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세계일주(쥘 베른)


오랜만에 고전이라는 부담을 벗고 쉽고 편하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토요일 밤을 술이 아닌 책과 함께 보낸 것이 과연 몇 해 만인지? 책을 다 읽고, 이 책이 술술 쉽게 읽히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23일 제주도 여행을 떠난다고 해 보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싸야 할 짐이며, 예약해야 할 교통편, 알뜰하게 챙겨야 할 여행지며 숙박 등, 머리를 아프게 하는 복잡함들만 해도 수십 개는 된다. 그런데 세계일주를 하면서 달랑 손가방 한 개만 준비하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약속을 한 당일에 출발하는 역대급 결단력과 실천력까지! 파스파르투가 여행지 곳곳에서 일으키는 말썽들도 준비된 돈으로 매우 쉽게 해결한다. 심지어는 여행을 방해하는 픽스 형사까지도 챙겨주기까지 한다


이런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훌륭히 이겨내는 주인공의 능력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술술 읽히도록 유도하는 문체가 또 한 몫 하는 것 같다. 기욤 아폴리네의 찬사가 비아냥으로 들리긴 하지만, 만연체의 문장이 아닌 단순깔끔한 묘사와 서술이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마치 이야기꾼이 청중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서술자의 태도도! 또한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시간을 뛰어넘어야 하는 사건전개이기 때문에 뿌리부터 속도감 있게 읽힐 수밖에 없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2. 매력적인 파스파르투

80일간의 세계 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필리어스 포그가 냉정하고 계산적인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흥미있는 것은 포그가 아닌 분명 파스파르투 때문일 것이다. 포그를 범인으로 알고 쫓아가는 픽스라는 캐릭터도 재미있지만, 파스파르투 덕분에 이 소설은 인간적인 실수와 그로 인한 장애 등으로 생기 넘치는 소설이 되었던 것 같다. 주인에 대한 싹터가는 애정과 신망이 커져갈수록 엉뚱하게 방해만 되는 파스파르투의 행동들이(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사건을 급반전 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우디 부인 구출 사건, 수 족의 열차 습격 사건 등) 재미와 흥미를 더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헤찰을 부리며 다니거나, 아우디 부인에게 맛있는 망고스틴을 사다 드릴 줄 알고, 오로지 생존을 위해 서커스에 입단하거나, 아메리카에 멋지게 착지하고 싶었으나 갑판 구멍에 빠져버리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모르몬교 남자들의 행복을 생각하는 엉뚱한 매력을 지닌 파스파르투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영국문학이고, 쥘 베른이 영국작가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낭트에서 태어난 프랑스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낭트라는 곳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날 때 <지저 세계>, <해저 2만 리>도 꼭 읽어보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

12-3 쥘 베른이 살아남는 이유는 어쩌면 그에게는 두드러진 문체가 없고, 언어의 특별한 세련미도 없으며, 은유가 크게 지배하지도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문체는 그의 주인공들처럼 오히려 거칠고 일꾼 같은 데가 있다. 바로 그러한 점을 찬탄했던 사람이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아폴리네르는 아마도 쥘 베른을 흉내 낸 듯 쥘 베른! 대단한 문체! 오로지 명사들만!”이라고 탄성을 올렸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펴면서 분명 <두 도시 이야기>보다 잘 읽힐 거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플롯으로 이루어진 매우 경쾌한 모험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다보니 쉽게 읽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문체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들려주듯 펼쳐지는 사건들은 매우 쉽게 사건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아마도 베른의 책들이 청소년 문고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과학과 공상, 모험이라는 제재 외에 쉬운 문체가 주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욤 아폴리네의 찬탄은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58 “세계일주라고요!” 그가 중얼거렸다.

“80일 동안 할 걸세.” 포그 씨는 대답했다. “그래서 단 한순간도 낭비할 수가 없네.”

하지만 짐 가방들은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던 파스파르투가 말했다.

짐가방은 필요 없네. 여행용 손가방 하나면 되네. 그 안에다 모직 셔츠 두 벌과 긴 양말 세 켤레를 넣게. 자게 것도 마찬가질세. 다른 필요한 것들은 여행 도중에 사면 되니까. 자네는 내 방수 외투와 여행용 담요를 가지고 내려오게. 그리고 좋은 신발을 신게. 어차피 많이 걷지는 않을 테지만. , 가보게.”

 이 순간 느꼈을 파스파르투의 마음과 내 마음이 비슷했다. 솔직히 세계일주인데, 몇 트렁크를 싸도 모자랄 것 같은 여행준비물부터 머리가 아플 것 같은데, 세상에 여행용 손가방 하나라니! 물론 해설자의 말처럼 공간이 아닌 시간을 건너뛰는 여행이고, 돈이 사건 전개의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지만……. 정말 화끈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60 포그 씨는 휘스트 게임에서 딴 20여 기니를 자기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걸인에게 주며 말했다.

받으십시오, 산량한 부인,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그러고 나서 지나갔다.

파스파르투는 눈동자 주위가 축축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인이 그의 마음에 한 발 들어온 것이다.

 시계처럼 정확하고 이성적이며 냉철한 포그가 힘든 이웃들에게 보이는 상냥함은 솔직히 좀 어색하다.

 

73 “영사관님, 그런 자들은 눈으로 식별해 내기보다는 느낌으로 알죠. 육감이 있어야 해요. 육감은 청각, 시각, 후각에 협력하는 특별한 감각과도 같은 것이죠. 내 평생에 그런 신사들을 여럿 체포했습니다. 내가 찾는 도둑이 그 배에 타고 있기만 하다면 그자가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제가 장담합니다.”

 ‘육감, 식스센스라는 단어가 당시에도 있었다는 말인가? 원문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구절이었다. 한 편으로는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포그에 상반한 주관적이고 비이성적인 픽스 형사에 대한 캐릭터를 보여주려고 설정한 대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85 그렇다! 매일매일 젊은 여인의 눈에서 포그 씨에 대한 그토록 깊은 감사를 읽어내는 파스파르투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결국 필리어스 포그는 영웅적으로 처신하는 데 필요한 마음만 갖고 있지, 사랑을 위한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역시 매우 공감이 되지 않는 구절! 파스파르투 눈에 비친 포그는 너무 이상화되어 있다. 아님 쥘 베른의 시선인가?

 

199 픽스와 파스파르투는 얼빠지고 야위고 멍청해진 비참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아편굴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탐욕스러운 중상주의를 가진 영국은 그들에게 아편이라 불리는 그 치명적인 마약을 연간 26천만 프랑어치나 팔아넘기고 있다! 인간의 성격 중 가장 흉측한 악덕으로부터 뽑아낸 슬픈 돈!

 중국에 아편을 무역하는 것을 비판하는 시선이 영국이나 다른 유럽국가에서 있었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252 배튤카는 그 소동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필리어스 포그는 은행권 한 줌을 그에게 던져주어 그의 분노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6시 반에 포그 씨와 아우다는 막 떠나려던 참인 미국 여객선에 발을 디뎠고, 파스파르투가 그들 뒤를 따랐다. 등에는 날개를 달고 얼굴에는 아직 떼어내지 못한 6피트 짜리 코를 붙이고서!

 이 여행에 파스파르투가 없었다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시간 내에 도착하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이런 요절복통 사고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원을 신발을 신고 무단으로 들어간 것, 아편에 취해 주인의 배를 놓치게 한 것, 그리고 개고생 하며 서커스 단원으로 있다가 주인을 만나게 된 것! 주인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하고 싶은 파스파르투의 마음과 다르게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 소설을 매우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베스트 캐릭터는 파스파르투이다. 특히 날개 달고 긴 코를 붙인 귀여운 파스파르투!

 

263 파스파르투는 드디어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는 기쁨에 젖어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일로 공중 돌기를 하며 육지를 밟아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벌레 먹은 판자로 된 그 부두에 착지했을 때 그는 판자의 균열 사이로 떨어질 뻔했다. 신대륙에 그런 식으로 발을 디디게된 것이 너무 당황스러웠던 녀석을 끔찍한 소리를 내질렀다.

 역시 믿고 보는 파스파르투! ^^

 

290-1 파스파르투는 신념에 찬 총각 자격으로 남자 한 명의 행복을 여러 여자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모르몬교도들을 보며 일종의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불평해야 할 쪽은 오히려 남편이었다. 그렇게 많은 부인들을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안내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모르몬교의 천국가지 떼 지어 이끌어 가며, 그 낙원을 명예롭게 하고 있을 영광스러운 스미스와 함께 그곳에서 영원토록 그녀들과 함께 지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파스파르투에게는 끔찍해 보였다. ~ “한 명이었습니다!” 모르몬교도는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면서 대답했다. “한 명만으로도 지긋지긋했죠!”

 생각보다 파스파르투는 현명한 것 같다.

 

305 그런데 기차가 강을 넘자마자, 다리는 결정적으로 파손되어 메디신 보우의 급류 속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져버렸다.

 와우, 어디선가 보았던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인 것 같다. 그 시대에 이런 스펙터클함을 생각해 내다니! 이래서 베른이 인기 작가였을까?

 

354 “……이보시오, 당신의 배를 내게 팔라고 부탁하려고 오라고 한 거요.” 필리어스 포그가 말을 이었다.

싫소! 모든 악마들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데, 안 되오!”

왜냐하면 이 배를 불태워야만 하기 때문이오.”

내 배를 불태운다고!”

그렇소, 적어도 선루들은 태워야 할 거요. 우리에겐 연료가 없기 때문이오.”

 ‘굿모인 FM 노홍철입니다에서 매주 토요일 명작극장을 진행하는데,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랐던 것 같다. 배를 불태워서 가는 장면도 있다고? 읽어보니 역시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었다. 역시나 돈이 윤활유 역할을 하지만, 배를 연료로 불태우면서 가는 장면이 상상이 되면서 베른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력의 클라스가 다른 듯! ^^

 

365 필리어스 포그가 풀려났다! 포그는 픽스 형사에게로 갓다. 형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더니 포그가 평생 동안 결코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하지 않을 단 한 번의 빠른 동작을 했다. 자신의 두 팔을 뒤로 가져가더니 자동인형처럼 정확하게 그 불행한 형사를 두 주먹으로 쳤던 것이다.

 포그가 가장 인간적으로 보였던 장면! , 분노도 하는 구나!

 

374 “포그 씨, 친척인 동시에 친구인 사람을 원하지 않으세요? 저를 당신의 아내로 삼지 않으시렵니까?”

~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요, 진실로,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모든 것을 두고 맹세컨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통 당신 것입니다!”

 이렇게 오글거리는 대사들이 갑자기 넘쳐다나니! 자신이 계산했던 모든 세계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동안 보여줬던 단단한 껍질을 벗고 이렇게 매우 감상적이고 말랑말랑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인지? 해설자의 말대로 이 여행의 유일한 보상은 아우디 부인과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380 57초가 되었을 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시계추가 아직 60초를 치지 않았을 때 필리어스 포그가 나타났고, 그의 뒤를 이어 열광한 군중이 클럽 입구를 박차고 들어왔다. 필리어스 포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내가 왔습니다, 신사 여러분.”

 베른은 상상히 스릴을 즐겼던 것 같다. 세상에 3초 전 도착이라니!

 

387 아무 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려나? 아무 것도……. 좋다, 매력적인 여인만 뺀다면……. 그럴 수 없을 것 같겠지만, 그 여인은 포그를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었다! 사실 사람들은 그보다 덜한 것을 위해서라도 세계 일주를 하려 들지 않을까?

 요런 정리가 촌스럽긴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을 단순명쾌함의 매력 속에 빠지게 하지 않았을까? 세계일주라는 매우 복잡한 여정과 모험을 80일로 압축해 주고, 어떤 난관도 냉철한 계획과 추진력, 자금력으로 해결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결국 모험의 완료보다는 사랑을 얻는다는 매우 인간적인 주제까지 마지막에 명쾌하게 정리해 주고 있으니! 독자로서는 매우 편하게 여행을 함께 한 것 같아 유쾌하고 편한 독서였다는 점에 감사하고 싶다.

  <2017. 3. 28.>


80일간의 세계 일주
국내도서
저자 : 쥘 베른(Jules Verne) / 이효숙역
출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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