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홀로 깨어

새벽에홀로깨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최치원 (돌베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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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건너 뛴 만남. 시작부터 설렜다.
선덕여왕이나 광개토태왕’, ‘주몽같은 드라마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담긴 체취를 직접 느낄 수 있다니, 정말 흥분이 되었다. 통일신라, 당나라와 교역하며 당시 세계 최고의 문물을 깊게 호흡하다, 변두리 신라로 돌아와 느꼈을 포부와 좌절, 답답함 등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제목 <새벽에 홀로 깨어>처럼 시대를 앞서간 최치원의 마음 한 조각을 엿볼 수 있어 아주 좋은 독서체험이 되었다. 특히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 마음에 들었고, 도교와 불교, 유교 등 모든 사상, 그리고 신화와 전설이 혼재해 있는 당시 세계관도 매력적이었다.

21~24 새벽
물시계의 물방울 아직 떨어지건만
은하수는 벌써 기울었네.
어렴풋이 산천은 점점 변해 가고
갖가지 물상(物象)이 열리려 하네.
높고 낮은 희미한 경치가 눈에 보이며
구름 사이 궁전을 알아보겠네.
이곳저곳 수레들 일제히 움직이니
길 위에 먼지가 이네.
저 하늘 끝에 먼동이 트고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네.
<중략>
잠깐 사이 새벽빛이 조금 뚜렷해지더니
새벽 햇살이 빛을 발하려 하네.
줄지은 기러기 떼 남쪽으로 날아가고,
한 조각 달은 서편으로 기우네.
장사차 홀로 나선 사람 일어났으나
여관문은 아직도 닫혀 있네.
외로운 성에 주둔하는 백전(百戰)의 용사들에게
호가(胡笳)소리는 아직 그치지 않네.
다듬이 소리 쓸쓸하고
수풀 그림자 성그네.
사방의 귀뚜라미 소리 끊어지고
먼 언덕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렸네.
단청 화려한 집에는
푸른 눈썹 그린 미인이 있고
잔치 끝난 누각에는
붉은 촛불만 속절없이 깜박이네.
상쾌한 새벽이 되니
내 영혼 푸른 하늘처럼 맑아라.
온 세상에 밝은 해 비치자
어둠이 바위 골짜기로 사라지네.
천 개의 문과 만 개의 창이 비로소 열리고
넓은 천지가 활짝 펼쳐지누나.
--> 천 년 전 당나라의 가을(?) 새벽 풍경이 수십 폭에 연달아 그려진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동틀 무렵 다양한 인간군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쓸쓸하면서도 슬픈 시각이 어우러져 묘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카메라가 서서히 이동하며 잔잔하게 새벽 풍경을 담다가 '천 개의 문과 만 개의 창이 열리는' 역동적인 장면으로 마무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잘 만든 영상을 읽는 듯 했다.
 


26 봄바람
너는 바다 밖에서 새로 불어와
새벽 창가 시 읊는 나를 뒤숭숭하게 하지.
고마워라, 시절 되면 돌아와 서재 휘장 스치며
내 고향 꽃피는 소식을 전하려는 듯하니.
--> 최치원의 시는 시각적 이미지가 도드라진 시들이 많다. 그러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특히 '서재 휘장을 스치는' 따뜻한 봄바람이 눈에 그려진다.
 


36
바위 위 작은 소나무
쓸모없는 나무가 수()를 누리나니
산골짜기가 어찌 바닷가만 할까.
저물녘 해가 구름을 끌어와 섬의 나무들 가지런하고
밤바람은 솔방울 흔들어 밀물 모래밭에 떨어뜨리네.
반석에 내린 뿌리 깊고 굳세니
구름에 닿기 아득하다 뭘 한탄하리.
키 작은 걸 부끄러워할 것 없네
안영(安嬰)의 집 들보로 삼을 만하니.
--> '안영'은 키가 작고 볼품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공자도 높이 평가했던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재상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에도 키와 외모에 대한 편견은 있었나 보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시다. '쓸모 없는 나무가 수를 누리나리'라는 구절에서 튀지 않고 마음 편히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아이들이 떠오른다.



38 옛 뜻
여우는 미녀로 잘 둔갑하고
살쾡이는 선비로 잘 가장하네.
뉘 알리 짐승들이
사람 몸으로 변신해 흘리는 줄을.
하지만 변신은 외려 쉬운 일이요
양심 지키기가 제일 어렵네.
그러니 참과 거짓 알고 싶다면
마음의 거울 닦아 비춰 보게나.
--> 신화와 전설 속에 살고 있는 옛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 여우와 살쾡이가 인간으로 변신한다 생각하는 시대의 풍경들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43 강남의 여인
강남은 풍속이 분방하여서
딸아이 애교 있게 키운다나.
꾸미기만 좋아하고 바느질은 부끄러워해
곱게 단장한 채 악기의 줄을 고른다지.
고상한 가락은 배운 일 없어
온통 염정(艶情)에만 이끌린다지.
꽃 같은 자기 얼굴
언제나 그럴 줄 알고,
이웃집 아낙을 비웃네
아침 내내 베틀만 잡고 있다고.
베 짜느라 몸이 고달플 테지만
비단옷 너한테 안 돌아갈걸!”
--> 여성의 마음으로 시를 읊은 것도 재밌고, 교만한 여인의 입장에서 풍자한 것도 흥미롭다. 특히 '꽃 같은 자기 얼굴 언제나 그럴 줄 알고, 이웃집 아낙을 비웃네' 이 부분과 교만한 여자의 마지막 대사가 압권이다. 분명 실제 모델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다.


45~47 다섯 가지 옛 놀이
1) 금방울 놀이
2) 다리꼭지 놀이
3) 탈춤
4) 꼭두각시 놀음
5) 사자춤
멀리 사막 건너 만 리를 오느라
털 다 빠지고 먼지 뒤집어썼네.
머리 흔들고 꼬리 치며 순하게 따르지만
웅장한 그 기운 어찌 뭇짐승과 같으랴.
--> 이 부분에서 대학시절 한국민속학을 가르치시던 지춘상 교수님이 떠오른다. '사막을 건너 먼지를 뒤집어 쓴 사자'를 연상하며 북청사자놀음 등을 나름 재미있게 공부했던 기억이 있다. 인터넷을 뒤적여 보니 2009년 6월 별세하셨다고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62 봄놀이 약속을 저버린 친구에게
장안에서 고생하던 때 생각해 보면
어찌 고향의 봄날을 헛되이 보내랴.
오늘 아침에 산에 놀러가잔 약속 또 저버리니
속세의 명리인(名利人) 알게 된 게 후회스럽네.
--> 이른 바 힘들 때 사귄 친구가 사정이 달라지니 배신했다는 이야기인데, 솔직한 최치원의 마음이 느껴져 인상 깊게 다가온다.
 


66
여도사와 헤어지며
늘 속세의 벼슬살이 후회했으나
마고(麻姑)와 알고 지낸 몇 년간 참 기뻤어요.
떠나는 길에 진심으로 말하노니
바닷물은 어느 때나 다 마를까요?
--> '마고'는 한나라 환제 때 채경이라는 관리의 집에 머물렀다는 전설 속의 선녀이다. 짧은 시 구절에 얼마나 많은 정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에 읽히는 봄바람 같은 연심이 느껴지는 시이다. 치열하게 외국생활을 하는 중에 알게 된 여도사(도교에서 여자도사)와의 만남 속에서 기쁨을 느꼈다는 최치원의 솔직한 고백이 참 좋다.


85 가야산 독서당에 적다
바위 사이로 콸콸 치달리며 온 산에 소리쳐
지척에 있는 사람 말도 못 알아듣겠네.
시비 다투는 소리 들려올가 늘 걱정되어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감쌌네.
--> 익히 많이 보아 온 시이지만, 번역이 새롭게 맛깔나서 적어 본다. '흐르는 물로 산을 감쌌네'라는 구절은 언제 봐도 참 호방하고 신선한 표현이다.


93 <
계원필경집> 서문 중에서
율수현위 직을 내놓고 회남 절도사의 종사관이 되어 고 시중의 붓과 벼루를 도맡게 되자 군사관련 글을 작성할 일이 몰려들었습니다. 맡은 일을 힘써 담당하며 4년간 마음을 써서 만여 편의 글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변변찮은 글을 가려내고 나니 열에 한둘도 안 남았습니다. 감히 모래를 파헤쳐 보물을 발견하는 일에 견주면서, 깨진 기와 조각으로 벽을 긋는 것보다는 조금 낫다고 여겨 마침내 <계원필경집> 스무 권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난리를 만나 군막에 머물러 지내며 글 짓는 일로써 밥벌이를 했으므로 이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으니 왕소의 말로 증험을 삼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부족한 글들이라 오리나 참새에게도 부끄러우나 이미 밭 갈고 김매듯 마음을 파헤친 것들이므로 자그마한 수고나마 버리기에는 아까워 임금님께 보여 드리고자 시와 부와 표와 장 등 총 28권을 이 글과 함께 삼가 올립니다.
--> '필경(붓으로 밭을 갈다 즉 글을 쓰는 일)의 뜻을 알아 좋았고, 최치원이 도채체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어 새로웠다.
 


96~97
역적 황소에게 보낸 격문
하물며 주나라 솥은 네가 넘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이 어찌 네가 머물 곳이겠느냐! 장차 네가 어찌하려는 건지 모르겠구나!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회오리 바람은 하루아침을 못 넘기고, 소나기는 하루를 못 넘긴다.”라고 하였으니, 천지자연도 오히려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너는 또 듣지 못하였느냐? <춘추전>하늘이 나쁜 사람을 그냥 놓아두는 것은 그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흉악함이 심해지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포악함을 숨겨서 악이 쌓이고 화가 가득하였는데도 위험함을 편히 여기고 미혹되어 돌아올 줄을 모르니, 말하자면 제바가 막 위에다가 집을 지어 그 막이 불타오르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들고, 물고기가 솥 속에서 헤엄치지만 곧 삶아지는 것과 같은 셈이다. 우리는 웅대한 전략을 모으고 여러 군대를 규합하여, 용맹한 장수가 구름처럼 날아들고 용감한 군사들이 비처럼 모여들어, 높이 휘날리는 것은 초 지방 요새의 바람에 에워싸고 총총히 들어선 함선은 오강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의 일부다. 비록 종사관으로서 쓴 공문이지만, 후세의 사람들이 탄복할 만큼 명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나의 짧은 안목에도 말이다. 고금의 여러 책에서 인용하고, 비유도 신선하고,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것 같다. 황소가 이 글을 읽다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말도 과장만은 아닌 듯 하다. 특히 이 부분을 초록한 이유는 <춘추전>의 나쁜 사람에 대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서이다. 2012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누군가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100
허경에게 보낸 편지
허경에게 알린다. 편지를 받고 아내 유씨가 전쟁터에 따라가 일하기를 원한다는 걸 알았으니 이를 가상히 여기는 마음 말로 다할 수 없다. 내가 매양 후위의 책을 읽어보건대 양대인이라는 이는 무예가 출중하여 전공이 높았는데 그의 아내 반씨도 말타기와 활쏘기를 자못 잘하여 전쟁을 하거나 사냥을 할 때 반씨 또한 군복을 입고는 말고삐를 나란히 한 채 돌진하였다 한다.
--> 당나라 시대 여성의 지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늑대토템>의 마지막에 보면 천전의 입을 빌어 작가의 말을 전하는 대목에, 당나라가 유목민족의 피를 수혈받아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하는데, 최치원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양대인의 아내 반씨도, 허경의 아내 유씨도 참 멋진 시대를 살다간 멋진 여장부들이다. 그녀들을 인정해 준 시대와 남편들이 무척 매력적이다.


104 한식날 전사한 장병을 애도하며
! 삶에 끝이 있음은 고금에 슬퍼하는 바요, 이름이 썩지 않음은 충의의 으뜸이다. 그대들은 활을 당겨 몸을 수고롭게 하고 수레를 타고 힘을 다했으며, 씩씩한 대열에서 기백을 떨치다 적진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지. 용맹을 전쟁터에서 드러냈으니 의미 없이 침상에 누워 죽는 부끄러움을 면하였도다. ~ 나는 생각하네 그대들의 옛 공로를. 나는 슬퍼하네 그대들 없이 맞이하는 이 좋은 시절을.
--> 죽은 이에 대한 애도가 느껴지는 구절이다. 이름 없는(?) 장병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13 예부상서께 드리는 편지
하지만 예전에 정공 최시랑이 과거 시험을 주관하던 해에 빈공과에 급제한 이가 두 사람이었는데, 그중 발해의 오소도 등을 상등(上等)으로 삼은 일은 몹시 부당한 일입니다... 어찌 맑은 물과 탁한 물이 함께 흐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가 하나가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갓과 신발이 거꾸로 된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 발해에 대한 신라의 생각, 그리고 발해와 신라를 모두 아우르는 당나라의 정책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
신라의 위대한 고승>
진감선사 이야기
낭혜화상 이야기
지증대사 이야기

213 <해설 중에서> 최치원의 은거가 신라 왕실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정계를 떠난 뒤 44세 무렵에 쓴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의 벽에 쓴 기>와 같은 글에서, 신라에 대한 최치원의 변함없는 자부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미 격변기에 접어든 역사의 새로운 흐름을 막기에 그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왕건이나 견훤 등의 세력에 동조할 수 없었던 비판적이고 양심적인 지성 최치원에게 은거란 어쩌면 필연적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 최치원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번역자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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