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창덕궁, 창경궁, 낙산공원, 종묘와의 만남

작년부터 두 아들에게 나와 아내의 생일 선물로 독후감을 제안했다. 읽고 싶은 책은 스스로 선택하거나 우리가 추천한 책을 읽기로 했는데, 이번 내 생일 독후감으로 추천한 책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였다. 큰아들이 재미있게 읽었다며 독후감을 보내왔고, 창경궁 대온실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수능 연휴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창덕궁과 창경궁을 찾았다.

여행 일주일 전 '창덕궁 후원' 예약에 도전했으나, 보안문자를 입력하느라 잠깐 뜸 들이는 사이 자리가 매진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11월 14일 토요일 창덕궁으로 향했다. 돈화문이 계속 공사 중이어서 대신 '금호문'을 통해 입장했다. 금호문은 조선 시대에 주로 승지나 사헌부 관원들이 드나들던 서쪽 문인데, 이곳을 통해 늦가을 아침의 고궁으로 발을 들여놓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창덕궁, 아는 만큼 보이는 새로운 세상

우리 가족은 규장각을 지나 여러 전각을 살펴보며 여유 있게 고궁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전각들 사이로 파란 하늘과 붉은 단풍이 배경으로 깔리는 창덕궁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 멋진 배경 속에 가족들의 모습을 담으며 이곳저곳에 추억을 남겼다.

창덕궁의 중심 전각인 '인정전' 주변에는 해설사를 따라다니는 외국인 무리가 가득했다. 영어, 일본어, 한국어가 곳곳에서 들려오는 모습을 보며 K-컬처의 위상을 실감했다.

인정전을 둘러보던 중, 둘째 아들이 전각 주변에 놓인 거대한 물항아리 '드므'를 발견하고 안내문을 주의 깊게 읽었다. 드므는 불을 다스리는 화마(火魔)가 항아리 속 물에 비친 제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치게 하려고 설치한 상징적인 방화 도구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덕분인지, 둘째는 이후 창경궁 전각 주변에서도 드므를 아주 잘 찾아내곤 했다. 확실히 뭔가를 알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더 열리는 법이다.

 

규장각. 10여 년 전,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란 드라마를 재미 있게 보았다. 2편이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궁궐에 이렇게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니.
인정전과 선정전 사이의 공간. 눈으로 볼 걸 사진으로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멀리 청색 기와 '선정전'

 

인정전을 지나 마주한 청색 지붕의 '선정전'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선정전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돌보던 편전인데, 현재 궁궐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기와 전각이라 그 푸른빛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창경궁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싱싱하게 감이 달린 감나무 두 그루가 보였고, 그 근처에서 '낙선재'를 만났다.

낙선재는 아들이 읽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에서도 언급되는 중요한 공간이다. 현재는 창덕궁 영역 안에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창덕궁에 속할 때도 있었고 창경궁에 속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는 조선의 마지막 왕실 가족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화려한 단청을 칠하지 않아 사대부 주택처럼 차분하고 정갈한 멋이 있다.

우리 가족은 책 내용에 따라 낙선재 아궁이 근처에 있는 얼음이 깨진 모양의 '빙렬문 방벽'을 함께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단이 높아 주변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낙선재 건물과 주위를 빙 둘러싼 부속 건물들, 그리고 건물 뒤꼍의 가파른 계단식 화계에 심어진 나무들까지 차분히 둘러보았다. 찾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지어진 구조 덕분인지 잠시 앉아 사색을 즐길 만한 곳이 많았다.

 

창경궁, 단풍에 물든 동궐의 기억

낙선재를 나와 창덕궁 후원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삼거리에서 창경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바람의 방향을 재던 '풍기대'가 있는 이 길은 전통 한옥의 곡선과 저 멀리 보이는 현대식 빌딩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서울 특유의 조화로운 미학이 잘 드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오늘 산책의 주 목적지인 '창경궁 대온실'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지난 7월에 왔을 때는 무더웠으나 나무 그늘 덕에 걸을 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마주한 창경궁의 단풍이 이토록 예쁜 줄은 처음 알았다. 나중에 출근해서 창경궁 단풍 이야기를 꺼냈더니, 나보다 두 살 연배인 교감 선생님께서도 옛날에 거기서 웨딩 촬영을 하셨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창경궁 단풍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명소였다.

 

대춘당지의 가을
늦가을 대온실의 풍경에는 큰 변화가 없다
창경궁의 단풍. 정말 아름다웠다.
창경궁의 백송과 단풍나무

 

아름다운 단풍을 완상하며, 지난 7월에는 작열하는 햇볕 때문에 차마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창경궁의 핵심 전각들을 찾아 이동했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조선의 제3의 궁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정치를 행하는 업무 공간보다는 대비나 후궁 등 왕실 가족들을 위한 생활공간으로 주로 쓰인 덕에 공간 배치가 한결 여유롭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창덕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건물의 방향 또한 동쪽을 향하고 있어 '동궐(東闕)'이라 불리기도 한다.

먼저 마주한 '명정전'은 다른 궁궐의 근정전이나 인정전처럼 국조의 큰 행사를 치르던 정전으로, 마당에 품계석이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정전들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된 것들이지만, 창경궁 명정전은 광해군 때 중건된 건물로 조선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고 한다.

 

명전전
함인정. 넓은 앞마당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하던 곳이라고 한다.
양화당과 집복헌 사이 너른 바위.

 

이어 문정전, 숭문당, 함인정, 양화당 등에 얽힌 설명을 읽으며 걷다 '집복헌'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창경궁의 옛 모습을 기록한 자료들을 마주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수많은 전각을 헐어내고 '창경원'이라는 동물원과 놀이시설을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참 부끄럽고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어린 시절 수원에 살 때 동물을 보러 창경원에 왔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상처를 딛고 본래의 궁궐로 복원된 지금의 모습을 보니 다행스러우면서도 문화유산 보존의 소중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민중의 삶과 역사가 흐르는 성곽길

대학로 식당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은 뒤, 곧바로 '낙산공원'으로 향했다. 낙산공원은 평소 아이들이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뒤늦게 알게 된 장소다.

'낙산'이라는 이름에서 산성이겠다 생각은 했지만 대학로에서 낙산공원 입구까지는 대체로 평지였다 갑자기 오르막 골목길을 만난다. 표지판을 보고 나무 계단을 정신없이 오르다 보면 '낙산공원 한양도성 성곽길'이 시작되는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대학로, 혜화역 입구에서 낙산공원 입구 앞까지.
도심에서 산길이 가까운 것도 우리나라의 특색인 것 같다.

 

쉼터 겸 운동기구가 있는 이 지점에서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내부 순성길이 끝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낙산공원 놀이광장' 또는 외부 순성길과 연결된 암문(통로)까지는 상당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한숨 돌릴 때 즈음,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낯익은 장면과 함께 포토존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셀카봉을 열심히 펼치고 있으려니, 친절하게도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먼저 제안해 주시는 분이 계셨다. 덕분에 멋진 가족사진을 남기고, 우리도 그분들의 사진을 정성껏 찍어드린 뒤 성곽길을 기분 좋게 올랐다.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내부 순성길'
'케이팝 데몬 헌터스' 촬영지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가는 길. 외부순성길, 성곽, 내부순성길이 함께 보인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멀리 북악산과 북한산이 모인다. 단풍도 예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도 예쁘다.

 

이 성곽은 태조 때 처음 쌓은 이후 세종 대왕, 숙종 대왕 시기를 거치며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다듬어 이어져 온 한양도성의 일부라고 한다.  가만히 보면 시대별로 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른데, 숙종 때 쌓은 성 돌은 규격화된 정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어 성벽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역사 교과서 같다. 현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거쳐 지금의 낙산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성벽 안과 밖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암문도 있었는데,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하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부순성길과 외부순성길을 연결하는 암문
암문 밖 외부순성로. 위아래 외부순성로 사잇길은 한성대로 가는 길
낙산공원 입구. 여기까지 종로구 마을버스가 올라온다.
낙산 정상에서 '낙산 놀이광장' 쪽 풍경
흥인지문까지 연결된 내부순성로

 

이 성곽길은 동대문 DDP까지 길게 이어지지만, 우리 가족은 다시 대학로로 통하는 길을 선택해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목에 만난 '낙산전시관'에 들러 낙산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조선 시대의 모습부터,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 속에서 난개발로 훼손되었던 아픔, 그리고 1960년대 가파른 산자락을 가득 채웠던 판자촌의 풍경과 이후 지금의 공원으로 복원되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시절을 치열하게 살아냈던 민중들의 삶과 투쟁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낙산정. 서울 시내가 잘 보인다.
낙산 공원 '중앙광장'과 '낙산 전시관'

 

종묘, 단조로움 속에 감춰진 압도적인 규모와 장엄함

낙산공원에서 내려와 혜화역 근처의 개성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고 대학로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문득 요즘 서울시의 종묘 앞 개발 추진과 관련해 문화유산 보존 논란이 한창이라는 뉴스가 떠올라, 내친김에 '종묘'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대학로에서 종묘까지는 충분히 걸어갈 만한 거리였지만 하루 종일 걸은 탓인지 시간은 제법 걸렸다.

오후 4시 30분 무렵 종묘 매표소에 도착해 줄을 섰다. 그런데 직원들이 관람 마감 시간이 5시 30분이라 종묘의 넓은 경내를 다 둘러보기 어려우니 다음에 다시 오라며 은근히 관람 포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 뒤로 표를 사려던 사람들이 모두 발길을 돌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에 사는 우리 가족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에 한 번 오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서울에는 볼 곳이 아직도 너무나 많지 않은가.

간곡한 마음으로 마지막 표를 간신히 구입했다. 내가 표를 받자마자 매표소 창구가 탁 닫혔다. 서둘러 입구로 달려갔으나 이미 문이 닫혀 있었는데, 다행히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출구 쪽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종묘의 경내로 들어서니 돌로 정성스레 깔린 '삼도(三道)'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궁궐의 삼도는 가운데 길이 왕이 걷는 어도(御道)다. 하지만 이곳 종묘의 삼도는 전혀 다르다. 가운데 박석이 거칠고 높게 솟은 길은 혼령이나 신이 걷는 '신로(神路)'이고, 왼쪽은 왕, 오른쪽은 왕세자가 걷는 길이다. 살아있는 왕조차 죽은 선대 왕들의 영혼을 위해 길을 양보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도 예법을 갖추어 가장자리 길을 따라 엄숙히 걸어가다 마침내 '정전'을 마주했다.

정전 앞에 서자마자 단조로우면서도 압도적인 규모에 깊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기둥이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의 미학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웅장함을 자랑한다. 조선 왕조의 역사가 지속되면서 기존의 정전만으로는 신위를 다 모실 수 없게 되자, 옆에 '영녕전'을 추가로 건축하여 규모가 계속 커진 결과물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정전은 재위 기간에 큰 업적을 남긴 왕과 왕비를,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조천(옮겨옴)된 왕과 왕비들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두 곳 모두 신성한 공간인 만큼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었다.

조용한 경내에 관람 마감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주기적으로 울려 퍼졌다. 급하게 빠져나가는 관람객들의 발걸음 뒤로, 정전 앞의 넓은 월대가 한산하고 고요하게 가라앉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5시 30분 마감 시간까지 남은 여유를 즐기며 차분히 걸어 나오다, 입구 근처 향대청에서 '공민왕 신당'을 발견했다. 조선 최고의 사당인 종묘 안에 이전 왕조인 고려의 왕을 모시는 신당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고 특이했으나, 마감 방송이 크게 울리고 11월의 짧은 해가 저물어 가고 있어 깊이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영녕전 정면
영녕전 오른쪽 부분.
영년전 입구
영녕전에서 정전(왼쪽), 입구(오른쪽)로 가는 길
영녕전에서 정전으로 가는 길에서 본 정전
정전의 모습
정전 오른편으로 보았을 때.
망묘루 앞 중지당. 천원지방 형태의 연못으로 중앙 섬에 향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외대문. 오후 5시 30분 종묘 입구.

행을 정리하며

하루 만에 창덕궁, 창경궁, 한양도성(낙산공원), 그리고 종묘까지 서울의 핵심 문화유산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스마트폰의 만보기를 확인하니 어느새 3만 보를 훌쩍 넘겨 있었다.

이번 여정은 아들이 읽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책에서 시작해,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배경을 찾아가고, 최근 뉴스에서 접한 도심 개발과 문화유산 보존 논란이라는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이어졌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곳을 다니느라 한곳을 아주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와 현대가 치열하게 공존하는 서울의 참모습을 온 가족이 함께 온몸으로 느낀 뜻깊은 하루였다. 이번 여행은 이렇게 갈무리하고, 다음번에는 다른 계절에 한 곳씩 찾아가 조금 더 오래, 자세히 눈맞춤을 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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