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전(서신혜 옮김)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7. 10. 29.
요즘 <박씨전>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의 질문을 모아 토론을 하고 있는데, 각 반별로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이 바로 '세자와 대군은 그냥 데려가게 하고, 왕비는 데려가지 못했는가?'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찾아낸 답은 정말 놀라울 정도.^^
'세자와 대군이 가버려도 왕비가 새로 아들을 낳을 수 있으니 후사를 위한 가능성을 위해 그랬다, 박씨가 왕비와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다, 평소 왕비가 자애로워 임금보다 더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등 정말 기상천외한 답들이 쏟아졌다.
아이들과 함께 고민 끝에 찾아낸 답은 바로 왕비는 단순한 왕의 부인이 아닌 '국모'라는 점이었다. 국모가 끌려가는 것은 조선인들에게는 분노와 수치심을 안겼을 것이고, 국모를 지켜내는 것이야 말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례로 명성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서 조선 민중들이 보인 패닉상태와 그와 얽힌 김구(김창수)의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마침 해설에서도 김구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정말 깊이있게 이 사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외모뿐만 아니라 공부, 문장실력까지 뛰어났던 박태보의 죽음은 그냥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닌 영웅의 죽음과 맞닿아 있었기에 이렇게 후세에 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지루하고 어려울까봐 일찍 꺼내 읽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생생하고 재미있었고, 한 인물뿐만 아니라 박태보의 가족사, 당시 시대적 상황, 숙종의 개인적인 성격, 조선시대 가장 극형이었던 압슬형과 낙형에 대해 알게 되어 매우 뿌듯했다.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학교에서 진행한 1박2일 달빛독서에서도 돌아가면서 인생 책소개를 하는데, 인생 책까지는 아니어도 우리가 잘 모르는 고전 중에서도 이렇게 흥미있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었다.
-인상 깊은 구절-
29 <평소의 일화> 중
“신랑이 어찌하여 자지 않는가?”
“옷과 이불이 다 비단이라 너무 사치스러워서 선비에게 맞지 않습니다. 편치 못하여 잘 수 없습니다.”
완남공이 칭찬하고는 즉시 비단을 거두고 무명으로 된 이불과 옷을 방에 들였다. 그제야 박태보공이 취침하였다.
석천동에 새로 서당을 지어 도배까지 마친 후에 나가서 보니 서까래 하나가 비뚤어져 있었다. 박태보공이 “비뚤어진 것을 어찌 늘 대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즉시 다 헐고 고쳤다. 공이 바른 것을 좋아하는 성품이라 평상시 하는 일 중에 이런 일이 많았다.
✎ 이런 성격의 사람과 같이 사는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기에 후에 이런 사단이.. 일종의 복선 같은 ‘평소의 일화’였다.
32 <흉년에 이런 잔치는 아니 되옵니다> -상소문 중에서-
공자께서는 “재물을 절약하고 법도를 삼가 평안하게 하는 것이 제후가 할 효성”이라 하였습니다. 잔치를 풍성히 하고 음식을 낭자하게 하여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효성이라고 한다면 이는 공자께 말씀하신 효성과 다릅니다. 어찌 혼자 즐거우면 안 된다는 경계를 범하여 백성이 머리 아파할 만한 원망을 취하십니까.
✎ 숙종이 진연을 중지시키지는 않았지만, 비용을 덜어 간략히 진행했다고는 한다. 이 상소문을 받은 숙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말이 옳기는 하지만 괘씸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냥 봐주지 귀찮게 한다고 했을까? 어쨌든 숙종의 심기를 좀 건드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77 <끝없이 재촉하는 임금>
“병사를 일으켜 궁궐에 침입한 역적도 아닌데 이와 같이 급히 친국하십니까. 밤이 깊고 신하들이 미처 오지 못하였으니……”
하였다. 그러자 상이
“옥당은 귀먹었느냐? 흉악한 반역을 다스리는데 신하를 기다리겠는가. 오두인이 내 비망기를 헛말이라 하니, 진실로 그렇다면 내가 없는 말을 한 이광한 같다 하는 것이냐 이놈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이 분을 어떻게 풀까?”
109 <압슬형에 뼈 깨지는 소리 들려도>
“신이 어찌 궁중의 일을 알겠습니까마는 꿈속 일은 허망한 것에 가까워 맞는 일이 없는데, 부부간에 우연히 한 말이 그 무슨 잘못이라고 전하께서 이를 꼬집어 죄목으로 삼으시니 큰 잘못이 아닙니까. 전하께서 중궁이 꿈을 믿는다고 하시지만 신은 도리어 전하께서 꿈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입시했을 때 늘 하교하사 꿈 이야기를 하셨으니, 그래서 신은 전하께서 꿈을 좋아하시는 줄 압니다.”~“제가 비록 서인이기는 합니다만 성품이 본래 좁아서 세상과 부합하지 못하는 줄을 상께서 어찌 모르십니까. 신이 만일 붕당에 들어 이해관계로 계교를 짜서 잘 받들었다면 어찌 전하의 뜻을 맞추지 못하여 이 지경에 빠졌겠습니까. 밝은 임금께서 어찌 신의 평생 몸가짐이 붕당과 먼 것을 모르십니까. 신의 형 박태유가 여양부원군의 일을 탄핵한 적이 있어서 두 집이 서로 교통하지 않는데, 어찌 교분이 있겠습니까.”
✎ 너무 논리적이어서 숙종은 더 화가 났을 듯.
128 <한 글자만 써다오>
“너의 글을 보면 네 얼굴을 보는 것과 같으니 한 글자만 써 보내라.”
하지만 박태보공은 말로 대답하기를
“역률로 다스린 죄인이니 부자 사이라도 문자를 서로 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 내가 만약 부모였어도 자식의 머리카락 한 가닥, 헤어진 옷 한 자락이라도 얻고 싶었을 것 같다. 그런데 박세당 공은 글자를 원하다니. 놀랍고 존경스럽다.
133 <이 나리를 어깨에 메니 우리는 즐겁다>
“요행으로 살아서 유배지에 도착할지 모르니 내가 보고 싶은 책 몇 권을 짐 속에 넣어서 가져가자.”하니, 서계공이 쓸모없는 줄 알고 그렇게 하지 말라 했다.
✎ 가장 놀랍고 감동적인 대목.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세상에 책을 가져가려 하다니. 그의 정신세계는 놀랍기만 하다.
151 <뉘우치는 임금>
“대신이 여러 번 아뢰니 오두인과 박태보의 관작을 회복하라.”
✎ 세상에, 태보가 죽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숙종의 성급함이란. 쯧.
171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만>
“왕비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임금께 간하다가 죽었으니 죽을 때를 명확히 얻은 것이다. 국모를 폐하시는 때에 신하가 되어 아첨하여 국모가 죄에 빠지는데도 잠잠한 채 한마디 말도 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인륜이 무너진 것이다. 신하가 되어 임금을 허물에서 구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요, 우리 임금을 위하여 우리 어미를 보전하니 부부의 의이다. 한 번 일을 담당하여 삼강을 다 갖추엇으니, 이런 일을 당하면 군자는 목숨을 바칠지어다.”
✎ 박태보는 과연 나라를 위한 죽음이었는가, 아니면 왕비를 위한 죽음이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려준 대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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