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 행복한 책읽기/인문사회
- 2012. 1. 13.
“배움과 나눔의 국어수업” 참여형 토론 연수 강사 선생님이 강의 전 읽어오라고 숙제를 내주신 책이다. 정해진 날짜는 촉박한데 시내 대형 서점에 책이 없어 무등도서관에서 빌렸다.
20대들의 삶에 대해 여러 개념에 기대어 설명한 이 책의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제목도 잘 기억되지 않았다. 밑줄 긋고 메모하며 읽어야할 책을 포스트잇만 붙여가며 기간 내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훑었다. 그렇게 다 읽고 나서보니 이렇게 읽을 책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인터넷 서점에 주문한 책이 왔다. 요새 읽은 책 중에서 밑줄을 가장 많이 그었고, 메모한 구절도 가장 많았다.
그만큼 20대, 정확히 말하면 대학생의 언어와 그들의 말을 해석한 글쓴이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었다. 20대 국어교사는 국어교사모임 활동을 하는 내 입장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는 동료들이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20대의 목소리가 두 대학에, 또 대학생이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글쓴이가 말하는 ‘구체적 보편성(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유를 촉발시키는 구체적이며 보편적인 이야기)’을 갖고 있어서 삶의 어떤 부분이든 고군분투하며 현재를 버티고 있는 20대들의 처절함이 느껴졌다.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며, 열정을 바쳐도 잉여 인간이 돼 가고 있다는 것은 시대의 문제이며 사회, 특히 기성세대들의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대 규정은 세대 논쟁을 반영하고 있기에 글쓴이는 이 부분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책에서는 20대(또 10대 포함)를 ‘Y세대’라고 규정하며 386세대와 X세대와 차별을 시도하고 있다. ‘88만원 세대’가 경제적인 측면의 세대 구분이라면 ‘Y세대’는 사회・문화적인 측면의 세대 구분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여하튼 ‘Y세대’라는 말부터 기존 세대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글쓴이의 말대로 이 책은 세대 논쟁이 목적이 아니다. 20대들의 고군분투를 그들의 언어를 통해 들어보며 공감하고 소통하자는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
<너흰 괜찮아>
(14) 언어란 이처럼 중요하다. 언어는 성장의 지표이다. 어릴 때는 앵무새처럼 배운 말을 곧이곧대로 반복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즉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언어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그 세상에 개입할 수 있다.
⇒국어수업이 언어사용기능의 신장에 있다고 할 때 '언어'란 무엇일까 의사소통수단임을 강조한다면 자기를 드러 내는 언어라고 해야겠다. 교과서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만의 언어. 그 언어에는 세상에 대한 시각이 드러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주 쓰고 말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게, 그 경향을 드러내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언어로서 아이들과 소통하며, 중학생들의 성장에 대해 다른 중학생들과 어른들에게 이야기할 의무가 있다.
<우린 아직 인간이 아니다>
(67) 386들은 이런 대학생들을 속물(아이템을 가져서)이라고, ‘찌질이’라고 격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잉여로 내쳐진 자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중략) 우리 모두는 본래 속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속물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 기성세대들은 20대를 가르켜 자기 잇속에만 관심 있는 속물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20대는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내부로 편입하게 위해 자신의 가치(상품성)를 높이는데 급급하다. 저자는 속물과 동물의 차이를 밝히며 그걸 문제제기하는 '인간'은 그 사이 정도가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복잡하지만 결국 그걸 비난하는 사람이나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인간’적이지 못한 것 매한가지다.
<정치 혹은 민주주의> 혁명에 냉소한다
(85)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전혀 다른 냉소주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혜교와 도영의 냉소주의는 아직은 가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다만 가치가 배반당한 현실에 던지는 냉소주의이다.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 자체만큼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88)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진 듯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이고,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다.
(89) 정치의 속성(사기)을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져버렸고 정치가 주창하는 모든 가치에 냉소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중략)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들이 단명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냉소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속물이 되고 모든 가치는 속물의 언어가 된다. (중략) 그래서 남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는 이 사람들을 우리는 속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들에겐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다.
(96)한국의 진보 세력은 민주주의가 정치적 언어에서 한쪽에서는 냉소주의로 다른 한쪽에서는 속물들의 윤리적 언어로 전환하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중략-97) 오히려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절대적인 가치로 고정해놓고 도덕적으로 사용하다가 정치가 도덕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도덕’을 전면에 내세운 보수주의자들에게 역습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학생들의 탈정치화가 아니라 우리가 일조한 정치의 도덕화가 문제다.
⇒지나친 도덕주의가 진보 세력에게 역공이 되었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는 꼼수다”겉으로 보면 진정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 속엔 논리적인 추론과 비판이 감춰져 있다. 풍자와 해학으로 장난 같지만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20~30대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생활이고 정치에 무관심해 보이는 20대들도 정치의 속성을 다 알고 있다면 좀 가벼워도 별 문제 없지 않을까.
<교육> 학교라는 이름의 정글
(100) 너무 당연한 말이겠지만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장 때문이다. (중략) 과거에는 성장을 위한 교육이 삶의 곳곳에서 이루어졌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성장을 독점한 곳은 학교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부터 교양, 사람을 사귀는 법, 권력관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학습한다. 때로 이 공간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학교가 교육의 공간이고 이 교육을 통해 우리 대다수가 사회의 구성원이자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해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121) 훈육이 아닌 교육이 가능할까? 공교육이건 대안교육이건, 혹은 홈스쿨링이건, 혼자서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와 만나 주고받는 가르침과 배움을 교육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훈육을 배제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만약 훈육이 아닌 교육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세상에 폭력적인 교육과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그 자체가 폭력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폭력적인 교육과 비폭력적인 교육을 구분할 게 아니라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하지 않을까? (중략) 공교육은 폭력이지만 대안학교의 교육은 사랑이라는 주장에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한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교사들에 의해서 토론이나 글쓰기를 강요받고 있다고 반발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역시 강요와 폭력으로 경험하고 있다.
⇒학교가 너무나 익숙해서 학교에 대한 ‘합의’를 잊고 살았다. 학교는 입시를 위한 수단 또는 단계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배움, 성장의 공간이다. 날마다 낯설고 새로운 것과 만나면서 자신의 벽을 허무는 과정이다. 기껏해야 4개~5개 경우의 수만 가진 세상은 없다.
마지막 문단은 학교의 존재론적 모순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학교의 시작부터 교육의 이유가 결국은 사회를 위한 재생산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목표와 방법, 생활교육은 계획적으로 의도된 것일 수밖에 없다. 20대의 지적에 공감이 가면서도 내 관심은 ‘폭력’이란 단어보다는 교육은 어쩔 수 없이 ‘강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강제적이면서까지 교육해야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 멀쩡한 가족은 없다
(142) 학생들의 리포트를 읽고 그들과 토론하면서 나는 ‘소통’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소통을 최선,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대통령부터 진보적인 단체까지. 정치 문제부터 가족 문제까지 모두가 ‘불통’이 문제라 말한다. 그리고 소통이 잘 되면 만사가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한다. 소통이 폭력에 맞선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폭력이 되고, 불행의 해결책이 아니라 소통하라는 강요가 오히려 불행의 시작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략) 매끄러운 소통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감정노동이 가족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말을 섞고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문제와 갈등은 회피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마치 소통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며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만을 끊임없이 확인해왔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토론하고 발견하여야 하는 것은 가족끼리든 가족 밖에서든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 우리는 늘 치고 박고 싸우면서 끊임없이 침묵의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문제를 감내하고 해결하기 위한 감정노동을 감수할 때만이 가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진실이다.
⇒가정의 붕괴를 체감하는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경제 위기 이후에 먹고 사는 게 급급해 가족끼리 소통하고 부대낄 공유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 가사 노동은 감정으로 대신하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요구하는 감정만 많아지고 있다. 사는 게 힘들기에 소통은 상처만 남긴다. 힘들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가정이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이상적인 가족을 상정하고 문제시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20대의 의견이다. 교육적 차원에서는 복지를 통한 자존감 형성 같은 걸로 접근한다.
<사랑> 이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163) 사랑하는 사람과 삶의 공간을 함께 가꾸어가면서 그 사람과 나를 알고 공동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경험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인데도 이들에게는 공동의 공간이 아예 없다. 같이 상상하고, 같이 성찰하며, 같이 만들어가는 공간에서만 서사가 가능하다. 그런데 함께 가꿀 삶의 공간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서사’로 만들어갈 수 있겠는가. 삶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랑이 임시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숭고한 사랑이 사라진 20대를 비판하기 전에, 함께 삶을 기획하고 계획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통제되지 않는 현실이 문제다(삶이 임시적이다). 20대가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기에 사랑은 등가교환적인 것이 되고 그래서 임시적인 사랑만 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이것이 20대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 <88만원 세대>의 문제제기에 크게 공감한다.
<소비> 팔리기 위해 나를 전시한다.
(184) 인정투쟁을 위한 의사소통 자체가 변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반성을 요구한다. 더 이상 상품화나 물신화에 대한 비판으로는 이들에게 다가설 수 없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꿀벅지’니 ‘말벅지’니 하며 상품화 될 수 있느냐는 비판은 너무나 촌스러운 말이 되어버렸다. (중략)
여성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상품화에 대한 감수성이 없느냐며 이 학생은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품평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것은 내가 사회적으로 존재할 만한 가치와 의미를 획득했으면 인정투쟁에 승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인권이나 존엄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사회의식이 이전 세대들보다 한심할 정도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질타와 비판의 언어가 그들의 귀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겹고 고리타분한, 후지고 하나 마나한 말씀이 된 것뿐이다.
⇒유행에 민감한 세대들의 언어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남들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요새의 인정투쟁이라는 말도 알겠다. 명품을 통해 동류의식의 정체성과 합리성도, 그것을 드러내는 핵심이 몸이라는 것도 알겠다. 그래서 누구에게 인간이기 이전에 상품으로서 최고의 품평을 받았을 때 만족하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는 것 또한 문제 아닌가. 20대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몸을 관리하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비 역시 엄청나고. 결국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이 중요한 것인가.
<돈> 돈은 자유다
(209) 돈에 의한 교환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철저하게 그 이면에서 일어난 일을 감추고 파괴하며 숫자로 추상화하는 힘이다. 그래서 돈에는 기억도 추억도 표정도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만들어지고 있는 몇몇 사회적 경제들은 교환에 저항하고 있다. 이들은 교환이 아니라 교환이 파괴한 구체적인 삶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구체적인 삶을 서로 ‘증여’한다.
⇒20대들 역시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돈은 다양한 걸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준다. 아르바이트에 목을 매는 이유도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도 그렇다. 그러나 최근 증여=재능기부 등을 통해 돈이 감추고 있는 폭력(돈의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활동들이 늘어나고 있고 거기에 관심 갖는 청소년들도 늘고 있다. 아직 ‘돈’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하고 있기에 이런 시도들이 나오는 것 같다.
<열정> 잉여, 열정과 삽질 사이에서
(234) 이 노예들은 그것을 감수하면서도 간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최고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착취로 얼룩진 최고를 향한 열정은 잉여들의 삽질과 다시 만난다. 착취하는 자들은 이 과정에서 이들이 경험하고 얻은 것을 간단하게 무시하고 결과만을 독점하였다. 하지만 착취를 당하는 이들에게는 착취하는 자들이 눈도 돌리지 않은 것, 즉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이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고 향유했던 감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삽질과 열정은 다시 자본이 착취할 수도, 교환할 수도 없는 ‘순수한 유희’에서 만난다.
⇒20대들에게 열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모른다. 학교에서 그런 걸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잉여인간이 된 20대들은 돈도 되지 않는 것에 열정을 쏟는다. 그걸 삽질이라고 한다. 그들은 재미를 추구한다. 그런데 자기만족을 넘어서 남들에게까지 기쁨을 주는데서 재미를 찾는다.(나꼼수 같은 것?)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은 ‘열정’이다 그러나 사회는 20대들의 열정의 결과만을 바란다. 패배감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20대들도 많다. 열정과 삽질은 ‘순수한 유희’라는 측면에서 공유가 된다. ‘재미’가 중요하다.
<조금 긴 결론> 다시 교실에서
(240) 우리가 이들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들이 생각 없이 살아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각, 즉 성찰은 성장의 지표이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말은 곧 이들이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옮겨간다. (중략) 그러나 나는 이 글의 전체를 통해 이들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르게 경험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안 보일 뿐이었다. (중략) 예를들어 열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일요일을 금요일처럼 살아야 한다’는 윤리를 가진 우리의 눈에 ‘금요일을 일요일처럼 살겠다’는 그들은 철딱서니 없는 놈팽이로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일요일을 금요일처럼 사는’우리야말로 여전히 삶의 생존에 묶어두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동물’일 뿐이다. 우리가 20대들을 두고 아이템이나 탐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비난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유리야말로 생존에 묶인 동물인 셈이다.
(261)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고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이 환대를 통하여 나는 그와 함께 ‘세계’를 만든다. 세계는 소통하고 경쟁하고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에 차 있을 때 세계-내-존재(세계와 함께, 세계 내에서, 세계를 마주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공감, 공진. 요새 많이 쓰는 말이다. 갈수록 복잡하고 다양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단어들이다. 그런데 나는 살아가면서 20대들과 소통하기 보다는 이제 스무살 초입에 들어선 제자들과 곧 20대가 될 10대들을 만나고 소통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261쪽의 발췌문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내 안에서 그들을 영접하며 동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곧 인간적인 삶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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