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풍경

다산의풍경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정약용 (돌베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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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을 읽고

머나먼 인생길 나그네처럼
평생을 갈림길에 서 있네
유가의 경전 본래 좋아했고
제자백가도 두로 알고 싶었지.
의분을 품고 병서를 읽으며
길이 한번 떨칠 생각을 하다가
이 마음 참 분수 모른다 싶어
책 덮고 긴 한숨을 쉬네.
호방한 선비 가까이 않는 건
날 이용할까 걱정해서고
못난 사람 가까이 않는 건
날 모범 삼을까 두려워하니
초연히 내 갈 길 홀로 간다면
그런대로 이 마음 편안하겠지.
--> 젊은 시절 다산의 이상과 젊은 혈기가 느껴지는 시이다. '의분을 품고 병서를 읽으며 길이 한 번 떨칠 생각을 하다' 이 대목에서 특히.


송충이
그대는 보지 못했나 천관산 가득한 소나무
천 그루 만 그루가 뭇 봉우리 뒤덮은 걸.
울창하고 강인한 노송(老松)에다
어리고 예쁜 다복솔도 퍼져 있는데
하룻밤 새 송충이가 천지에 가득 차
입으로 인절미 먹듯 소나무를 갉아먹네.
처음 모습도 새까맣게 밉더니
노란 털 붉은 반점 더욱 흉해지네.
처음엔 뾰족한 잎을 먹어 수액을 말리고
나중엔 껍질을 갉아 상처와 옹이를 만들지.
날로 말라 가지 하나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곧게 서서 죽는 모습 어찌 그리 공손할까.
두꺼워지고 비틀린 가지 슬피 바라보나니
상쾌한 바람 짙은 그늘 어디서 찾겠나.
하늘이 소나무를 기를 때 깊은 뜻이 있어
사시사철 보살피기를 한겨울도 없었지.
모든 나무 가운데 큰 사랑 받았으니
설마 복사꽃 오얏꽃과 화려함을 다퉜겠나.
종묘(宗廟)와 궁궐이 무너지면
대들보 기둥 만들어 조정으로 보내고
()와 유구(流求)가 함부로 날뛰면
커다란 쌍움배 만들어 기세 꺾으려 했는데
송충이의 욕심에 다 죽어 버려
말을 열자니 열이 치솟네.
어떡하면 천둥신의 벼락도끼를 얻어
네놈들 잡아다 이글이글 용광로에 넣어 버릴까.
--> 송충이가 소나무를 핍박하는 모습이 어쩜 이리도 생생하게 묘사되었는지. 마지막 '말을 열자니 열이 치솟네~ 용광로에 넣어 버릴까'에서 가슴 속에 타오르는 다산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호박 훔친 종
열흘 장맛비에 다니던 길 사라지고
성중(城中) 가난한 골목엔 밥 짓는 연기 사라졌네.
태학(太學)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문전(門前)부터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
들어 보니 쌀 단지 빈 지 몇 날이 되어
호박죽을 쑤어 끼니를 때웠는데
어린 호박은 다 따 먹어 어쩌지 못하고
늦게 핀 꽃은 지지 않아 열매를 안 맺었기에
옆집 밭의 단지만 한 커다란 호박을
어린 종이 몰래 엿보다 훔쳐 왔는데
주인 위해 한 일이건만 도리어 역정을 사서
누가 널 이리 가르쳤나 호되게 매를 맞네.
어허, 아이는 죄 없으니 이제 그만 화 풀고
이 호박은 내 먹으리니 더 이상 말을 마오.
밭 주인한테 솔직히 얘기하는 게 낫지
오릉중자처럼 결벽한 건 싫다오.
나도 언젠간 출세할 날 있겠지만
그게 안 되면 가서 금광이나 파야지.
책 만 권 읽는다고 아내가 배부르랴
이 경()이면 아이종도 그런 일 안 할 텐데.
*오릉중자 : 형이 의롭지 못한 녹을 받는다 하여 형과 어머니를 피했던 결벽한 인물이다.
*경은 3천 평 정도에 해당하는 넓이이다.
--> 어린 종을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 그리고 다산의 가난한 가정형편, 그리고 당시 무능하게 글만 읽었던 고매한 선비들과는 다른 '금광이나 파야지, 책 만 권 읽는다고 아내가 배부르랴'라는 생각이 인상적이다.


굶주리는 백성
우리 인생 풀과 나무와 같아
물과 흙으로 살아간다네
힘써 일해 땅엣것을 먹고 사나니
콩과 조를 먹고 사는 게 옳건만
콩과 조가 보석처럼 귀하니
무슨 수로 혈기가 좋을소냐.
야윈 목은 고니처럼 구부러지고
병든 살은 닭 껍데기처럼 주름졌네.
우물이 있어도 새벽에 물 긷지 않고
땔감이 있어도 저녁에 밥 짓지 않네.
팔다리는 그럭저럭 놀리지만
마음대로 걷지는 못한다네.
너른 들판엔 늦가을 바람이 매서운데
저물녘 슬픈 그러기는 어디로 가나?
고을 원님이 어진 정치를 하고
사재로 백성 구휼한다기에
관아 문으로 줄지어 가
끓인 죽 우러르며 앞으로 나서네
개돼지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것을
사람이 엿처럼 달게 먹는구나
어진 정치는 기대도 않았고
사재 털기도 기대치 않았네
관아의 재물은 꽁꽁 숨겼으니
어찌 우리가 여위지 않겠나
관아 마구간의 살찐 애마들은
실은 우리의 살이라네
슬피 울부짖으며 관아 문을 나서
두리번두리번 갈림길만 헤매네
잠시 누른 풀 언덕에서
무릎 펴고 우는 아이 달래고
고개를 숙이고 서캐를 잡다가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리네.
--> 세 편의 연작시 중 첫 번째이다. '애절양'은 그 사건의 놀라움으로 슬프고 애통하지만, 당시 굶주리는 백성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할 뿐만 아니라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를 달래며 서캐를 잡다가 눈물을 흘리는 부분에서는 비통한 느낌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단비
모가 말라 농부가 애타면
군자의 마음도 아프다네.
아이가 병들었을 때
엄마 맘이 타들어 가듯이.
물기 없는 두레박이 밤새 삐걱대고
숱한 이들 우물가에 붐벼도
뜨거운 가마솥에 물 몇 방울처럼
힘만 들고 결과는 신통치 않네.
눈앞에 큰 강이 보이건만
물길 끌어 오기가 너무 힘들어.
하늘의 마음은 끝내 인자하고 따뜻해
차마 제 힘을 아껴 두지 못하고
남풍으로 바다 기운을 몰아와
비구름으로 산등성이를 덮었네.
쏟아지는 비가 천지를 흔들고
골짜기마다 작은 폭포가 걸렸네.
낮은 논은 넘치는 물 쏟아 내고
높은 논은 두둑을 든든히 쌓고.
써레 쟁기 들판에 나와
모내기 노래 즐겁구나.
내 지금 절에 머물며
집 떠나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이요
부평초처럼 고단하게 떠돌며
세상에 등 돌린 외로운 신세라네.
혼자라야 진정한 기쁨을 안다지만
내가 봐도 나는 참 어리석다오.
한평생 백성 걱정
곤궁 속에서도 떨치지 못하네.
임금께서도 정무에 바빠 끼니를 거르시는데
현미밥인들 어찌 나만 편히 먹겠나.
풍년 들어 백성이 기뻐하면 이 죄인도 얼굴이 펴질 텐데.
이내 처지 저 모와 같으니
마른 것이 모두 살아났으면 좋겠네.
뎅뎅 저녁 종 울리면
스님 따라 절인 나물에 밥 먹어야지.
-->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드라마틱하게 영상처럼 펼쳐지는 시이다. 다산의 마음에 감정이 몰입되어 따라가다보니 걱정과 긴장, 감동의 격정, 여유로움까지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담배
육의 <다경>도 좋고
유령의 <주덕송>도 대단하지만
지금 새 담배가 나와
귀양 온 객과 제일 친하다네.
살짝 빨아들이면 매캐한 향이 나고
조금 내뱉으면 간들간들 실과 같네.
객지의 잠자리는 늘 편치 않고
봄날은 또 지루하기만 해라.
-
-> 기나긴 유배생활을 술보다 담배에 의지한 다산의 고독함이 느껴지는 시이다.


모기
사나운 호랑이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드르렁 코골며 잘 수 있고
긴 뱀이 처마 밑에 매달려 있어도
누워서 꿈틀대는 것 볼 수 있지만
모기 한 마리 앵앵거리는 소리 귓가에 들리면
기겁하여 간담이 서늘하고 애가 탄다네.
뾰족한 입 박고 피를 빨면 그만이지
뼛속까지 독한 기운 넣는 건 어째서인가.
면 이불 꽁꽁 덮고 이마만 내놓으면
금세 올록볼록 혹이 돋아 부처님 머리가 되고
내 뺨을 내가 쳐 봐도 헛손질이요
허벅지를 재빨리 때려도 이미 늦었네.
열심히 싸워 봐야 소용없고 잠만 설치니
기나긴 여름밤이 일 년과 같구나.
너는 안 보일 만치 작고 하잘 것 없으면서
왜 사람만 보면 그렇게 달려드는 거니?
밤에 다니는 건 도둑한테 배운 거고
피를 먹는 건 옛날의 제사를 따르는 건지.
그 옛날 규장각의 교사로 있을 때엔
그 앞에 청송과 백학이 벌여 있었고
6월가지 파리도 날리지 않아
푸른 대자리에서 편히 쉬며 쓰르라미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흙바닥 볏짚 자리
내가 너를 부른 거지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니.
--> 사나운 호랑이나 뱀을 보고도 무섭지 않으나 작은 모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다산의 모습이 무척 우스꽝스럽게 그려졌다. 마지막에 '내가 너를 부른 거지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니' 부분에서 작은 생물에 대한 따뜻한 마음까지 엿볼 수 있다.


어린 아들
얼굴이 예쁜 어린 내 아들
날이 흐려도 날이 맑아도 걱정이 없네
따스한 풀밭을 달리는 송아지처럼
과일 익을 무렵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처럼,
언덕 위의 집에서 쑥대 활 쏘고
냇가 웅덩이에 풀잎 배 띄운다네.
세상의 어지러운 사람들은
너와 함께 뛰놀 수 없으리.
--> , 산하 생각이 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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