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프랑스 파리 여행 3[9.9~9.10]

여행 다섯 째날(9월 9일 월요일) 몽마르뜨, 에펠탑

몽생미셸에서 개선문까지 돌아오는 4시간 동안 차 안에서 정신없이 잤다. 개선문에서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간단히 씻기만 했는데도 새벽 3시가 되었다. 오후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아 둬, 오전 10시에 일어나 빨래를 돌리며, 어제 일을 정리하고, 가족과 통화도 하고, 이른 점심을 먹으며 느긋하게 보냈다. 

 

'몽마르뜨 투어' 예약 시간에 맞춰 1시 정도에 출발했다. 집결 장소인 라마르크-콜랭쿠르 역까지는 6.7km, 숙소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이젠 일상적인 풍경이 된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나 퐁피두센터 근처에서 자전거를 갈아탔다. 벨리브 시스템은 30분 이내까지만 무료라서.

그런데 여기부터 몽마르뜨까지는 자전거도로가 따로 있지 않아 도로의 마지막 차선, 즉 버스 차선을 같이 이용하도록 돼 있어 신경이 쓰였다. 공사하는 곳도 몇 곳 있고 이용자도 많아 다소 부산해 보였지만,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몽'마르뜨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법 긴 오르막길을 넘어 약속시간 20분 전에 라마르크(용불용설로 유명한 그 라마르크) 역에 도착했다. 보통 교차로에 있고 출입구 번호가 눈에 잘 띄는 우리나라 지하철역  입구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주택 사이에 지하철 역 입구가 있다. "해리 포터"를 읽으며 어떻게 9와 3/4 승강장을 떠올렸을까 작가의 상상력이 궁금했는데 문화적 토양이 있었던 것 같다.

 

건물 사이의 라마르크 역

 

몽마르뜨. 로마 때 '드니'라는 성인이 파리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들어오다 적발돼 참수됐는데, 자신의 머리를 들고 걸어오다 이곳에서 쓰러져 '순교자의 언덕(몽마르뜨)'이라는 뜻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예술적 기운이나 분위기가 크게 느껴질 것 같았는데 오는 길에서도, 역 주변에서도 그런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가이드 샘의 안내를 듣고 나서야 풍경에 히(든)스토리란 살이 붙어 비슷비슷해 보이는 골목이나 건물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이나보다.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과 서로 인사했다. 어제 몽생미셸을 함께 여행했던 가족과 반갑게 인사했다^^.

가이드 샘에게 19세기 파리 이야기를 들었다. 18세기 파리는 집에 화장실이 따로 없어 요강에다 배설한 뒤 창밖에다 그냥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부자들이 오물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산과 장화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 오물은 센강으로 흘렀고 그 물을 사람들은 다시 사용하고.

그래서 19세기 당시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나폴레옹 3세가 파리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했다고 한다. 도로를 넓히고 소방마차의 물이 닿을 수 있는 높이와 지붕 색의 제한, 골목의 모양까지. 그런데 이것은 생활의 편리함 뿐만 아니라 민중 봉기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골목이 방사형으로 돼 있어 군중의 위치가 다 파악되도록. 

 

오페라 가르니에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파리 시내 모습. 골목까지 시원하게 잘 보인다 싶었더니 '감시'라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19세기까지 몽마르뜨는 파리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불어 풍차와 제분소, 포도밭이 많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파리를 재개발하면서 기존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인 가난한 동네가 몽마르뜨였단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가난한 예술가들도 이곳 몽마르뜨에 모였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이곳을 파리로 편입하고 주류세를 면제해 주었는데 그래서 몽마르뜨에는 카바레(클럽)가 활성화되었고, 예술가들의 교류가 활발해 새로운 예술 경향들이 시도되었다고 한다. 피카소, 고흐, 르누아르 등은 당시에 유행했던 아카데미 화풍(그리스 로마신화를 그린)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살고있는 장소와 사람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첫 번째로 '라팽 아질(민첩한 토끼)'을 만났다. 이곳은 피카소, 위트릴로 등이 즐겨 찾던 카바레로 '토끼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라팽 아질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샹송 공연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밤 9시부터. 에디트 피아프도 여기에서 공연을 했다고 하는데, 아는 가수 이름이 나와 사진으로 남겼다. 길 건너 바로 옆에는 몽마르뜨의 포도농장이 지금도 운영되고 있어 예전의 모습을 알려준다.

 

사진 중앙 3층 창문에 '토끼 그림'이 보인다.
몽마르뜨 포도 농장

 

포도 농장을 지나면 '라 메종 로즈'가 나온다. 분홍색 레스토랑으로 눈에 금방 띈다.

여기서부터 가이드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인상파 화가들의 연인이었던 수잔 발라동’의 생가다. 어제 옹플뢰르에서 '에릭 사티'의 생가를 보고 와서인지 수잔 발라동의 집이라니 더 눈이 갔다. 여러 예술가들의 연인이자 모델이 되기도 했고, 스스로 화가로 등단하기도 했으며, 그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도 몽마르뜨를 대표하는 화가이기도 해서 몽마르뜨 투어의 시작점으로 딱 알맞은 곳이었다. 

 

왼쪽 분홍색 2층 건물이 '라 메종 로즈'. 지금도 레스토랑으로 활용되고 있다.
(왼쪽)  계단 난간이 시작되는 집이 '에릭 사티'의 생가다.  (오른쪽) 바로 여기!
몽마르뜨 주택가. 지대가 높아 건물 사이로 파리 시내가 잘 보인다.

 

'라 메종 로즈'에서 몽마르뜨 박물관, 에릭 사티의 생가글 지난 '사크레쾨르 성당'에 도착했다. 웅장한 성당 건물도 대단했지만 여기에서 보이는 파리 시내 풍경도 상당했다. 관광객들이 많았다.

 

19세기 나폴레옹 3세는  능력은 없으면서 나폴레옹 1세의 명예를 찾고 싶다며 이곳저곳 도발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철혈정책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선전 포고를 했고 전쟁에서 져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시민들은 무능한 정부를 물리치고 자치정부(파리코뮌)를 만들어 노동시간 규제, 무상교육을 실시하자며 혁명을 일으켰으나 정부군에 의해 다 사망하고 만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 사크레퀘르 성당이라고 한다. 아참, 혁명군이 실패한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나폴레옹 3세의 도시개혁정책으로 도로를 넓혀 바리케이드를 세울 공간을 없애고 도로의 각도를 45도로 해 놓아 도망가는 혁명군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나폴레옹의 가장 큰 치욕은 워털루 전투 패배도 아니고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것도 아니다. 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일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사크레쾨르 성당 정면. 왼쪽 작은 성당이 몽마르뜨의 유래와 관련된 '생 드니 성당'
사크레쾨르성당 앞에서 바라본 파리 시내 풍경

 

사크레쾨르 성당은 파리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트인 곳에 있다. 오른쪽 동상은 잔 다르고, 왼쪽 동상은 루이 9세로 세이트루이스라고 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부터 금장식으로 되어 있어 아름다웠다.

프랑스에서는 성당의 규모나 역할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고 한다. '샤뻴'-작은 교회, '에글리제'-교회, '까테드라'-대성당, '바실리카'-특별성당, 명예성당으로  사크레쾨르는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사크레쾨르 성당 내부

 

사크레쾨르 성당 옆 '테르트르 광장'에는 피카소, 위트릴로, 모디리아니 등이 활동했던 곳으로 지금도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고 관광객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테르트르 광장과 주변의 이모저모

 

테르트르 광장에서 몽마르뜨 골목길을 따라 '메종로드'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달리다 광장'을 만난다. 우리나라 아파트 사이의 공원처럼 보이는 곳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달리다(Dalida)'는 '빠로레 빠로레'로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가수다. 남자는 사랑을 속삭이지만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이라는데 지금까지 그 반대로 들었다^^ 가수 달리다는 쉰 중반의 나이로 이곳 몽마르뜨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림부터 음악, 가수, 소설까지 몽마르뜨는 곳곳에 예술가 스토리가 가득하다.

 

(왼쪽) 달리다 동상. 가슴 부분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고. 사람 사는 모습을 다 비슷한가 보다.

 

달리다 동상을 지나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 '벽을 뚫는 남자' 동상을 만났다. 마르셀 에메의 단편 소설' 벽을 뚫는 남자'의 주인공 동상이라고 한다. 갑자기 벽을 통과하는 능력이 생겼는데, 사랑을 하게 되면 벽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깜빡하고 의처증에 시달려 감금생활을 하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 능력을 잃고 벽 속에서 굳어간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동상의 모습은 벽에 갇혀 구해달라는 손짓일 것 같은데, 우리는 '하이 파이브'로 소통하려고 했다^^

 

 

몽마르뜨에는 풍차가 많았는데 지금은 두 곳 정도 남았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르누아르의 '갈레트 풍찻간의 무도회'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그림 속 상황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세탁선'이라 쓰인 건물이 보인다. 여기가 피카소의 작업실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세탁하는 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니고 집 모양이 세느강의 세탁선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하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던 곳을 재건축했다고 한다.

 

(왼쪽) 갈레트 풍찻간  (오른쪽) 피카소의 작업실 '세탁선'
(왼쪽) 사랑해 벽  (오른쪽) 아베스 역

 

내리막 길을 걸어내려오다 보면 '아베스 역' 근처 공원에 '사랑해 벽'을 만난다. 여행 오기 전 여러 자료에서 보았던 곳이다. 벽 앞에서 어색하게 아들과 서 있었는데 가이드 선생님이 하트 표시도 해 보게 하고 안아 보라고 권유해서 오랜만에 아들을 안아 보았다. 파리로 오기 전에 여정을 고민할 때, 물랑 루즈에 공연들을 보았다. 디너쇼가 있었는데 아들과 함께 들어올 수 없어 입구만 보았다. 

몽마르뜨 투어는 물랑루즈에서 끝났다. 저녁 시간이 돼 가이드 샘이 소개해 준 맛집을 찾았다. 프랑스의 테라스문화도 느낄 겸 가게 밖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거리를 구경했다. 국제도시답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음식은 쇠고기 요리와 수도원에서 만들었다는 레펠 맥주를 주문했다. 거의 육회에 날달걀 노른자가 데코레이션된 저녁식사가 나왔다. 그래도 맛있었다. 먹는 동안 살짝 비가 흩뿌렸는데 금방 그쳤다. 비올 날씨는 아닌데 이렇게 여행 동안 세 번 정도 아주 적은 비가 내렸다. 

 

벨리브 앱을 참고해 자전거 탈 곳을 찾아다녔다. 매번 느끼지만 이 순간만큼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복귀할 전화받을 곳을 찾아다니는 시온 저항세력이 된듯한 기분이다. 퇴근 시간 무렵이어서인지 세 번째 장소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저녁을 먹었지만 아직 날은 환해, 에펠탑 야경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산하 말에 따라 6킬로 정도 시냇길을 달렸다. 퇴근 시간이라 차도 많았지만 자전거도 많았다. 루브르 근처를 지나 에펠탑까지 왔다. 파리에 온 지 일주일이 돼 가니 이제 길이 그려진다.  에펠탑 다리를 건너 사이요궁 쪽으로 가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9시 정도 되니 반짝거리는 불빛공연도 5분정도 진행되었다.

숙소까지 세느강 둔치를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이 길은 파리에 도착한 첫째 날 저녁에 와본 길이기도 하다. 여전히 둔치에서는 조깅하는 사람들, 강변에 삼삼오오 모여 간식과 술을 마시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월요일이라 노점 맥주집에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도 월요일은 삶의 무게로 휴식을 취하나 보다.

 

(왼쪽) 에펠탑 바로 아래서  (오른쪽) 사이요궁에서 바라본 에펠탑

 

오늘 파리를 멀리까지 둘러보았다.

19세기의 모습을 21세기에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파리.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건물에 규격이 있고, 도로엔 전신주나 전선이 없고 에어컨 실외기도 함부로 설치하지 못하게 하며, 창밖으로 빨래를 널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더러운 건 참아도 아름답지 못한 건 참을 수 없다는 말까지 있나 보다.

그런 인식 속에서 에펠탑이 파리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에펠탑 덕에 19세기에 20세기가 겹쳐지게 된 것 같다. 한편 19세기를 가장 화려했던 시기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국제적으로 강대했던 그 시대를. 결국 나도 그것을 보러 왔으니.

 

여행 여섯 째날(9월 10일 화요일

숙소 바로 옆에 있어 날마다 보고 지나쳤지만 거의 거론하지 않은 곳이 있다. ‘오르세 미술관이다. 미리 '오르세 미술관 투어'를 예약해 두어서 9시 30분 미술관 앞 황소 동상 앞으로 갔다.

가이드 샘은 오르세 미술관 소개를 즐기시는 듯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몇십 년 전까지도 실제 역으로 활용됐던 곳이라고 한다. 증기기관차용으로 건립해 사용되다 더 이상 증기기관차가 사용되지 않고 기차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역의 철거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술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돔 형태로 되어 있는 역의 지붕을 살려 자연 채광이 좋은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오르세 미술관 앞. 집결 장소이기도 했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

 

가이드 샘은 오르세 미술관은 관련 있는 작품들끼리 큐레이팅 잘 돼 있다고 그걸 중심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1층부터 그랬다. 조각상이 전시돼 있는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 관은 당시 인정받지 못했던 작품들을 전시하고, 오른쪽 관은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작품을 전시했다고 한다. 먼저 오른쪽 관은 그리스 신화나 성서 등 이상향을 그린 아카데미 류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물감 가격이 엄청 비쌌기에 철저히 구매자의 의중을 반영하여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왼쪽 관의 작품들은 화가의 주체성에 기반한 자연주의’, ‘사실주의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시골 풍경이나 사람의 모습들. 밀레의 ‘이삭줍기’, ‘만종’, 신도 아니면서 옷을 벗은 모네의 올랭피아’, 일본의 그림 양식을 모방한 피리 부는 소년’, 크루베의 세상의 근원’(가이드 샘이 산하는 못 들어가게 해서 나만 들어가 보았는데, 나중에 산하의 기행문을 보니, 궁금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고 한다. 역시 막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같은 작품들. 큐레이팅이 흥미로웠다.

 

바로 5층으로 이동해 오르세 미술관의 상징, 시계탑 앞에서 역광을 이용해 인증숏을 찍은 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어제 몽마르뜨에서 듣고 만났던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 큐레이팅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왼쪽) 오르세미술관 시계탑 (오른쪽) 오르세미술관 발코니에서 바라본 몽마르뜨 방향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에 담긴 마네의 실험

르누아르의 나란히 전시된 '도시의 무도회'와 '시골의 무도회' 

르누아르의 작품들. 다들 마음으로만 담아두기에 아쉬에 열심히 사진으로 남긴다^^

 

모네의 작품들. 그중  아내 까미유가 죽자 얼굴을 흐릿하게 처리한 그림들과 아내를 떠나보내며 그린 그림들에 눈이 오래갔다.그래도 모네는 살아생전 돈과 명예로 인정받은 작가라 아픔은 덜했을 것 같다. 

세잔의 '사과 정물'에는 여러 시선에서 바라본 게 다 표현돼 있어,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담은 셈인데, 이 작품에 피카소가 영향을 받아 입체파로 이어졌다고 한다. 역시 피카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는 아니었다^^

 

그리고 고흐. 4개 국어가 가능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정형화된 것을 싫어해 홈스쿨을 했다고.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신학대를 다녔으나 라티어에 낙제를 했고, 전도사가 되려 했으나 그도 잘 안 될 때, 동생 테오의 편지를 받고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33살 죽을 때까지 1.7일당 한 편씩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열정을 다 했는데.. 죽은 후에야 인정을 받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고흐는 다음 날 여정에서 그 안타까움을 진하게 느꼈다.

 

 

루브르 박물관과 다르게, 오르세 미술관은 규모도 작고, 작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점심은 가이드 샘이 추천해 준 맛집을 찾았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숙소 주변 식당에서 먹었다. 거기도 사람이 많아 기다리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2시간을 밥 먹는데 보내야 하다니. 오죽하면 산하가 식사는 숙소에서 해결하자고 할 정도로.

 

여행을 계획하면서 오페라나 발레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여행 날짜가 공연과 잘 맞지 않았다. 산하는 황의조 경기도 보고 싶어 했는데 그 역시도 맞지 않았다. 일정표를 보니 오페라 공연도 축구도 9월 하순부터 일정이 있었다. 그런 아쉬움을 채우려 '오페라 가르니에'에 갔는데 생각보다 감동이 크지는 않았다. 이곳이 오페라의 유령배경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오는 길에는 숙소 가까이에 있어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던 튈르리 정원에서 콩코드 광장까지 걸었다. 몰랐는데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까지는 자전거로 두 번 다녀왔다.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와서 보니 프랑스는 햇볕을 즐기기 충분한 곳인데, 우리 숙소로 미루어볼 때 집이 좁거나, 규격화된 상태라 답답해 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 햇볕을 즐기며 책 읽는 사람들도. 그러보면 프랑스 사람들은 테라스 문화라 하여 밖을 좋아한다. 하나같이 가게 밖 테라스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형태로 자리가 배치돼 있고, 굳이 거기서 차를 마신다. 매연도 적지 않더구먼..

 

 

저녁을 먹고 나서는 세느강 유람선 '바또무슈'를 타기로 했다.

산하는 숙소에서 일기를 쓰고 좀 쉬다 '바또무슈' 터미널로 오기로 했고, 나는 여행 막바지라 가족 선물을 사러 '몽쥬약국'을 들러 '바또무슈'를 가기로 했다. 몽쥬약국 에펠점은 이름 그대로 에펠탑 근처에 있다. 매일 다니는 세느강이 아닌 뒤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좀 돌아가는 것 같지만 새로운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다 보니 구글지도에 유네스코 본부에 보였다. 여기가 세종대왕상을 수상한다는 곳이구나. 여행 준비할 때, 언제 시상하는지 살펴보기는 했는데 올해 일정은 나와 있지 않아 제쳐두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다니

 

몽쥬약국 에펠점에도 본점처럼 우리말을 할 수 있는 점원이 있어  물건을 사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면세 서류도 잘 받았다. 살짝 늦어 바또무슈 타는 곳에 도착했는데 산하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나중에 산하 기행문을 읽으니 센강 자전거도로로 오다 어떤 아저씨와 자전거 배틀을 했다고 한다. 아빠도 없으니 기어를 3단으로 올려 26km까지 달리고 있는데 그런 산하에게 지지 않겠다며 똑같이 속도를 내다 신호등에서 헤어졌다는 것이다. 별일 없기에 다행이지. 뭐 자기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느강 유람선을 타니 여행이 다 끝난 것 같다. 다리 밑을 지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왠지 독일인인 것 같은) 무리 때문에 설명을 자세히 듣기는 어려웠지만 야경이 출렁거리는 강물에 비치는 상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게 이 풍경이었으니 그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 같다.

저녁 9시에 출발해 10시에 돌아오는 배에서도 에펠탑은 불꽃축제는 보였다. 에펠탑, 랜드마크라 할만하다.

 

바또무슈에서 본 세느강. 인상파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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