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프랑스 여행 2[9.7~9.8]

여행 셋째 날(9월 7일 금요일

기상 시각을 6시에 맞추었는데 그전에 잠이 깼다. 여행지의 낯섦과 외부 일정을 따로 잡지 않아 일정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어제 못 쓴 일기를 쓰고, 숙소의 5kg짜리 드럼 세탁기를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세제를 찾지 못해 그만두었다. 영어라도 써 있으면 단어를 찾아보며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모두 프랑스어로만 적혀 있었다. 아직 어둡고 글자도 너무 작아 번역기를 돌리기에 어려워 아침 준비를 했다. 햇반 2, 볶은 김치 2봉지, 라면 1, 남은 채소로 만든 샐러드지만 맛있게 먹었다. 

 

여행 일정을 짤 때 산하는 '바스티유 광장'과 '앵발리드'를 가보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중심으로 선택한 것 같았다. 이곳들을 포함해 크게 한 바퀴 도는 일정을 계획했다. 일주일이나 파리에서 보내는데 큰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았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벨리브 스테이션에서 일반자전거 일주일 티켓(5유로)을 구입했다. 어제까지 24시간을 잘 이용했고,  ‘벨리브 앱을 살펴보니 시내 곳곳에 대여소가 있어(500m 이내), 30분 이내에 반납하는 조건만 잘 유지하면 가성비도 좋고 몸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숙소 앞 벨리브 스테이션. 매일 파리 여행의 출발점이나 도착점이었다. 녹색 자전거 일반 자전거, 하늘색 자전거 전기 자전거,

 

첫 번째로 빅토르 위고 저택이 있는 '보주 광장'을 찾았다.

2012년 대통령 선거 후 절망감 속에서 레 미제라블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민주주의의 시련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가를 찾아가 볼 수밖에 없었다. 4면이 주택으로 둘러싸여 있는 보주 광장에는 아침 9시부터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파리답게 이색적인 장신구, 가정용품, 옷 등 다양한 물품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구글 지도를 보며 빅토르 위고 저택을 찾았는데 있어야 할 위치의 입구가 막혀 있었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는데 따로 입구가 있지는 않았다. 설마하는 마음에 ‘공사중’ 표지판을 번역앱을 사용해 읽어 보니, 내부공사로 한동안(2020년까지) 문을 닫는다는 안내였다. 아~ 이런 내용은 검색할 때 본 적이 없었는데..

 

(왼쪽) 빅토리 위고의 생가. 공사 중이다.
빅토르 위고 생가 근처 보주 광장

 

예상치 못했던 터라 허탈했다. 보주 광장이 보이는 벤치에 않아 파리의 '테라스 문화'를 흉내 내 보았다. 카페나 음식점 바깥까지 테이블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는 걸 문화로까지 이야기하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 그것을 지켜보는 엄마, 아들과 공을 차며 노는 아빠, 우리처럼 동서남북 4곳에 있는 분수대에서 방문을 기념하는 사람들. 금요일 아침 9시이지만 평온했다

 

이어서 바스티유 광장’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바스티유 광장' 주변은 공사로 혼란했다. 덩달아 마음도 심란했다.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광장은 ‘프랑스 혁명’‘프랑스혁명’의 현장이라 산하가 보고 싶어 했던 곳인데 실상 그곳의 역사적인 흔적(바스티유 감옥)은 없었다. 광장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광장은 ‘7월 혁명 기념탑으로 프랑스 혁명과 거리가 있었다. 운하 공사로 공간은 좁고, 기념탑은 높아, 기념탑을 담기 어려웠다. 여행 기간 중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자주 살펴보았던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도 여기에 있었다. 계단에 앉아 바스티유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영락없는 갈 곳 잃은 여행객 모습이었다. 바로 앞에 벨리브 스테이션이 있어 자전거를 탔다.

 

바스티유 광장의 '7월 혁명 기념탑'. 바스티유 극장 계단에서 찍은 사진. 탑 너머 오른 쪽 건물 뒤편에 보주광장이 있다
바스티유 광장에서 오른쪽 강변을 따라 보봐르 인도교로 가는 길. 조금 더 가면 세느강이 나온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따라 파리국립도서관보봐르 인도교로 달렸다.

자전거 반납할 곳을 찾지 못해 돌다가 30분 즈음에 자전거를 반납했다. 그곳이 파리국립도서관이었다. 화장실이 급해 극장으로 보이는 건물에 들어갔는데 화장실을 찾기가 어려웠다. 도서관 입구를 찾았는데 쉬는 날이었다. 토요일인데.. 도서관이 쉴 수도 있겠다. 화장실이 급했지만 파리국립도서관 규모와 배치가 놀라워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파리국립도서관은 ㅁ자 형태로 배치돼 있었다. 각 꼭짓점에 큰 건물이, 그리고 공간들이 이어서 배치돼 있었다. 네모 가운데는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파리국립도서관의 왼편으로는 영화관 같은 문화시설, 오른편 보봐르교 쪽으로는 꽤 넓은 스탠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영화관 1층 편의점에는 우리나라 과자들도 있었다.

 

보봐르 다리는 파리국립도서관과 센강 건너편을 연결해 주는 인도교였다. 1950년대 2의 성이란 책과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보봐르의 이름을 다리에 붙인 걸 보면, 온고지신의 특성을 갖는 도서관과의 연결이 자연스러웠다.

 

보봐르 인도교

 

화장실도 갈 겸, 구글 앱으로 무난한 식당(체인점)을 찾았다. 직원이 너무 친절해 계속 질문을 하는데 부담스러워 익숙한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이틀 연속 햄버거를 먹은 산하는 바게트가 더 맛있다고 한마디 했다. 그사이 살짝 비가 흩뿌렸다. 벨리브 스테이션을 찾아 걷다 마을 공원에서 Queen보헤미안 랩소디라디오 가가가 들렸다. 노래도 잘하고 성량도 좋아 노래를 듣고 박수가 절로 나왔다.

 

오후에는 로댕 박물관에 가기로 했는데, 가는 길에 선물을 미리 사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몽쥬약국으로 방향을 잡고 강변 둔치를 이동하다가,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뮤지엄패스를 찾아보고 있는데, 젊은 청년 2명이 갑자기 산하 자전거를 끌고 가려고 했다. ‘스탑! 스탑이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다짜고짜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반문했다. 길게 말할 자신은 없고 ‘내 거라고 계속 이야기했더니 ‘Good bye~’하며 건들거리며 갔다. 눈 뜨고 코 베일 뻔했다. 무섭다기보다는 어이 없었다. 그 외 파리를 여행하며 새벽이나 밤늦게 자전거를 타기도 했지만 우리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몽쥬약국은 입구는 크지 않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크게 세 군데 정도 공간이 이어지며 다양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프랑스 약국은 약과 함께 화장품과 치약 같은 일상 용품도 판매하는 것 같았다. 검색해 보면 몽쥬약국 제품의 상당수가 우리나라 올리브영에도 있는데 더 싸다며 구입을 권하는 내용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이 많았고 다들 한 바구니씩 구입하고 있었다. 무엇을 살까 고르다 내가 선물할 수 있는 제품 종류라는 게 로션이나 크림 정도일 것 같은데 선물할 가족들(어머니, 장모님, 누나, 아내, 처제, 처남댁, 조카)도 다들 있을 것 같아 좀더 살펴보기로 하고 나왔다. 아직 시간 여유도 있으니.

 

다시 노트르담 성당 근처를 지나 로댕 미술관에 도착했다.

우리말로 미술관 표지가 있어 찾기가 쉬었다. 입구 오른편 정원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역시 건물 안에 있는 것보다는 정원에 있는 게 맞겠다. 이어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 그림보다는 조각품이 감상하기에 더 좋았다. 입체적이라 메시지가 더 분명해 보였다. 당연하겠지만 로뎅도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미리 작은 크기로 작품을 여러 번 제작해 보고 있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길에 고흐의 그림이 몇 점 있었다. 로뎅이 살던 곳을 미술관으로 꾸민 것인데 로뎅이 고흐의 작품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로뎅 박물관 입구. 로뎅 박물관 정원의 산하. 겉모습은 비슷한데 무얼 고민하고 있을까?

 

로뎅 미술관 옆에는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앵발리드가 있었다. 일단 규모에 압도당했다. 오늘 하루 이동 거리가 많아 산책하듯 앵발리드 내부 1~2층 감옥과 군수물품을 살펴보다 2층 복도에서 공연을 보았다. 옛날 대포가 보이는 앵발리드 입구에서 쉬다 숙소로 돌아갔다.

 

앵발리드 입구

 

남은 삼겹살과 햇반, 볶음김치, 라면으로 저녁밥을 먹고 산하는 기행문을 쓰고 나는 산책 겸 자전거를 타고 개선문에 가 보았다. 내일 몽생미셸 투어 집결지가 새벽 6 20분 개선문에서 있는데 검색 자료만으론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인가 싶기도 하고. 내 성격이 좀 그렇다.

숙소에서 개선문까지는 자전거 도로가 잘 돼 있었다. 숙소에서 앵발리드까지는 세느강 둔치의 자전거도로 이용,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까지도 자전거 도로 있는데 약간 오르막이긴 하지만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집결 장소를 확인하고 화장실을 가고 싶어 개선문 주위와 지하철까지 살펴보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싶어 자전거를 타고 지름길을 나름 계산했는데 개선문 앞뒤가 똑같아 방향을 착각했다. 점점 외진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자전거 반납할 시간도 돼 다시 개선문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화장실 표지판을 보았지만 9시가 넘어 문이 잠겨 있었다. 다시 자전거를 빌리려고 했는데 일반 자전거는 없고 전기자전거만 1대 있었다. 숙소까지 오는 길이 내리막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부스터가 달려 숙소까지 빨리, 편하게 왔다. 생각해 보니, 오늘 점심 때는 산하가, 저녁에는 내가 화장실 찾느라 고생을 했다. 

 

해질녘 개선문, 앞뒤가 똑같아 헷갈렸다

 

오늘 자유여행은 야구로 치면 4타수 1안타였다. 빅토르 위고 저택도, 파리국립도서관도, 앵발리드도 겉만 살펴보았지 내부까지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병살이나 삼진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파리 곳곳을 자전거로 돌아다닌 것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꼭 새롭게 알고 느껴야 할까 그런 부담을 조금 덜어내니, 4대강 종주할 때처럼 풍경을 보며 계절을 즐길 수 있었다.

오늘 하루 걸음만 2만 5천보, 자전거 이동 거리도 꽤 되었다. 노트르담 성당을 하루에 2번이나 보았고, 세느강 주변에서는 에펠탑이 쉽게 눈에 띄었다. 파리의 풍경에 조금 더 익숙해졌다.

 

여행 넷째 날(9월(9월 8일 일요일) 에트르타, 옹플뢰르, 몽생미셸

긴장을 해서인지, 일찍 잠들어서인지 4시에 일어났다. 빨래를 돌리고 아침을 먹고 530분 숙소를 나섰다. 9월 초인데 새벽 파리는 쌀쌀했다. 자전거를 타고 개선문 집결 장소까지 오니 6시 정도 되었다. 우리가 예약한 프로그램은 유로자전거나라의 몽생미셸 투어였다. 휴양지 에트르타와 옹플뢰르를 거쳐 몽생미셸의 야경까지 보고 오는 일정인데 참가자가 많았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 샘이 노르망디 역사를 들려주었다. 노르망디 지역은 바이킹족의 일족인 노르만족이 자주 침탈하다 거점을 삼은 곳이어서 노르망디라고 한다.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왕의 신하였지만 잉글랜드와 더 많은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며 차창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았다. ‘에트르타로 가는 길은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초원이 많았다. 간간이 방목된 흰 소, 황소 떼도 보인다. 또 구름 사이로 일출이 보였다. 경치를 눈에도 담고 사진으로도 간직하고 싶었지만 자리를 잘못 잡았다. 몽생미셸을 간다면 버스 오른편에 앉길 추천한다.

 

그러다 에트르타에 도착했다.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마을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니 갑자기 확 트인 대서양과 해안선 양쪽으로 코끼리 바위와 흰색 파식애가 절경이었다. 프랑스의 화가들도 이곳을 배경으로 많은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해변에는 모네의 그림과 실제 풍경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도판도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 산하와 산등성이 교회까지 올라갔다. 높이 올라갈수록, 또 보는 방향에 따라 풍경이 다양하다. 감상에 빠지기 좋은 날씨와 적당한 바람과 탁 트인 풍경이었다. 빠뜨리샤 까스의 호텔 노르망디를 들으며 내려왔다. 어울렸다.

 

에트르타 성당에서 바라본 풍경. 화가 쿠루베가 작품으로 남겼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
작가의 집을 찾아 온 여행객들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아르센 루팡의 작가 모리스 르불랑의 집을 찾는 관광객들을 보았다. 작가들의 생가를 찾아다니며 작품의 감동을 더하는 걸 동서양이 비슷하나 보다.

 

옹플뢰르로 가는 차 안에서 가이드 샘이 음악을 들려주며 누구의 곡이겠냐고 물어본다. 시몬스 침대의 배경으로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예전 유튜브에서 누구나 익숙히 들었지만 누구의 곡인지는 모르는 클래식으로 추천되었던 적이 있던 음악이다.

옹플뢰르는 '에릭 사티'가 몽마르뜨에서 이별 후 귀향해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곳이라고 한다. 편집증이 있어 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런 고집, 순수함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재탄생한 것은 아닐까, 예술은 역설적이다.

옹플뢰르는 센강의 하구로 배를 이용한 무역시대에는 대서양 무역의 중요한 지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많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옹플뢰르 내항의 모습은 올해 3월 고흥 연흥도 전시관에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들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유럽의 해상 도시들의 풍경비 비슷한 것 같다고 말하자 산하는 옹플뢰르의 건물이나 골목길과 영국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독일이나 체코, 오스트리아도 비슷했다고 말했다. 유럽이라는 비슷한 문화를 오랫동안 공유해서인가. 그럼에도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의 생활모습에 차이가 있고 이를 문화와 연결지었던 수필을 떠올려 보면, 잘 모르기 때문에 비슷해 보일 것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유럽의 수상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많이 보았던 장면이다.

 

마을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 점심부터 먹었다. 바닷가니 해산물을 먹는 게 맞겠지만 무난하게 소고기와 닭고기 요리를 선택했다. 맛있었다. 20년 전에 유행했던 주크박스가 식당에 있었다. 디스크가 돌아가며 노래가 바뀌는 장면이 반가웠다.

 

가운데 보이는 형광색 기계가 '주크 박스'

 

가이드 샘이 마을 중심에 있는 성당과 에릭 사티 생가를 추천했다. 마을 중심에 첨탑이 있어 거기가 성당인 줄 알고 가 보았으나 화장실이었다. 성당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장실 외관이 주변의 흐름과 비슷했다. 화장실 바로 밖, 광장에 있는 생 카트린성당은 당시 선박제조업자들이 건축에 참여해 배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성당이라고 했다. 그런데 겉모습만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마침 일요일이라 성당 내부로 들어가서 지붕을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목조로 된 따뜻한 성당이었다.

 

생 카트린성당의 내부. 차분한 일요일 오전 시간
에릭 사티가 살았던 곳.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산하가 피아노 연주를 흉내냈다

 

에릭 사티의 생가로 가는 길은 골목골목이 예뻤다. 마을 곳곳에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 제법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외국 사람들도 옛것에 카메라를 연신 들이댔다. 여행의 매력은 낯섦이 확실하다. 아참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외국인이 많지 않아 보인다. 다들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낯설다.

 

예전의 골목

기서 몽생미셸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가이드 샘이 몽생미셸의 역사와 관련지어 33대 천사와 성화의 상징에 대해 들려주었다.후광으로 신성한 사람들을 나타내고, 아기를 안고 있는 파란색 옷을 입은 여인은 마리아, 파란색 옷인 이유는 당시 금보다 청금이 훨씬 비쌌기 때문이며, 아기이지만 전혀 아기 같지 않는 얼굴의 예수님, 금색 백합을 들고 있는 천사는 가브리엘, 물고기를 들고 있는 토비아를 앞세우고 있는 천사는 라파엘, 하나님의 군대를 지휘하며 심판의 날 판결하기에 저울이나 칼을 들고 있는 천사는 미카엘이라고.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지나쳤던 이야기를 그림을 보며 살펴보았다.

 

몽생미셸은 미카엘 대천사의 계시를 받아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 생 미셸(성 미카엘)’이라고.

몽생미셸은 주차장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이용해 섬까지 들어간다. 뻘밭을 건너 화강암석 위에 세워진 3층짜리 거대한 로마네스크 성당, 몽생미셸, 그래서 아름답다는 느낌을 넘어 신비롭고 경외감이 느껴진다. 불가사의하다. 종교적인 힘이 아니라면 지을 수 있었을까. 이곳은 영화 반지의 제왕” 3미나스 트리스의 배경이라고도 한다. 딱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그런 감동을 깨는 게 있었으니, 섬 앞 해변에 세워진 일본 신사 표시인 하늘 천자 모양의 새빨간 건물. 몽생미셸에 많은 후원을 하고 있단다. 때가 때인지라(No Japan) 눈에 거슬렸다.

 

몽생미셸 성당 전경

 

몽생미셸은 썰물일 때는 일종의 육계도였다가 밀물일 때는 섬이다. 자연히 천연 요새이기도 해서 백년전쟁에서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한다. 입구에는 얼마 전까지도 당시 영국군이 침입했다 버리고 간 대포가 전시되었다고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수도원 3층까지 오르면 넓은 테라스가 나타난다. 이 테라스에서는 수도원을 짓는 데 사용한 돌을 가져온 섬도 보이고(물론 드넓은 바다도), 화강암에는 여기까지 돌을 가져온 길드의 기호가 a8 등으로 새겨져 있어 비용을 지불받은 흔적도 있다. 한편 이곳은 처음부터 넓은 곳은 아니었는데 화재로 무너진 건물을 보수하기 위해 건물의 일부를 부숴 채우다 보니 이렇게 넓게 되었다고 한다.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왼쪽 수평선으로 보이는 섬에서부터 돌을 가져왔다고 한다

 

예배당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 제단은 고딕 양식인데,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보통 유럽에서 성당을 지을 때는 제단을 먼저 짓는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기부를 하고 그 돈으로 계속 건물을 짓는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당의 양식은 카타콤바-로마네스크-고딕 양식 순인데 여기는 먼저 지은 제단이 고딕 양식인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제단도 로마네스크 양식인데 화재로 제단을 보수할 때 고딕 양식이 유행해서 우선 제단을 고딕 양식으로 지었고 다른 곳은 보수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3층 예배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벽이 한없이 두껍다.

 

137개의 기둥이 있는 정원, 식사 장소, 손님의 방을 둘러보며 내려오다 보면 집필실이 나온다. 집필실 천장은 바로 위층 정원에서 흘러내린 물로 이끼가 끼어 있다. 당시에는 책 한 권을 쓰려면 양을 몇 백 마리 정도 잡아야 양피지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책 한 권 한 권이 매우 귀한 때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화재와 세계대전으로 현존하는 책은 많지 않다고 한다.

 

수도원을 건축할 당시에 사용되었던 거중기도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이 거중기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사람이 들어가서 돌려야 하는데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 쳇바퀴가 반대로 돌면서 사람들이 크게 다쳤다고 한다. 민중들의 삶이란 참.

 

수도원을 건축할 때 사용했다는 거중기

 

용사의 방을 끝으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몽생미셸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니고 있을 때, 아내를 휠체어에 태운 채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있어 산하와 돕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괜찮다고 했다. 사랑의 힘도 놀랍다.

 

야경을 기다리며 저녁을 먹었다. 한 테이블에 앉은 관광객들과 통성명도 하고 여행 정보도 교류했다. 모두 커플들이었다. 날씨가 좋아 더욱 아름다운 몽생미셸의 달밤을 보며 어려움 속에서 단단하게 자리 잡은 수도원처럼,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원했다. 우리 가족의 안녕도, 우리 정치도 아름다워지길 기원하며. 盡善盡美.

 

몽생미셸의 9시 18분 풍경. 스토리를 알고 아니, 더 신비롭다

 

파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신없이 잤다. 새벽 2시 개선문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다. 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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