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져 본 적 있니?(잉에 마이어)

요새 우리 아이들이 가을을 타나 보다. 아니 가을이 아니라 사춘기의 시작인가? 워낙 성장이 빨라 초등학교 5, 6학년 때 이미 졸업했을 거라 생각한 사.춘.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아니면 급격한 육체적인 성장에 이어 뒤늦게 찾아온 정신적인 혼란? 1학기 때 전혀 없었던 폭력 사건이 터지고, 자질구레한 갈등과 싸움, 수업 중에도 자꾸 거울을 보는 아이들, 두발이나 성적에 대한 고민으로 가출 아닌 가출을 한 학생(2박 3일 간 아파트 옥상에서 판타지 소설만 읽었다는 전설적인 아이가 있다)까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사랑’이란 이야기를 꺼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인터넷 소설이나 대중가요(뮤직비디오) 가사 속의 짐짓 과장된 사랑 이야기 혹은 각종 기념일로만 기억되는 (투투데이, 100일 등) 이벤트형 사랑 등. ‘유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있는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우리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

아이들의 ‘사랑’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지만, 인터넷 소설이나 대중가요를 빼고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좋은’ 사랑이야기는 너무도 드물다. 그런 점에서 <사랑에 빠져 본 적 있니?>라는 책은 좀더 진지하게 ‘사랑’이라는 단어에 접근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창문 밖 포플러 나무와 가로수 길을 사랑해서 나무들을 지키려는 카롤린의 모습은 <플라타너스 나무 위의 줄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두려움, 떨림, 기대, 기다림, 혼란의 섬세한 포착은 <플라타너스~>보다 더욱 훌륭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카롤린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상대방인 슈라메와의 교감이 부족하다는 것, 열려있는 결말을 지향하지만 그것으로 더욱 혼란스럽다는 점, 슈라메라는 캐릭터가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너무 이상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슈라메’는 잘생긴 얼굴에 오토바이도 잘 타고, 노래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이름처럼 가슴에 ‘생채기’를 안고 있는 청년이다. 카롤린과의 관계가 진전되면 두려움을 품고 떠나 카롤린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쯤이면 모성애를 자극하는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이 떠오르지 않는가? (예를 들어, 푸르메)

그 외에도 소설의 후반부를 넘어서면서 카롤린과 슈라메의 사랑이야기에, 추리극이 더해져 이야기의 맥이 흩어지며 지지부진해지는 느낌도 있다.

몇 가지 한계를 안고 있긴 하지만 사랑의 정의, 상대방에 대해 가지는 믿음의 문제,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에 아이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특히 카롤린의 입장이 되어 슈라메가 잘생기거나 노래르 잘 부르지 않았다면 과연 사랑할 수 있었을까 라든가 슈라메는 카롤린의 어떤 점이 끌렸을까를 가지고 이야기해 보면 좋을 듯하다. 
(134) 나중에 카롤린은 욕실에서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집게손가락으로 눈썹을 아래로 당겨 보았다. 입술의 보드라운 촉감을 느껴 보았다. 조금 전에 슈라메에게서 느낀 것처럼.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마치 이제 막 머리카락이 자라기라도 한 듯이. 슈라메가 카롤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입을 맞춘 후로 뭐가 달라졌나? 카롤린의 눈길은 자신의 몸을 따라 내려갔다. 날씬한 몸매가 마음에 들었다. 다리가 조금 더 길었으면 조았을걸. 피부는 너무 희다. 작고 탄탄한 가슴을 쓸어 보았다. 이 년 전부터 생리를 시작했다. 이제 곧 그날이 또 찾아올 것이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가벼운 긴장감에서 알 수 있었다. 

나는 다 컸어. 카롤린은 생각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랫동안 창문을 열어 놓고 서 있었다. 날씨는 추웠다. 평소라면 금세 몸이 떨렸을 텐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카롤린의 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밤하늘을 향해 뻗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다시 새잎이 나게 될 거야. 모든 것이 되풀이해서 찾아온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카롤린은 항상 당연하다는 듯이,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서 계절을 그냥 맞이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행로가 있었다. 소녀 시절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금방 지나가 버린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건 대체 어떤 걸까?

“나무야, 너도 벌써 알고 있었니?”

카롤린은 목소리에 웃음을 섞어 속삭였다.

“내 소녀 시절이 서서히 끝나고 있는 걸.”

카롤린은 슈라메의 테이프를 틀었다. 그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둠이 카롤린 곁으로 몰려왔고 땅속 깊이, 계속해서 깊이 파고드는 카롤린의 뿌리를 감싸 주었다. 어둠이 밝은 색 줄기를, 새싹이 돋아나는 가지들을 어루만졌다…….


(137) 두 사람은 서로를 애정으로 넘쳐나게 만들었다. 카롤린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 이토록 강렬할 수 있는지 상상도 못해 보았다. 마치 세차게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같았다. 처음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슈라메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더 강해졌다. 물론 동시에 그 일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카롤린은 슈라메가 조르지 않고 여유를 보이는 것이 기뻤다. 그렇기는 하지만 슈라메가 카롤린이 슈라메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카롤린을 원한다는 걸 보여 주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슈라메가 그러지 않는 건 카롤린이 더 어리고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걸까? 카롤린을 아직도 어린애로 생각하고 이 책임을 떠맡고 싶지 않아서? 카롤린은 물어보지 않았다.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슈라메와 함께 있으면 그런 의문은 쉽게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슈라메와 함께 있으면 놀라운 점과 새로운 점들이 너무나 많이 발견되었다.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그토록 많았다니!

그리고 슈라메는 카롤린을 위한 노래를 짓고 가사도 썼다. 카롤린도 답으로 비슷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록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다 해도 카롤린은 몇 시간씩이나 문장을 골똘히 생각해 낼 수 있었고, 그렇게 하면서 슈라메와 아주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156) “그래, 너! 힘들어지자마자 곧장 떠나 버리는군! 당연하지! 그렇게밖에 더 하겠어! 그럼 나는? 나의 분노, 나의 증오는? 나는 어쩌란 말이야? 나는 더 참고 견딜 수 없어! 그리고 이런 빌어먹을,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랑은? 사랑……. 슈라메, 이런 것도 사랑이야? 너는 내가 너를 이대로 계속 사랑할 거라고 생각해? 나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겨우 이런 거야? 잘났어, 정말! 나를 이렇게 만들다니! 너는 비열해. 슈라메, 너는 비열하기 짝이 없다고!”

사랑에 빠져 본 적 있니
국내도서
저자 : 잉에마이어디트리히 / 염정용역
출판 : 우리교육 200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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