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8. 1. 1.
|
너무 어려웠다. 이름들이. 사건이 눈에 들어오기 전에 쏟아지는 낯설고 어려운 이름들!! 어떤 때는 풀네임으로 어떤 때는 이름이나 성만으로 표현돼 있기도 해서 대략 난감이었다. 또한 사건도(강도를 숨겨둔 일과 두 건의 살인사건, 거기에 가장 카니발까지!!) 뒤죽박죽 얽혀 있으면서 시간도 과거로 되감기를 하고 있었다. 서술자는 자주 개입을 하면서 ‘자료의 원천’이니 뭐니 하는 어려운 단어들로 더욱 접근을 힘들게 했다. 10쪽 정도를 3주 정도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막상 모임이 가까워 오면서 힘들게 읽어나갔다.
아니 그런데, 이런 반전이!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 이 책의 놀라운 흡인력이 새벽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앞서 그냥 읽었던 낯선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살아있는 인물들로 형상화 되면서 영화처럼 다가왔다. 실제로 1975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영화도 꼭 보고 싶다.
부제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물리적인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주로 언어로 시작한다. 그리고 물리적인 상처보다 더 크고 오랜 상처를 남긴다. 일상적인 욕설들, 뒷담들, SNS에서 오고가는 근거 없는 억측들. 막장 소설을 쓰고도(논두렁 시계 같은) ‘아님 말고’ 식의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 기레기와 쓰레기 언론의 기원은 이런 작은 사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이 이야기는 언론만을 야단치지 않는다. 상류사회의 위선적인 탐욕과 이중적인 행동들, 삼류 막장 기사를 어떤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는 일반 시민들, 아무도 구원해 주지 않는 종교(어린 카타리나를 빨갱이라고 부르는 신부)까지 통렬하게 비판하고 풍자한다. 작가의 풍자는 완곡한 듯 직선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분노했고 통쾌했다.
‘예술은 여전히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 하인리히 뵐의 실제 삶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자신의 글을 ‘소설’이라 칭하지 않고 ‘이야기’라고 하며 끊임없이 독자와 독일시민들, 세계와 소통하려 했던 (김지하 석방 촉구 등) 하인리히 뵐의 다른 작품들도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더불어 이 책을 소개한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도 함께!
*인상적인 구절
<차이퉁>지는 자사 기자들에게 일어난 두 건의 살인 사건이 알려지자 상당히 유별난 태도를 취했다. 광적인 흥분! 대서특필. 1면 기사. 호외 발행. 통례를 벗어난 크기의 부고. 어차피 피살 사건이란 늘상 일어나는 것인데도, 마치 저널리스트 살인 사건은 뭔가 특별한 것인 양, 은행장이나 은행원 혹은 은행 강도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15)
→ 처음에 이 대목을 읽어나갈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3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라고 한 작가의 말을 따라 다시 읽게 되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참고로 이 부분은 6장이다) 평범한 여자의 일생을 망가뜨려 놓은 쓰레기 언론이 자신들한테 얼마나 관대하고 철저하게 방어하고, 구역질이 날만큼 자기애가 강한지!
개념 정의를 두고 그녀와 검사들 혹은 그녀와 바이츠메네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카타리나는, 다정함은 양쪽에서 원한느 것이고 치근거림은 일방적인 행위인데 항상 후자의 경우였노라 주장했다. 심문에 참여한 신사들이, 그런 것은 모두 중요하지 않으며 심문이 보통보다 더 오래 걸리면 그건 그녀 탓이라 말하자, 그녀는 치근거림 대신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차이가 그녀에게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그녀가 남편과 헤어진 이유 중 하나도 이와 관련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다정한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고 늘 치근거렸다고 했다. (31)
→ 이 부분을 읽고 카타리나가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뒤로 갈수록 이 부분이 선명하게 떠오르고는 했는데, 성실하고 분별있는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뵐의 언급을 존중해서)언어를 적확하게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기자나 법률가보다도.
대개 몇 시간씩 걸려서 9시나 10시, 어떤 때는 밤 11시에나 파죽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마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혼자 사는 여자를 많이 아는데, 그들은 저녁마다 혼자 텔레비전을 보면서 술을 마시거든요. (52)
→ 이 이분에서 홀로인 젊은 여성들의 불안과 고독, 두려움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특히 알콜중독 전력이 있는 부모님을 둔 카나리나는 지금의 자신을 세우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드라이브를 했던 카타리나에게 감정이입이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녀가 너무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었다.
<차이퉁>을 상대로 그녀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카타리나의 아파트에 대한 관심은 물론 직업에 대한 관심도 사라질 거라고 했다. 진술이 이 부분에 이르자 볼터스하임 부인에게도 “논쟁의 여지가 분명한 형태의 저널리즘을 형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은 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언론의 자유를 경솔하게 침해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소송도 정당하게 취급되고 불법적인 정보의 원천에 대해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에 대한 소송이 제기된다는 걸 그녀는 믿어도 좋다고 했다. 여기에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의 비밀 보장을 위해 거의 열정적이라 할 만큼 변론을 하며,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그런 무리(모임)에 끼지도 않는 자는 언론에도 그를 거칠게 묘사할 빌미를 결코 주지 않는 법임을 단호히 강조한 사람은 바로 젊은 코르텐 검사였다.(67~68)
→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언론과 법조계의 은밀한 결탁이 있지는 않았는지 의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질 나쁜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들은 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인지? 70년대 초반의 독일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불쾌했던 것, 아니 가장 불쾌했던 것은, 그자가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고 밝히면서, 그녀가 그리도 다정함을 원할 때 왜 그렇게 멀리서만 남자를 찾느냐며 그는 이미 그녀에게 모든, 모든 종류의 다정함을 서비스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78)
→ 역겨움과 불쾌함이 확 밀려들었다. 이 녀석이 누구인지 뒤에 가서 대충 밝혀지지만, 언론에 의해 무분별하게 신상이 털린 카타리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동정이 가는 대목이었다.
다른 대목에서 ‘함께 흐를 수 없는’ 원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건 운명의 여신이 왕의 아이들의 초를 잘못 불어 꺼 버린 것(<독일의 민요> ‘왕의 아이들’)이나 다름없다. 결국 어느 한쪽이 상당히 깊이 가라앉아 익사한 것이다. (102)
→ 이 이야기에서 몇 군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 구절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찌 보면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독일의 민요>를 가져왔지만, 독일 문화와 역사에 문외한인 나는 이런 비유들이 접근을 더 어렵게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ㅜㅜ
그 딸이 괴텐과 관계를 가졌으므로 블룸 부인 역시 마찬가지로 “시대사의 인물”이라는 기자의 지적에 의사는 시대사의 인물도 자신에게 우선 환자라는 말로 되받아쳤다. (106)
→ 오랜만에 만나는 양심적이고 책임있는 인물! 문제는 현실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것!
그녀같은 가정부가 영화배우 같은 사람을 거절한다고 하면, 그것도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취향을 이유로 거절한다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겠는가? 그는 정말 눈곱만큼의 자극도 주지 못했다면서, 그녀는 이 신사 방문 이야기 전체가 어떤 영역 안으로 아주 추하게 들이닥친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112~113)
→ 역거운 캐릭터의 순위를 매긴다면 살해된 퇴트게스와 기만적인 이중인격자 슈트로입뢰더(심지어 이름도 더럽게 어렵다)가 공동 1위가 아닐까? 그런데 이 대목에서 웃음이 나왔던 건, 오로지 ‘취향’ 때문에 한낱 가정부에게 퇴짜 맞았다는 설정을 한 작가의 섬세하고 친절한 풍자가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볼터스하임 부인이 뷔페에서 목격한 상류층 여성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 감춰진 천박한 행동들과 연결되는 장면이기도 했다.
경찰이나 검찰청은 블룸의 혐의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 파렴치한 괴텐을 정말 믿을 생각인가? 본지는 수차례 반복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의 심문 방법이 너무 부드러운 것은 아닌가? 비인간적인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118)
→ 이쯤해서 정말 막나가는 막장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기레기, 기레기 하는 구나!
‘남자들이 수년 간 지켜 오던 우정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서명을 하고 그걸 슈트로입레더가 아닌 블로르나에게 선사하면서 “자네 은행 잔고를 좀 불리고 싶으면 이걸 팔아도 좋네.”라고 말했다. 지금 막 언급하는 사실이나 처음에 묘사된 폭력 사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예술은 여전히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136)
→ 역시 작가의 재치가 빛나는 순간!! 예술이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어필하고 있는 작가의 성실한 책임감!!!
[하인리히 뵐의 후기] <차이퉁>은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로 경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거나 경찰에서 정보를 입수하면서, (그런 정보 교환 시, 우스울 정도로 사소한 것이 혐의점이 되곤 한다.) 헤드라인, 혐의, 비방, 비열함을 마구 내휘두른다. 거기서는 어떠한 장미도꽃을 피우지 못하며, 그 사이 이 ‘소박한 소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가도록 도와줌으로써 정말로 벌 받을 만한 행동을 했고, 명예와 품위를 잃는다. (149)
→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 이 대목에서 얼마나 통쾌했는지!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151쪽의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라는 구절도 역시 낄낄대며 읽었다!
+ 작가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 연보 중
1974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체포, 추방되어 뵐의 집으로 피신.
1978 뵐이 속한 국제위원회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년 전부터 투옥된 시인 김지하의 석방을 청원함.
1983 소련의 당서기장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핵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추방하지 말 것을 촉구.
1985 뵐의 사망 후 독일의 많은 학교가 뵐의 이름을 학교 이름으로 사용.
→ 독일 쾰른에 가고 싶다!!
'행복한 책읽기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2(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0) | 2018.01.01 |
---|---|
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 (0) | 2018.01.01 |
박태보전(서신혜 옮김) (0) | 2017.10.29 |
고백(미나토 가나에) (0) | 2017.09.12 |
80일간의 세계일주(쥘 베른) (0) | 2017.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