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 우리의 비밀 과외(이민항)

독서 모임에서 모모와 함께 읽기로 한 책이었는데 모임 날짜를 잘못 파악해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참석했다. 이 책에 대한 동료들은 학급 학생 수만큼 구입해 한 학기 한 권 읽기책으로 차분히 읽어 보고 싶다고 했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를 맥락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시가 어떤 장르인지, 우리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며 이 책을 읽고 영화 동주까지 이어서 보면 수업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겠다고도 했다. 어떤 책인지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다.

 

소설의 배경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시기였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아버지에게 윤동주가 찾아와 인쇄를 의뢰했지만 우리말 출판물을 발간하기 쉽지 않은 시기라 아버지는 인쇄비의 일부로 딸인 한을순의 과외를 부탁한다. 그런데 을순은 일본 선생님에게 하이쿠를 잘 쓴다며 문학제 응모를 추천받게 된다. 을순은 윤동주에게 비밀 과외를 받으면서 시를 쓰는 법을 너머 왜 우리말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광풍 속에서 일제의 억압이 극에 달하며 우리말과 민족을 지키려는 아버지, 윤동주, 한을순의 반란이 가슴 뜨겁게 울린다.

 

*인상 깊은 구절

(15) 이름은 사람에게 붙이는 제목 같은 것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일하러 간 작은아버지는 이름을 승주에서 스티븐으로 바꾸었고, 연해주에 독립운동하다가 지금은 소식이 끊긴 외삼촌은 이름을 경호에서 니콜라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들의 정신은 사랑 있지만, 그들이 죽고나면 이름은 끊어지고 말은 옅어질 것이다. 내가 처음 들은 말이자 어머니에게 들은 유일한 말은 나라 이름 순이다. 그 이름에서부터 나의 모든 말이 시작된 것이다.

창씨개명을 눈앞에 두고 제 이름을 고수하려던 당시 사람들의 엄숙한 마음이 전해진다. 생존과 투쟁을 위해 모국어를 지워야 했던 유랑의 역사 속에서, 어머니가 남겨준 이름 ()’을 붙잡는 행위는 일제가 결코 지울 수 없었던 민족적 정체성의 최후 보루였을 것이다. 이름은 단지 기호가 아니라, 한 인간의 정신을 담는 제목이라는 말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23)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 몰래 무리가 나뉘어 있다. 몰래 조선말을 쓰는 아이들은 말 안 드는 조선인이라는 뜻의 ‘불령선인’, 일본말로는 ‘후테이센진’이라 불리고,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는 아이들은 황국인 일제의 모범생이라는 뜻으로 ‘황국범생’이라고 불린다.

불령선인은 일제가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조선인을 비하하기 위해 낙인찍은 용어인데, 여기에 작가는 황국범생이라는 현대적 뉘앙스의 단어를 대치시켜, 1941년 교실 안의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요즘 중학교 교실에서도 다양한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아마 그 무리 사이의 대립에도 다양한 맥락이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84) “순이 학생에게 조선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글쎄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말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는 생각해요. 말의 시작은 누군가가 나를 처음 부르는, 나라는 단 하나의 뜻을 지닌 '이름'인 것 같고, 그 끝은 내가 누군가를 나중에 부르는, 같은 단어라도 여러 뜻을 지니는 ''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조선말은 제 말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식민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피지배국의 언어를 빼앗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말과 민족의 깊은 관계를 이토록 아름답게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나를 증명하는 이름에서 출발해, 세계를 다채롭게 품어내는 로 확장되는 언어의 우주.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총칼이 아니라, 우리말의 시작과 끝을 온전히 살아내는 정신 그 자체였음을 깨닫게 된다.

 

(116) "일단 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바라봐. 그런 다음 그 느낌을 보는 그대로 표현하거나, 친근한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

이 책에서 순이가 선생님(윤동주 시인)에게서 배운 시를 표현하는 방법을 자신과 같은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황국범생인 조소명에게 알려주는 부분이다. 독자에게 시를 써 보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부분일 수 있겠다. 시인은 먼저 보는 대로 표현하기(48), 빗대어 표현하기(58),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기(100)를 권한다.

 

 

(155) 말이 무르익는 시간. 선생님이 바라던 시간은 기어코 왔다. 매서운 추위와 세찬 장맛비와 찌는 듯한 무더위를 견디고, 선선한 가을바람에 감이 익어 가듯. 모든 것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가랑비에 옷이 젖듯 천천히.

광복 후 10년이 흐른 1955, 지리산 자락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을순에게 윤동주의 유고시집이 전달되는 후반부의 문장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을순이 초반에 썼던 하이쿠, “감꼭지가 눈동자처럼 하늘을 본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모진 바람에 감이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주던 1941년의 ‘감꼭지(비밀 과외)’가 있었기에, 14년이 지난 지리산의 교실에서 아이들의 언어와 주체성이 감처럼 붉고 달콤하게 무르익을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교육이 거둘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성숙한 승리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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