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책을 다 읽고 아주 아주 오랫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작년 박소형 선생님의 블로그에 들렀다가, 선생님의 극찬이 담긴 리뷰를 보고 일단 책부터 구입했다.
책꽂이에서 우선순위에 밀리다 5월 어느 날 시작한 독서!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과 사랑에 빠졌다.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삶 앞에 당당한 모모, 모모가 사랑한 죽음을 앞둔 유태인 로자 아줌마, 코란과 빅토르 위고의 책을 같은 반열에 올린 하밀 할아버지(나중에는 레미제라블만 들고 다니심), 가장 불완전한 신체(전직 복서 남성이면서도 여성이 되고자 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충만한 영혼을 가진 세네갈 롤라 아줌마, 그리고 의사 카츠 선생님(자신의 직무에 너무도 성실한)을 비롯하여 왈룸바씨 일행(로자 아줌마의 마지막 삶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음악과 삶의 생기를 불어넣어주려 애썼는가?) 등등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가장 따뜻했던 이웃들...

소설 속 10살 모모가 갑자기 14살이 되어버리는 말도 안 되는 전개가, 정말 말이 되고,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마법같은 이야기로 다가온다. 그래서 책 속에 흠뻑 빠졌다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이 책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뽀루뚜가 아저씨도 생각이 나고, 구례 어느 장례식장에서 이념 사상을 초월해 사람냄새 폴폴 나는 따뜻한 사람이야기로 흥겨웠던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떠오르게 하는 묘한 책이다. 아, 제제.. 그리고 모모... 로자 아줌마 그리고 빨치산 아버지! 

혐오와 조롱, 멸시와 갈등이 첨예한 세상에, 아무리 비참한 곳에서도 생은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 <자기 앞의 생>! 언젠가는 고전문학기행 모임에서도 꼭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

(12)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에 좋다는 박하차만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72) 무서워 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로자 아줌마)

(77) 나는 거의 매일 밤 암사자를 불러들였다. 암사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뛰어올라 우리 모두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96)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99)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103)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112)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메카에까지 다녀왔다.

(118)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120) 땅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죽는 연습을 해봤지만, 시멘트 바닥이 너무 차가워 병에 걸릴까봐 겁이 났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122) 하밀 할아버지는 항상 빅토르 위고의 책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그것을 코란으로 혼동하기도 했다.

(145) 인류의 적은 바로 남자의 성기이며 가장 훌륭한 의사는 예수인데, 그 이유는 그가 남자의 성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그의 경우는 예외라나. 로자 아줌마는 인생이 무척 아름다울 수 있지만 아직 아름다운 인생을 찾지 못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162) 그녀에게 "롤라 아줌마, 아줌마는 어느 누구와도 무엇과도 닮지 않았어요"라고 했더니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 대답했다. "그래 귀여운 모모야, 나는 꿈속의 사람이란다." ~"모모야 너도 크면 알게되겠지만, 아무 의미도 없으면서 존경받는 외부적인 표시가 있단다. 예를 들면 불알 같은 거 말이다. 그건 조물주의 실수로 만들어진 거란다."

(200) 음식을 먹으면서, 왈룸바 씨는 자기네 나라에서는 노인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일이 파리 같은 대도시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했다. 대도시에는 도로도 많고 층계나 구멍도 많고 노인을 잃어버리기 딱 좋은 장소들이 많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노인을 찾아달라고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었다. ~잔면 아프리카에서는 종족 단위로 모여 사는데 노인들이 인기가 많다고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인들이 죽어서도 종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68) 의사들을 즐겁게 해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271)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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