 청강하였다. 선생님의 강의는 연암과 열하라는 공간의 만남이 매우 운명적이었다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열하일기>같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힘들고 고단한 여정에서 공무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프리랜서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점과 강한 체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특히나 강희, 옹정을 이어 세계 문화의 정점에 이른 건륭제의 만수절(70세 생일)에 연행을 하게 된 것도 크나큰 행운이자 절묘한 타이밍이었다는 것도 덧붙이신다. 건륭제의 만수절은 현재 엑스포처럼 ‘세기의 빅 이벤트’였던 것! 당시 연경폐인이었던 박제가를 포함한 백탑파 중 가장 늦게 중국을 방문하지만 열하라는 공간과 건륭제의 만수절 시간과 만나면서 <열하일기>라는 역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거기에 무박 나흘을 견디고 열하에 들어서면서도 낮에는 온갖 이벤트에 참여하고, 밤에는 곡정과 같은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는 체력이 있었기에 그의 천재성이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호곡장론’이나 산해관에서 정진사와 나눠 쓴 ‘호질’만으로도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었지만, ‘열하’라는 시공간이 더해지면서 <열하일기>는 당시 조선의 모든 사유를 초월하는 고전이 될 수 있었다 한다. 특히 판첸라마 접견이 가져온 소동은 조선 역사의 장이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미 홍대용 등으로부터 연경을 찾는 것은 ‘친구’를 만나고 지성을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한다. 이른 바 ‘우정의 네트워크!’ 현재는 과거 몇 년보다 월등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 왜 과거처럼 삶에 대한 절박한 질문도 없고, 지성의 자유도 없는가를 따져 볼 때, 우리의 지성이 고양되지 않은 것은 바로 ‘우정’이 빠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신다. 교과서에서 배운 연암은 ‘이용후생’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하지만 그 뒤에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이용후생 정덕’이다. 이용후생 후에 정덕을 베풀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덕을 베풀어 정신적 자유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다. 현재는 ‘경세치용’의 정다산에게 밀려 연암의 ‘정덕’에 대한 뜻이 많이 바랬지만 연암이 보여준 행보는 ‘정덕’을 찾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한다. 멀리 경남 안의현감으로 재직 시에도 고추장을 담글 수 있고 밥도 할 줄 아는 권위의식을 버린 소통의 달인이었다는 것! 이렇게 백탑파에서 이어진 우정의 네트워크는 무형의 정신적 자산으로 능동적으로 삶의 자유를 넓혀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 위에 사람들을 어떻게 엮느냐가 중요하고, 핏줄이라는 가족 공동체를 벗어나 배움의 공동체를 접속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신다. 그렇기에 단순한 사교술이 아닌 앎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지식을 통해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 점에서 박지원의 앎과 글은 하나였고, 자신이 쌓아올린 언어의 지도를 따라 글을 경지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에 우문을 던졌다. 도대체 연암이 묵었던 태학은 어디 있는 것이며, 연암이 만난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사교적인 사람들인가 아니면 당시 세계의 중심인 청나라 사람답게 열린 사람이기 때문인가, 그리고 창대를 버리고 간 행동이나 여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기록은 봉건적인 태도 때문만은 아닌가 하는 그런 유치한 질문 말이다. 다른 분들의 질문이 많이 없었기에 차분하게 답변하시기도 하고, 우문에는 열정을 담아 길게 풀어주시기도 했다.
특히 연암의 태도가 봉건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른 바 봉건이라 이름 붙인 전근대를 함부로 비판하면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은 잊을 수 없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물질문명 우선의 근대 우월적 시선으로 전근대를 가치 폄훼하며 재단하지 않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끝으로 범혜영 선생의 질문에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태평성대’라는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시골 구석까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야말로 그 어떤 정치보다 훌륭하다고 한다. 그 말씀에 백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미숙 선생님 서명을 받다!>

 

강의를 마치고 호텔로 이동하면서 강연의 열기가 쉽게 식지 않아 다시 호텔 로비에 있는 카페에 모였다. 이번에는 박병률 기자와 바리스타 준수 씨, 사장님과 2팀 가이드도 함께다. 특히 2팀 가이드님이 치킨에 양, 오징어, 조기 꼬치 등으로 안주를 보충해 주었기에 이야기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새롭게 마주한 사람들과 격의 없는 자리라 모두가 들떴다. 배갈에 맥주를 섞은 폭탄주가 수십 차례 돌고 지엽적 또는 전체적으로 이야기도 술도 끝이 없이 이어졌다. 마침 한국에서는 기아와 롯데가 주말 3연전을 치르고 있었고, 박 기자와 준수 씨가 롯데 갈매기라는 사실에 우리 광주 호랑이들은 야구 이야기를 나누며 열을 올렸다. 그리고 사장님의 회사 운영 이야기, 2팀 가이드가 사는 이야기 등등. 사실 이야기 한 것이 그다지 기억나지 않지만 숙소로 돌아와 그날 먹은 것을 힘들게 게워냈단 것만 생생하다. 특히 다음 날 김선희 선생의 술로 인한 체력 저하는 여행 내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4. 초원의 별

“세 개 큰 쭝방울이란 무엇이며, 또 한 개 작은 별이란 말은 무슨 말씀인지요?”
“공중에 뜬 쭝방울 셋이란 것은 해와 땅과 달입니다. 지금 이에 대해 논하는 자의 말에 따르면 별은 해보다 크고, 해는 땅보다 크고, 땅은 달보다 크다고 했는데, 이 말을 믿는다면 저 하늘에 가득 차 있는 별들은 우리 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이 세 개 둥근 물체는 저마끔 이웃이 되어 땅을 본위로 하여 해와 달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해로 陽을 삼고, 달로 陰을 삼아 비하자면 살림하는 사람이 동쪽 이웃에서 불을 구하고 서쪽 이웃에서 물을 구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열하일기 中 ‘곡정필담’ 중 364~5쪽 -보리출판사-)

 

8월 14일, 셋째 날이 밝았다. 피서지였다고 하지만 뜨거운 햇살이 호텔 창문을 넘나들며 숙취에 곤한 새벽 창문을 달군다. 일정을 위해 겨우 몸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어제 쏟아낸 음식물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호텔에서 아침 식사가 마지막 날 아침에도 반복된다고 하니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고려영보다는 낫지만, 접시에 남아있는 물기며 얼룩, 원탁 위에 돌아가던 중국의 여느 음식과 별반 차이 없는 호텔 조식은 결국 여행용 고추장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부담스러운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서니 8시 30분이다. 출발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진 이유는 열하에 있는 소포탈라궁(보타종승지묘)을 관람하기 때문이다.

<열하일기>를 읽기 전까지는 라마교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에 가까웠다. 간혹 중국 무술 영화에서 노란 옷을 입은 스님이 빗자루 같은 것을 머리 가운데에 끼우고 등장하며 온갖 사술로 주인공을 괴롭히는 장면만 보아왔기 때문에, 정식 불교가 아닌 이단 불교가 아닐까 하는 막연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가져왔다. <열하일기>에서는 ‘황교문답’, ‘반선시말’, ‘찰십륜포’에서 아주 자세하게 라마교와 소포탈라궁, 그리고 판첸라마를 기록하고 있다. 연암의 입장도 황교가 허황한 사교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글을 이어나가지만, 반대자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열하일기>를 읽는 독자들을 위해 아주 세밀하게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타종승지묘는 피서산장 북쪽에 위치하며,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67년에 어머니인 황태후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웠다 한다. 전체적으로 티벳의 포탈라궁 형식을 따르고 있어, 소포탈라궁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몽고어, 티벳어, 만주어, 한어로 쓰인 거대한 비석을 모신 전각을 통과해 성벽처럼 겹겹이 두른 문들을 몇 개 지나니 땀이 조르르 흐른다. 2팀 가이드가 호기롭게 일행 전체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린다. 나도 포도맛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좀 더 새로워진 마음으로 둘러본다. 조금 오르다 보니 왼쪽 전각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무량수불을 모신 곳이라 했다. 세계 최대 불상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엄청난 규모의 불상을 예상했으나, 성인 남자 두 배(?)에 불과한 크기가 자못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무조건 크기에만 집착한 내가 어리석었다. 무량수불(아미타불) 모습의 불상으로는 세계 최대라 한다.

 

<보타종승지묘에서>

 
주요 건축물인 다홍타이는 사각형으로 된 검붉은 색의 건물이다. 다홍타이는 빨간 외벽에 작은 창문이 여러 개 나 있고, 중앙에는 불상을 5개 새겨놓았다. 창문은 맹창이라 하여 실제 창문구실은 하지 않는다 했다. 다홍타이는 전체 3층으로 되어 있고, 남쪽에는 효심이 지극한 건륭제가 80세를 맞은 어머니를 위해 80개의 불상을 탑처럼 모셔 놓았다. 매 층마다 유리 너머로 불상을 세어 보았는데, 80개가 훨씬 넘어 보였다. 동, 서, 북 세 면은 불상, 탱화, 티벳의 모습 등을 전시관처럼 꾸며 놓았다. 전시관보다 눈길을 끈 것은 다홍타이 중심에 세워진 완파구이이전[万法归彧?]이었다. 이 전각은 주요 종교 행사 때에 사용했다 하는데, 기와가 모두 금으로 도금되어, 높이 올라갈수록 화려하게 빛났다. 이른 바 다홍타이 옥상에 오르니 멀리 남성의 성기를 닮은 거대한 봉추봉이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더워 오래 있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판첸라마가 거주한 ‘수미복수지묘’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암일기>에는 이곳을 ‘찰십륜포’라 했고, 판첸라마를 ‘반선 액덕이니’라 칭했다. 여기서 연암은 5대 판첸라마를 직접 접견한다. 어찌나 자세히 묘사했는지, 글을 읽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향기 나는 수건(달라이 라마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을 받아 반선을 접견한다. 그리고 황제에게 하듯이 머리를 조아리라 하는데, 어떻게든 어물쩍 넘어가보려는 사신단의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그 와중에도 청나라 군기대신의 황급한 얼굴빛까지 아주 세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그리고 반선에게 불상까지 하사받는데, 또 이 흉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좀 과장하자면 개그콘서트 한 꼭지를 보는 듯 했다. 

 

<수미복수지묘에서>

 

‘수미복수지묘’에 들어서니 오색의 천들을 만국기처럼 머리 위에 매달아 놓아 무척 아름다웠다. 건물 구조는 보타종승지묘와 비슷했는데, 중앙 건물은 더 화려했다. 이 사원은 원래부터가 판첸라마를 위해 지었다고 하니, 이 정도는 돼야 선물이라 부를 수 있다며 일행 모두가 감탄하였다. 지붕 용마루에 네 각도마다 두 마리 씩 황금 용들을 올려 모두 8마리의 용이 지붕에 날아갈 듯 앉아 있었다. 구룡은 황제를 상징하고, 팔룡은 거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티벳이나 몽고 등 여러 소수민족을 다스리기 위한 문화적 제스처라고 볼 수 있겠으나, 황제조차도 판첸라마 앞에서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추는 것을 보면 진정한 종교의 안식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미복수지묘를 나와 점심을 먹으러 10여 분 가량 이동했다. 교자를 먹었던 식당처럼 방 하나에 탁자 하나 씩 있는 곳이었는데 점심때라 무척 분주해 보였다. 이날 점심에는 주로 아이들과 함께 했는데, 떠들썩한 분위기가 좋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교 2학년짜리 남자 아이의 재치와 엉뚱함에 많이 웃기도 했다. 우리가 광주에서 왔다고 하니 자신이 광주민중항쟁 영령의 현신이라고 하질 않나, 참 맹랑하면서 밝고 구김이 없었다. 소정이도 함께 있고 해서 송원중에 쓰이는 교재는 무엇이나 어떤 수행평가를 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경기 지역은 서술형 문제 때문에 교사는 물론 학생, 학부모까지 골치라는 하소연도 들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쳐 가는데, 김선희 선생이 도착했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관람을 못 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점심 먹으러 가는 차를 놓친 것이다. 아, 그날 김 선생는 하루 종일 쓰린 배와 머리 때문에 그렇게 고통 속에 보냈다 한다. 남편도 점심이 돼서야 속이 풀린다 하고, 하루 종일 건강하게 뛰어 다닌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어쨌든 김 선생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식당은 1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인데 화장실이 적었다. 그리고 중국 특유의 그 개방된 공간! 이제 긴 이동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 때문에 출발이 늦춰졌다.
그렇게 몽고 초원을 찾기 위한 5시간 이상의 차량 이동이 시작되었다. 여기 승덕이 하북성에서도 거의 북쪽인데, 네이멍구자치구까지 5시간 걸린다고 하니 중국의 거대함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달리는 차 안에서는 도 교수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밥을 먹은 직후라 식곤증이 몰려 왔으나 듣고 메모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예전에 몽고에 다녀오신 경험이 있어서 역사와 문화를 넘나들며 초원을 설명하신다. 초원이 나타나는 징후로 해바라기, 말, 자작나무가 있다고 하시며, 몽고나 빠오는 중국식의 낮춰부르는 말이므로 ‘몽골리아(몽골)’나 ‘게르’라 불러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흉노에게 시집간 한나라 궁녀 왕소군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해 주신다. 돈을 받고 그림을 조작한 모연수도 나오고, ‘미인’의 기준도 말씀해 주신다. 기러기가 떨어지고(낙안), 연못의 물고기가 잠기고(침어), 달이 수줍어 하고, 꽃이 부끄러워야 미인이라 하신다. 또한 이태백이 남긴 왕소군에 대한 시(소군원)와 그 유명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한자성어도 풀이해 주신다.
또한 왕소군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유목민족의 가장 큰 특징인 ‘형사취수(兄死娶嫂)혼’에 대해서도 길게 설명해 주신다. 우리나라 고구려 역사에도 남아있는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유목민만의 독특한 결혼풍습이다. 미개한 문화인 것 같으나 가임기의 여성을 다시 결혼시켜 자녀를 많이 두어 인구증가를 유도하는 매우 지혜로운 삶의 관습이라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 과거 유목민족이었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 강조하신다.

길이 좁아 차는 심하게 덜컹거렸고, 차량 통행이 많아 앞지르기를 하는 차들이 곡예운전을 한다. 중앙선 구분은 아예 사라지고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빌 뿐이다. 그럼에도 창밖으로는 계곡이 펼쳐지기도 하고, 해바라기 밭이 곳곳마다 화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드디어 초원이 나타나려는가?

그렇게 자다 깨다 4시 40분 경 내몽고 자치구와 하북성 경계 관문에 이르렀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휴게소를 합쳐 놓은 것처럼 여러 개의 차량 통행 관문이 있고 화장실과 가게들이 있었다. 좁은 차안에서 흔들리며 3시간 이상을 꼼짝도 하지 못했던 터라 바깥 공기를 마시러 차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맨살에 부딪치는 차가운 공기! 서늘한 가을 날씨일 것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겉옷을 덧입고 주변을 돌아본다. 여러 가지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관광지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라 인상적이었다.

다시 차는 거대한 규모의 삼림지구로 들어섰다. 이 삼림지구가 있기에 베이징에 불어오는 황사를 상당량 막아 주고 있다고 사장님이 설명해 주신다. 아마 이곳이 불타버리면 중국 수도를 이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기에 모두들 웃는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가며 빽빽하게 들어선 낙엽송, 그리고 사이에 점점이 박혀 있는 들꽃이 보라색 별처럼 반짝인다. 차량 통행이 많아 아주 천천히 이동하기 때문에 마치 휴양림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규모가 커서 그런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산중이라 해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서늘한 석양녘 풍경이 이채롭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밖으로는 바람개비 같은 풍력발전소도 보인다.

구불구불 산길에서도 도 교수님의 강의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월량호와 관련한 가수 등려군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낮에는 대등(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에는 소등(등려군)이 지배한다는 말을 낳게 했던 중국 출신의 여가수. 영화 ‘첨밀밀’ 주제가로 익숙한 이 여가수는 중국은 물론 미국, 일본까지도 사랑한 큰 별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15년 전 타계했다고 한다. 그녀가 부른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은 ‘월량(달님)은 내 마음을 알고 있어요’라는 뜻으로 월량호를 떠오르게 한다 하셨다. 한 소절 불러주셨는데, 아예 전체를 다 듣고 싶다고 청하니 가사를 끝까지 모르신다며 사양하신다. 그래서 승덕 현지 가이드의 목소리로 곡 전체를 들을 수 있었다. 소박하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그렇게 굽이굽이 휘어진 길이 끝나고, 시간이 늦어 월량호는 내일 보기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6시 정도에 숙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이 온 몸을 감싼다. 호텔은 본관과 식당, 작은 별채가 수십 동이 있고, 그리고 빠오처럼 보이는 원형 건물이 역시 수십 동이 있었다. 그 빠오는 원형 시멘트 위에 모자를 씌운 것처럼 엉성해 보였다. 모두 다 빠오에서 잘 수 없어 빠오에서 잘 사람들을 모았다. 우리 부부는 고민했다. ‘게르’는커녕 결코 ‘빠오’라고도 부르기에 민망한 곳에서 자느냐, 아니면 그냥 편하게 호텔에서 잘까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마음을 고쳐먹고 빠오 열쇠를 받아들었다.

 

<이른바 몽고 빠오>

 

빠오를 열어보니 작은 창 1개에 침대 두 개에 화장실, TV 등이 갖춰져 있다. 내부는 거의 호텔처럼 꾸며져 있는데, 화장실 하수구에서 악취가 심하고, 분명 실내이건만 외부와 비슷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온수기에 전원을 넣어야 하는데, 그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절대 나오지 않는 따뜻한 물만 하염없이 기다리다 목욕은커녕 세수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온수기 전원을 발견하고 얼마나 억울하던지!) 그날 밤 추위를 느끼며 온 몸을 오므리고 잔 것이 바로 진정한 빠오 체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여간 정말 정말 추웠다.

저녁 식사에는 양고기 만찬이 있었다. 알자여행 홈페이지에서 본대로 마치 가죽을 벗긴 것처럼 요리가 나올 줄 알았으나 그냥 평범하게 세 접시 나오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아쉬운 점은 전날 과음으로 인해 속이 뒤집혀 몇 점 집어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향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정말 아쉽다. 우리 탁자에는 양머리까지 나왔는데 다른 탁자에는 나오지 않은 것이라 한다. 양머리를 대접받은 사람은 좋게 말해서 손님 중 우두머리이거나, 우스개 소리로 식사비를 모두 치를 사람이란다. 어쨌든 먹지는 못했지만 양머리로 인해 더 화기애애해졌다. 몽고식 배갈도 한 순배 씩 돌리고 박 기자는 양머리와 진한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한다는 양고기 머리>

 

저녁 만찬이 끝나고 밖에 나오니 별이 하나둘 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집이 담양이라 별을 많이 보아 왔지만, 오늘처럼 맑고 투명할뿐더러 밝게 반짝이는 별들은 처음이었다. 하늘의 별을 보니 곡정과 필담으로 천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생각이 났다. 하늘에서 겨우 북두칠성 정도밖에 찾지 못하는 나는 그저 아름답다고 감탄할 뿐이지 연암처럼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은 절대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별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고원의 찬 바람은 옷깃을 꽁꽁 여미게 했다. 모 항공사의 담요를 걸치고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걸어다니는 박 모 기자와 장 모 선생님이 많이 부러웠다.

8시경 호텔 마당에서 몽골풍의 민속 공연이 시작되었다. 우리 일행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자리라 술과 음식을 먹으며 관람하는 중국인들 사이에 서서 옹색하게 구경했다. 전통 의상을 차려 입은 모습은 무척 화려했다. 전통보다는 훨씬 현대화된 춤과 노래가 이어지며 흥을 돋우었다. 그 중에 마두금을 타는 공연이 가장 인상 깊었다. 넓은 초원이 느껴진다고 할까 아련하면서 확 터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는 캠프파이어가 있었는데 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흥겨움의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중국인들이 저렇게 잘 노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너무 즐거워했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연극 모임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신나게 몸을 풀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어느 정도 지켜보다 숙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숙소가 너무 추워서 컵라면이라도 먹을까 해서 남편이 물을 채우러 식당에 갔는데 우리 일행이 술을 마시면서 한 잔 하자 했다 한다. 전날 과음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밤의 술자리도 여행의 일부라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내상을 입은 우리 광주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일행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로 양꼬치가 안주였고 맥주와 몽고식 배갈이 그득했다. 고미숙 선생님과 일행, 중국어를 가르치는 임선명 선생님, 이인호 선생님과 합석하여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미숙 선생님과 함께 한 수유너머 식구들은 여행 중 매일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중 한 대목을 지정하여 암송회를 갖고 있었다. 그날도 ‘상기’ 부분을 외우고 이 자리에 왔다 하신다. 암송회를 꼭 보고 싶다 하였으나, 그날도 다음날도 술자리에 심취하느라 모두 놓쳐 버리고 말았다. 자리를 바꿔가며 이인호 선생님, 그리고 임선명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11시 넘어서야 자리에 일어났다.


숙소로 돌아와서 이불을 덮으니 술을 좀 더 마실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술로라도 추위를 극복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행 사흘 째 밤을 보냈다.

 

 

5. 다시 열하에서 우정을 나누다

연암은 이르노라. 나는 곡정과 가장 많이 이야기를 하였는바, 엿새 동안을 창을 대하여 밤을 밝혀 가면서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아주 허리띠를 끌러 놓고 무탈하게 마주 대할 수가 있었다. 그는 본디 두드러진 선비요, 걸출한 인물이라 그렇게도 이야기가 가로세로 엎치고 뒤치고 걷잡을 수 없었다.
(열하일기 中 ‘곡정필담’ 중 440쪽 -보리출판사-)

 

추위에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잠을 잔건지, 꿈을 꾼 건지, 눈을 뜨니 피곤이 밀려온다. 이른 시간인데 그렇다고 잠이 오지도 않는다. <열하광인>을 펼쳐들고 30분 정도 몰입하니 어느 정도 정신이 개운해졌다. 일어난 김에 찬물에 고양이 세수하고 긴 바지에 긴 팔 티셔츠, 겉옷 두 벌을 겹쳐 입고 호텔을 나섰다. 아침으로 빵과 쌀죽, 계란을 먹으며 몸에 온기를 전한다.

이제 말을 타기 위해 이동한다. 호텔이 있는 작은 마을을 벗어나니 곧바로 시원스럽게 초원이 펼쳐진다. 사장님 말대로 윈도우 첫 화면에 나오는 풍경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텔레토비들이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초원에는 곳곳에 들꽃이 피어 풍부한 초록빛을 돋우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부드러운 초록의 곡선으로 맞닿아 버스에서 내려 뛰어다니고 싶었다. 인공적인 것은 전봇대나 철책선 정도? 거칠 것이 없기에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고, 아득해졌다.

 

버스 안에서는 도진순 교수님이 강의를 시작하셨다. 넓게 펼쳐진 초원으로 몽고인들이 시력과 청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과 땅이 넓기 때문에 장자는 성장하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고 말자(막내)가 재산을 상속한다 하셨다. 이동하는 유목민족의 특성 때문에 옛 수도인 ‘카라코룸’을 찾기가 어려웠으며, 부족이 많아 지도자의 지도력에 따라 국토의 크기가 변화가 심했다고. 몽고인들은 아버지의 성이 1대 이상 전해지지 않아 인디언 부족처럼 성이 없는 특징을 살린 이름을 많이 지었다 한다. 우리나라에도 사다함, 죽죽과 같은 이름이 있었고, 왕건의 할아버지도 왕씨가 아닌 작제건이었음을 알려주신다. 이야기는 징기스칸으로 넘어간다. 징기스칸이 광활한 제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정보와 군사의 신속한 이동에 있었다며, 노마드가 각광받는 현대 세계와 비슷하다 지적하신다. 그렇게 강의를 듣다보니 어느새 목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예의 서늘한 바람이 먼저 맞이한다. 그 다음으로 비릿한 냄새가 반긴다. 1시간 정도 말을 타는데 비용이 50위엔이라 한다. 10여 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 말에 오를 수 있었다. 말 한 필마다 한 명 씩 견마잡이가 있는데, 나는 나이고 좀 들어보이는 아주머니가 함께 하게 되었다. 말에 오를 때 과연 내 키에 잘 오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견마잡이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순하게 길러진 말이라 천천히 움직이며 초원을 향해 나아갔다. 처음에는 말을 탄다는 기쁨에 천천히 걷는 것도 즐거웠지만, 시간이 흐르니 달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아주머니에게 달리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다. 그냥 조용히 말고삐를 쥐고 갈 뿐이었다. 언덕진 곳에 닿으니 한참을 쉰다. 사진도 촬영하고, 휴식도 취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저 멀리 나아간 듯한데, 도무지 우리 견마잡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손짓발짓으로 저기 끝까지 가고 싶다고 했는데,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고삐를 놓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도 역시 안 된단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일행 중 몇 명의 남자들은 고삐를 스스로 쥐고 뛰어가고 있었다. 정말 부러웠다.

어설프지만 견마잡이가 고삐를 쥐고 뛰기 시작했다. 다른 말들도 뛰는 것을 보니 일종의 체험 과정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말이 뛰니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린다. 혼자 뛰어보겠다는 생각이 저만치 달아난다. 그래도 말과 함께 뛰어가니 정말 좋다. 아쉽게도 승마 체험은 기다리는데 15분, 올라타고 왕복하는데 40~50분 정도로 끝나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월량호 관광을 빼고, 말을 더 탔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말에서 내리니 견마잡이가 돈을 달라는 몸짓을 한다. 남편과 의논하니, 팁을 달라고 하는 것인지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니 그냥 가서 가이드와 의논하자 한다. 견마잡이를 뒤로 하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니,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비용을 지불한 사람도 있고 우리처럼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견마잡이와 승강이가 벌어진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말에서 내려 바로 돈을 지불해야 한단다. 그리고 승마비용 50위엔에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면 10위엔을 더 내야 한다고도 했다. 다행히 남편과 나의 견마잡이가 와서 미안하다며 돈을 건네주었다. 웃으며 돌아가는 것을 보니 안심이다.

그렇게 짧고도 즐거운 승마체험을 마치고 호텔로 가는 길에 있는 시장에 들렀다. 여기서 어머님 선물을 살까 고민했으나 흥정에 대한 두려움과 막상 살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구경만 하기로 했다. 주로 견과류나 몽고식 배갈, 빠오를 축소시킨 열쇠고리나 가죽 술병 등이 많았다. 시장에 있는 화장실을 들렀는데, 문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볼 일을 보고 있어 깜짝 놀랐다. 다행히 문이 온전하게 붙어 있는 곳을 찾아 일을 볼 수 있었다.

차로 돌아와 보니 무엇을 샀는지 이야기가 한창이다. 김수현 선생님은 생각지도 않은 몽고식 배갈 4병을 구입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 몽고식 배갈을 1병만 사려고 흥정까지 잘 마쳤는데, 잔돈이 없어 20위엔 짜리 지폐를 내미니 주인이 배갈 4병 세트를 주며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았다 한다. 그렇게 해서 생긴 네 병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리 부부에게 그냥 두 병을 주신다. 처음에 거절했지만 기분 좋게 받아 들었다. 덕분에 우리 마을 나승렬 선생님께 한 병 드리고, 가지고 오는 도중 술이 새버린 한 병은 손님 올 때마다 한 잔 씩 권하고 있다. 견과류 등을 산 사람들은 모두에게 인심 좋게 돌렸고, 그냥 받기만 한 우리 부부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기만 했다.

점심은 다시 호텔로 돌아와 먹었다. 말을 타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감자볶음과 달걀 요리로 밥을 세 공기나 비웠다. 밥을 먹고 월량호로 이동했다. 달을 닮았다 해서 ‘월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고원지대에 있는 호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한다. 이름처럼 고즈넉하고 조용한 풍경을 예상했는데, 각종 레저시설들이 호수 주변에 즐비하다. 사람들도 많아 관광지에 온 듯 하였다. 풍선다트, 총쏘기, 활쏘기, 오토바이, 양이나 말이 끄는 수레 타기 체험, 수상보트도 보인다. 남편과 나는 호수 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려 정말 빠오처럼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절도 구경하고, 들꽃도 꺾어 보았다. 그리고 김수현 선생님과 윤민광 선생님을 만나 함께 걸었다. 약간 경사진 곳에 위치한 8개 정도의 빠오에는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몇 겹의 천막 속에 빼꼼히 비쳐지는 내부의 모습은 고단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려는 삶의 흔적으로 가득하였다. 마을을 벗어나 조금 더 위로 올라가니 월량호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사진 몇 컷을 찍고 버스로 향했다. 다시 보시 못할 초원을 뒤로 하고 삼림지대에 들어선다. 그렇게 바람, 들꽃, 초원으로 기억되는 곳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면서 차를 달렸다.

 

<월량호에서>

 

이제부터 다시 열하로 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차 안에서 <열하광인>을 다 읽었다. 잠이 오지 않아 이것저것을 기록하고 있으니 4일 동안 옆자리에 동행한 한솔교육 조은희 선생님이 말을 걸어 오셨다. 교사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라며 어떻게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등등을 물어 오셨다. 광주국어교사모임 이야기를 하며 요즘 교사들도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한다는 말씀을 해드리니, 아이가 몇 살인지를 물어보시고, 주소를 적어 달라 하신다. 출판사에서 일하는데 유치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몇 권 보내주시겠단다. 생각이 너무 고마워서 거절하지 못하고, 적어드렸다. 우리도 우리 지역 특산물을 보내드리겠다며 주소를 물으니 명함을 주신다. 파주에 회사가 있다고 하시는데, 파주출판단지에 놀러가고 싶다고 하니 언제든지 찾아오라신다. 보타종승지묘에서는 홍삼캔디를, 초원에서는 견과류를 권하시고, 다시 차 안에서 고마운 마음을 전해주시니, 이 여행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해 본다. 조은희 선생님 옆자리에 앉은 수줍고도 발랄한 용원이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개학하기 하루 전, 택배가 왔다. 조은희 선생님이 보낸 책들이다. <구름빵>, <떼쟁이 쳇>, <사시사철 우리 놀이 우리 문화>와 키재기 책 등 너무도 고맙다. 그리고 정겨운 마음이 듬뿍 담긴 엽서까지. 그간 개학하고 여기 저기 정신없이 다니느라 전화도 못 드렸다. 우리 마을에서 유명한 된장과 간장, 그리고 우리가 집필한 <상황 독서 프로그램>과 용원이를 위한 책을 함께 보낼 예정이다. 역시 이런 인연들이 여행의 묘미다.

저녁 6시가 다 되어 다시 열하에 도착했다. 피서산장 바로 옆 제법 큰 식당이다. 만한전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라니 기대가 되었다. 그 동안 맛보았던 음식과 다르게 종류도 많고 서비스도 다르다. 어떤 재료로 만든 음식인지 궁금해 하며 이것저것을 맛보았지만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모두가 해삼요리로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사슴고기였다는 것을 빼고는. 저녁을 마치고 밖을 나와 보니 식당 앞 연못에 작은 악어가 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나라다.

다시 승덕 호텔로 향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 그냥 잠들 수는 없었다. 9시 30분경에 그저께 마시던 호텔 로비 카페에서 보자 했다. 객실은 이틀 전과 다르게 배정되었는데 훨씬 깨끗하고 냉장고도 있었다. 기분 좋게 샤워하고 남은 시간 동안 TV를 시청했다. TV를 보니 오늘이 광복절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영어로 진행하는 방송에서 새롭게 단장한 광화문 앞에서 8․15 경축사를 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얼굴이 보였다. 여러 가지 외신이 이어지고는 며칠 전에 일어난 홍수 관련 소식 일색이다. 산이 무너졌는지 진흙 속에 매몰된 사람을 구출하는 모습과 건물 잔해가 어지럽게 화면을 채운다.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이번 홍수로 하늘로 먼저 가 버린 부인을 두고 구조작업을 진행하는 군인 아저씨 이야기와, 구사일생으로 아이를 구한 어머니 이야기가 뒤따른다. 재난 방송은 세계 어디나 동일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 재난 방송의 레퍼토리와 이렇게 닮아있다니!

로비에 내려가서 약간 기다리고 있으려니 박 기자와 준수 씨가 가장 먼저 도착한다. 그 뒤로 우리 광주 선생님들이 하나둘 씩 내려오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배갈도 준비했으나 입도 대지 못하고 맥주만 들이킨다. 안주가 빈약해서 호텔 근처에 있는 켄터키치킨에 가서 통닭을 사오기도 했다. 이날은 기아가 롯데를 이긴 날이라 더욱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었다. 야구 이야기에서 교육 이야기, 사는 이야기로 다양하게 이어졌다. 박 기자와 준수 씨는 가칭 <영화로 보는 경제 이야기>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모임도 곧 <소나기> 관련 책이 나올 거라  했다. 서로 꼭 사주자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옆자리에 계시던 도 교수님도 합석해서 교원평가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1시를 가리키고, 가게 주인이 문을 닫아야 한다고 눈치를 준다. 그냥 헤어지기에 아쉬워 우리 실에서 계속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박 기자와 준수 씨, 우리 부부, 김수현, 장수미, 정수희, 도 교수님까지 좁은 객실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라면과 소세지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2시에 도 교수님이 방으로 돌아가시고, 박 기자의 취재 비화가 이어졌다. 삼성에 대한 이야기, 국제신문에 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선원들 이야기를 기사로 쓴 것이며, 정형근 의원의 예의 그 묵주 사건 까지 국경과 시간을 넘나들며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 박 기자님과 사모님의 정말 영화같은 만남과 준수씨의 강렬하고 짧았던 첫사랑 이야기, 정수희 선생의 예전 군대간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까지 피곤한 줄 모르고 말하고 들었다.


곡정과 필담을 16시간이나 주고받던 연암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도 하룻밤 사이에 여러 모로 견고한 우정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은 아닌지, 지금 생각하면 여행 중 최고로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6. 환연도중록

밤에는 관에 머문 여러 역관들이 다들 내 방에 모여들어 조촐하게 술자리를 벌였는데 나는 여행 중에 온통 입맛을 잃었다. 여러 사람들이 내 자리 옆에 봉해 싸 둔 보따리 속에 무엇이나 들었나 하고 흘겨들 보기에 나는 곧 창대를 시켜 보따리를 풀어 샅샅이 뒤져 보게 했으나, 다른 물건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가지고 갔던 붓과 벼루뿐이고, 부품해 보이는 것은 죄다 필담했던 초기와 유람 일기였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궁금증을 풀고는, “아닌게 아니라 갈 적엔 아무런 행장이 없더니 돌아올 때 봇짐이 좀 크기에 이상타 했더니…….”했다. 장복이는 역시 서글프레해서는 창대를 보고, “특별 상금은 어디 있지?”하며,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열하일기 中 ‘환연도중록’ 중 132~133쪽 -보리출판사-)

8월 16일 월요일. 날이 밝았다. 이제 중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인 것이다.
식당에 가 보니 이미 떠났어야 할 2팀들이 보인다. 첫 날 비행기 연착으로 보지 못했던 류리창에 가기 위해 일찍 이동하기로 돼 있었는데, 식사가 늦어져 이제야 밥을 먹는단다. 이미 짐이 꾸려졌기 때문에 식사 후 바로 이동한다고 했다. 준수씨에게 가방을 찾았냐고 물어보니, 방에 있었다면서 멋쩍게 웃는다. 어젯밤에 이야기를 마치고 다들 돌아간 후에 씻고 자려는데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준수 씨가 가방을 찾았기에 물어본 말이다. 어쨌든 정말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준수 씨는 여행 며칠 후에 메일을 보내 안부를 전했다. 롯데의 가을 시리즈 직행을 뽐내며 블로그 소개와 함께 교육에 대한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보내 왔다. 유쾌하고 건강한 자유로운 영혼이다. 아직도 롯데 자이언츠 야구복에 쓰인 ‘내일 뭘 입고 가지?’라는 말이 생생하다. 박 기자는 여행 끝나고 이틀 뒤엔가 남부 지역 폭우 소식에 피해는 없는지를 묻는 자상한 문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진정 아름다운 콤비다.

 

식사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두 시간 겨우 눈을 붙인 터라 차에서는 잠만 잤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지만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베이징에 도착했다. 베이징의 코리아 타운이라 불리는 왕징에 들러 마지막 쇼핑을 했다. 양동 시장 같은 흥성스러운 분위기에 점포에 한글 이름이 많아 정겨운 느낌이 드는 시장이었다. 거기서 어머니를 위해 깨를 조금 샀다.

다음에는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했다. 중국 여행의 마지막이 그렇듯, 한국 음식점이었다.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용감한 삼형제 중 막내인 성래에게 중국 음식이 느끼하면 먹으라고 전해준 컵라면이 짐이 된 것 같아 미안했다. 미안하다, 성래야. 여행사에서 나눠 준 일정에는 중식이 사천식이라고 돼 있었단다. 어쨌든 된장찌개에 불고기 백반을 맛있게 먹었다. 식당에서 늦게 도착한 2팀과 다시 만났다. 많이 돌아다닌 탓인지 다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다음 일정은 공항 가는 길에 있는 798거리! 따산즈라고 불리는 데 예전 공장부지를 예술의 거리로 꾸며 놓았다 한다. 피곤하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거리 안에 들어서니 생각이 바뀌었다. 곳곳에 설치된 이색적인 조형물과 포스터, 그림 그리는 사람들, 월요일이라 문을 닫은 곳도 많았지만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다양한 갤러리 등. 그러면서도 한 켠에서는 공장이 돌아가기도 하고. 마치 이 거리 전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공장 내부를 그대로 살려 갤러리로 만든 곳이었는데, 핑크 돼지와 중국, 정장을 한 신사들과 알몸 여성을 그린 누드화가 인상적이었다. 갤러리 앞에는 열쇠고리 등을 파는 노점이 있었는데, 귀엽고 아기자기해서 7개 정도를 샀다. 나중에 혹시 베이징에 다시 오게 된다면 하루를 작정하고 다 돌아보고 싶었다. 오늘은 시간이 짧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3일을 더 베이징에 머무를 예정인 정수희, 범혜영, 장수미 선생님은 그날 저녁에 이곳을 다시 찾을 예정이란다.


<따산스 예술의 거리에서>

 

그렇게 789 예술의 거리 기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미리 공항에 도착해서 표를 끊은 대표님에게 비행기표와 여권을 돌려받고 짐을 부쳤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일행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떠남에도 바로 앞에 다가온 작별에 아쉬운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인사 나누기에 바쁘다.
인사를 나눈 후 모노레일을 타고 이동해 탑승수속을 마쳤다. 공항 면세점에서 산하 친구들에게 나눠줄 팬더곰 초콜릿을 사고, 잠시 기다린 후에 비행기에 올랐다. 4시 30분이었다. 이륙한 지 얼마 후 기내식을 먹고 ‘아마존의 눈물’을 시청하고 있을 때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5일 전 비행기보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쪽으로 향할수록 대기가 불안정한 것 같았다. 인천공항에 거의 도착할 무렵 한선희 선생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심하게 떨고 있었다. 도진순 교수님과 자리를 바꿔 윤민광 선생님과 함께 담요도 덮어주고, 어깨 등을 주물러 주었다. 승무원들이 가져다 준 뜨거운 물병과 소화제 덕분에 오한은 진정이 됐지만, 열이 많이 높았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모르게 인천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빠져 나와 검역하는 곳에서 한선희 선생이 높은 체열로 몇 가지 질문을 받고, 공항 지하에 있는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보니 시간은 7시 50분 경. 광주행 버스는 8시 20과 9시 20분에 있다 한다. 한 선생이 병원을 들러야 하기 때문에 느긋하게 9시 20분 차를 타기로 했다. 병원이 식사시간이라 진찰이 늦어졌지만, 결과는 좋았다. 다행히 편도가 부어 일시적으로 체온이 올랐다고 했다. 이렇게 저질 체력을 보여준 두 선희 선생님 덕분에 여행이 마지막 순간까지 특별할 수 있었다. 중국에 남은 세 명을 빼고, 일행은 8명, 그 중에서 김수현 선생님은 시댁에 가야하기 때문에 7명이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새벽 1시 경에 광주에 도착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연암의 보따리 속에는 벼루와 붓, 필담을 나눈 초본들로 가득했다 하는데, 나는 몽고식 배갈 두 병과 중국산 참깨 5kg, 팬더 초콜릿과 수첩 한 권, 그리고 사진기 속에 남은 여행의 기억들뿐이다. 건조하도 무더웠던 베이징 날씨와 사뭇 다른 연일 비에 젖은 고향 냄새를 맡으니 참 좋다. 여행 기간 동안 줄넘기 10개를 성공시킨 아들 보러 다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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