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_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스페인‧라틴아메리카_김현균 엮고 옮김_창비) 

요즘 ‘서진이네’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다. 우리에겐 꽤 낯선 멕시코의 바깔라르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관광지에서 한국 거리 음식을 파는 포맷으로 진행하고 있다. 관광지여서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무척이나 매력적인데, 특히 눈길을 끄는 장면들이 있다. 그건 바로 어느 가게, 거리에서나 느긋하게 잠을 자는 개들의 모습이다. 목줄도 없고, 낯선 이를 향해 짓지도 않고, 어떤 가게든 개의치 않고 주인인 양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눈을 감고 몇 시간이고 잠을 자고, 푹 잔 뒤에는 여유 있게 사라지는 개들의 모습에서 멕시코 사람들의 너그러운 성정과 문화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스페인어권,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작품들을 보면서 일견 끌리기도 하고, 때론 놀랍기도 해서 특별한 매력에 푹 빠졌던 것 같다. 

*한국의 정서와 닮은 듯한 작품  : <안녕, 꼬르데라!>
*하위층 젊은이의 열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담은, 그리고 냄새 부분에서 기생충을 떠올리게 하는 <영 산체스>
*그로테스크하게 잔인한 작품, 가족 간의 끔찍한 폭력을 다룬 <목 잘린 암탉>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생각나는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
*요즘 우리 주변의 대재앙 가뭄을 생각나게 하는 <비>
*진정한 복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 줘!>
*대박 ‘충격, 웃음, 반전’의 재미가 있는, 그리고 모든 정상적인 사고를 비트는 <전철수>
*진짜 진짜 단편, 그리고 서구 유럽의 우월주의를 통쾌하게 깨뜨린 <일식>
*아이히만을 떠올리게 하는 <검열관>
*신비스러우면서도 낭만적인 <두 마디 말>

그 외 작품들도 무엇이라 정리할 수 없었지만 행복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스페인과 남아메리카 문학의 첫만남이 참 설레고 행복했다.

-인상 깊은 구절-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안녕, 꼬르데라!>

(23) 할머니 암소가 떠나던 그날처럼, 오빠는 저 멀리로 갔어. 세상이 오빠를 데려가버렸어. 꼬르데라가 소고기가 되어 대식가들과 졸부들의 밥상에 오르기 위해 떠났듯이, 오빠의 영혼과 육신은 세상의 광기와 타인의 야망을 위한 포신이 되기 위해 떠난 거야.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

(47) 그는 가난한 여자에게 예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직업은 물론 심지어 성공적인 결혼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삶을 향상시킬 모든 가능성은 미모에 달려 있었다. 못생기고 가난한 여자는 가난하고 힘없는 남자에 비견되었다.

(64) 그의 동생은 식탁을 차르라 여념이 없었다. 빠꼬는 집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냄새는 하나였지만 냄새를 만들어내는 것들은 식별이 되었다. 음식냄새, 석탄냄새, 세재로 문질러 닦은 식탁냄새, 축축하게 젖은 걸레냄새…… 그를 기다리게 한 응접실에서는 오직 새것 냄새만 났었다. 새것 냄새와 값비싼 냄새는 적대적이었다. 오전에 방문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는 갑자기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고 값비싼 새것의 더러움.


오라시오 끼로가 <목 잘린 암탉>

(114) 외근까지도 베르따는 늘 자식들을 보살폈지만, 베르띠따가 태어난 뒤로는 나머지 아이들에 대해서 거의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녀는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잔혹한 짓을 저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름끼쳐 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치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불쾌한 언쟁을 벌인 순간부터 마치니와 베르따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람은 일단 칼을 뽑은 이상 상대방을 철저히 깔아뭉개는 데서 잔인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전에는 공동의 좌절이었기에 감정을 억제하였지만, 성한 자식을 갖는 데 성공한 지금은 각자 자신에게 그 공을 돌리며 상대방 탓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불구의 네 아이들에 대한 수치심을 한층 더 강하게 느꼈다.


알레호 까르뻰띠에르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

(135) 어느날 아침 음란서적을 읽다가 갑자기 마르시알은 나무 상자에서 잠자고 있는 밀랍병정들과 놀고 싶어졌다. 그는 책을 다시 세면기 밑에 감추고는 거미줄이 잔뜩 쳐진 서랍을 열었다.

(140) 배고픔, 갈증, 더위, 고통, 추위, 지각대상을 이러한 본질적 현실에 대한 것으로 축소하자마자, 마르시알은 이미 그에게 부차적이 되어버린 빛을 팽개쳤다. 자신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찝찔한 소금으로 세례가 철회되자 그는 이제 후각도, 청각도, 심지어 시각도 원치 않게 되었다. 그의 손은 기분좋은 형상을 어루만졌다. 그는 철저히 감각적이고 촉각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든 숨구멍을 통해 우주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는 단지 흐릿하고 거대한 형체들밖에 분간할 수 없는 눈을 감았고, 어둠 가득한, 뜨겁고 축축한, 죽어가는 몸뚱이 속으로 들어갔다. 죽은 몸뚱이의 물질에 싸였음을 느꼈을 때 그는 삶을 향해 미끄러졌다.


아르뚜로 우슬라르 삐에뜨리 <비>

(163) 사방에서 뿌리 냄새와 땅밑에 사는 지렁이 냄새, 싹이 튼 씨앗 냄새, 그리고 귀를 먹먹하게 하는 비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후안 룰포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221) “……난 이미 죗값을 치렀어요, 대령. 수도 없이 치렀다오. 당신들은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갔어요. 오만 가지 방법으로 날 응징했지요. 날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늘 마음 졸이며 흑사병 환자처럼 숨어서 사십년 세월을 보냈다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소, 대령. 적어도 하느님께 내 죄를 사하도록 해줘요. 날 ㅈ구이지 마요! 부하들에게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요!”
그는 마치 누가 자기를 두들겨패기라고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모자로 땅바닥을 내리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곧바로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자를 묶어놓고, 총에 맞을 때 아픔을 느끼지 않을 만큼 취하도록 술을 줘.”


후안 호세 아레올라 <전철수>

(227) 그런데 왜 당신은 꼭 T로 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거요? 기차에 올라탈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말이오. 일단 기차에 오르고 나면, 실제로 당신 인생의 행로가 정해지지 않겠소. 그 방향이 T가 아닌들 그게 무슨 대수겠소?

(229) 그 노선에는 협곡 위를 지나가야 하는 교량이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기관사는 후진하는 대신, 장광설로 승객들을 부추겨 계속 전진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그들에게서 이끌어냈지요. 그의 강력한 지휘 아래, 승객들은 기차를 조각조각 분해한 다음 어깨에 둘러메고 협곡 건너편으로 옮겼다오. 더욱 놀라운 것은 까마득한 협곡 아래에 거대한 강물이 일렁이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 영웅적인 행위의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워서 회사는 그런 부가적인 불편함에 과감히 맞서는 승객들에게 귀가 솔깃할 정도의 요금할인 혜택을 주기로 하고, 결정적으로 교량건설 계획을 폐기했소.

(233) “당신은 운이 좋은 줄 아쇼! 내일 당신이 말하는 그 유명한 역에 도착하게 될 거요. 그런데 역 이름이 뭐라고 했소?”
“X!” 여행객이 대답했다.


아우구스또 몬떼로소 <일식>

(238) 두 시간 후 바르똘로메 아라솔라 신부의 심장은 희생제단(일식상태의 태양에서 새어나온 흐릿한 빛 아래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위에서 격렬하게 피를 뿜고 있었다. 그사이 한 원주민이 전혀 목소리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날짜들을 끝없이 줄줄 읊고 있었다. 바로 일식과 월식이 일어날 날짜들이었다.


루이사 발렌수엘라 <검열관>

(257) 그의 부적격 판정 편지함은 곧 검열국 전체에서 가장 성과가 좋은 동시에 가장 치밀한 것이 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그가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려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찰나였다. 바로 그때 마리아나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당연히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그 편지에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또 당연히 그는 새벽녘에 총살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업무에 대한 헌신이 가져온 또 한명의 희생자였다.


이사벨 아옌데 <두 마디 말>

누구든 50센따보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녀는 우울함을 쫓아버릴 비밀스러운 말 한마디를 선물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선물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집단사기극에 해당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세상 어느 누구도 그런 용도로 그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자신만의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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