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상황에 맞는 독서프로그램" 모임 활동 결과물 출간을 눈앞에 두었다. 모임을 소개하려고 예전에 쓴 글을 뒤적거리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읽어볼 요량으로 여기에 옮겨 적는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며 소설교육론을 공부할 때 들었던 루카치의 말을 여기서 써 먹을 줄은 몰랐다. ‘샘물 같은 선생님’이 되라며 새내기 교사였기에 환영받았던 2000년이 기억난다. 합격의 감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반숙희 선생님과 박안수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서석초등학교 광주교육아카데미 ‘새내기교사 환영 연수’도 기억난다.


6차 7차 교육과정과 6차 교과서를 완전히 외워 눈감고도 가르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은 “연간 지도 계획, 수행 평가 계획, 연간 독서 프로그램, 생각 공책 목차”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파일과 공책에 고스란히 담긴 아이들의 생각과 활동을 보면서 사립학교에서 다졌던 문제 풀이 수업에 대한 자신감도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나도 두 분 선생님처럼 아이들의 생각과 활동이 묻어난 국어 수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랬겠는가. 함께 ‘새내기교사 환영 연수’를 들었던 다른 새내기 선생님들도 보고 느꼈던 충격만큼 목표를 세우고 교과서를 재구성하여 활동 중심의 국어 수업을 해 보고 싶었지만 반숙희 선생님과 박안수 선생님은 우리들끼리 한 번 해 보라는 조언만 하셨다.


결국 우리는 보고 배운 것이 있어 눈은 높아졌지만 수습하지 못해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마다 처한 학교 상황이 달랐고 그렇게 1학기를 보냈다. 우리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서로 연락을 취해, 전남대 공대 쪽문 근처에 있던 문화답사 동호회 사무실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반숙희, 박안수 선생님이 제시한 독서 목록이 낯설기도 했고, 모든 활동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했고, 시교육청의 특색 사업이라 적당히 부담스러웠던 우리는 여러 차례 모인 끝에 2001년 겨울 독서를 주제로 삼고 모임 이름을 ‘나라말향기’로 정했던 그 날이 기억난다. 모임 한 번 해 보겠다고 1년을 보낸 우리를 격려해 주시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광주국어교사모임 안에 든든하게 버팀목이 돼 주시는 선배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로 ‘나라말향기’는 내 일상이 되었다. ‘나라말향기’에 취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아 왔다. 매주 모이는 탓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 관리자의 눈치를 봐 가며 교무실에서 책을 읽었고, 그래도 다 못 읽으면 쉬는 시간 교실 앞에서 책을 읽어 간신히 서평을 써 지부 사무실에 당당하게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일상에 지쳐 느슨해졌다 싶으면 누군가 제안서를 올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글에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학기 마다 꼭 1박을 하며 이른바 ‘빡세게’ 했던 평가회를 거치면서 점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갔던 나라말향기를 어찌 잊겠는가.

 

마음 먹은 것은 꼭 하고야 말았다. 광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니 5.18도 알아야겠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대사를 알아야겠기에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3권을 내리 읽었고, 그래서 알게된 4.3항쟁을 체험하기 위해 제주도로 갔던 2001년 겨울. ‘빨간기와’와 ‘까만기와’를 읽으며 중국으로 떠났던 2002년 겨울. 송승훈 선생님의 권유로 독서 관련 라디오 방송을 함께여는 국어교육에 실었던 일, 광주시교육청의 독서교육을 참교육실천보고대회와 전국국어교사모임에 온몸으로 비판하여 시교육청의 눈총을 받았던,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가 화살을 날린 곳들과 다소 불편하게 지내는 2003년도를.

 

미약하지만 우리가 연구했던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한다며 광주교사신문에 매달 연재하거나 교육희망에 썼던 추천글들을. 2002년 지리산 뱀사골에서 상황분과와 주제분과로 주제를 분명히 했을 때에도 행여 독서 기능 교육에 치우칠까 시간을 맞춰 교육 철학을 함께 공부했던 그 후 3년. 서로 조언도 하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3년. 기어 수가 달랐을지라도 우린 아귀가 비교적 잘 맞았던 모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라말향기라는 무거웠지만 나를 지켜주었던 갑옷을 벗으려고 한다. 어떤 옷을 입을지는 겨울방학 동안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그 사이 나라말향기는 또 평가회를 하겠지. 헤쳐 모여도 모이는 것이니까난 언제라도 메아리가 들리면 그 산을 다시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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