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의 자취를 따라 걷는 창경궁과 창덕궁

김금희 작가의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고 난 뒤, 소설의 주 무대인 창경궁 대온실과 그 일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마침 서울에서 전국국어교사모임 이사회가 있어 조금 서둘러 기차에 올랐다. 11시 40분 무렵 용산역에 도착,바로 버스로 창경궁 매표소로 향했다. 7월 초순의 서울 도심은 36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
옥천교와 명정문
명정전. 조선 시대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창경궁 춘당지와 대온실

명정문을 지나 명정전 쪽을 바라보니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간도 촉박한 데다 가지고 온 부채 하나로는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기에 턱없이 부족하여 곧장 대온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창경궁의 우거진 산림 덕분에 그늘이 많아 걷는 길이 그리 고되지 않았다.

 

창경궁에서 대온실 가는 길

 

숲길 끝에 펼쳐진 춘당지(春塘池)를 마주하자 묘한 감상이 밀려왔다. 둘째 민주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전, 산하와 함께 이곳을 찾았던 옛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영두와 리사가 겨울날 이곳에서 스케이트를 탔다는 대목을 떠올려보았다. 문화재 한복판에 있는 이 넓은 연못이 통째로 얼어 스케이팅을 한다는 것이 조금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찰나, 춘당지 왼편으로 돌아가자 이어진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이 정도 크기라면 겨울에 물이 얼어 정말로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었겠구나 싶어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창경궁 춘당지. 북악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이루어진 연못으로 큰 춘당지.
작은 춘당지. 춘당지는 대온실 쪽 '작은 춘당지'와 이어진 '큰 춘당지'로 이루어져 있다.

 

몇 걸음 더 옮기자 푸른 나무들 사이로 하얀색의 창경궁 대온실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서양식 정원 구조와 어우러진 하얀 유리 건물의 풍경은 아늑하면서도, 격동의 근대 유적이 가진 특유의 쓸쓸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1909년에 완공된 이 대온실은 일제강점기 황실을 위로한다는 명목하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며 지은 제국주의의 잔재이자, 우여곡절 끝에 철거를 면하고 살아남은 '생존 건물'이기도 하다.

 

창경궁 대온실 입구. 일제 강점기 때 대온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졌을까.
대온실 정면과 안쪽에서 바라본 대온실
대온실 내부
대온실 내부. 대온실 북쪽에 잇닿아 있는 부속 건물에 설치된 강의실
대온실의 중앙, 입구를 바라본 풍경
대온실의 뒤편. 대온실에 붙어 있는 부속 건물이 소설 속 사건의 배경이 되지 않을까.
대온실 서편 입구

 

여름날의 유리 온실 내부 역시 소설 속 묘사만큼이나 뜨거웠다. 내부를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며 소설에서 대온실 보수공사 중 발견되는 '지하 배양실' 공간을 머릿속으로 찾아보았다. 물론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공간이지만, 대온실 내부에 '강의실'로 조성된 어두운 음지가 묘하게 그런 음습하고 은밀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온실을 나와 뒤편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구석진 외곽 역시 무언가 비밀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공간에 서사를 입힌 작가의 상상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창덕궁 낙선재

대온실을 뒤로하고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를 향해 숲길을 걸었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산림 사이를 걷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다. 길 중간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바람 관측대인 '풍기대'를 지날 무렵, 창덕궁의 고풍스러운 기와지붕과 저 멀리 도심의 고층 빌딩, 그리고 남산타워가 한 프레임에 함께 들어왔다. 과거와 현대가 정답게 공존하는 서울이라는 도시만의 독특한 미학이 드러나는 풍경이었다.

 

앙부일구와 풍기대
창경궁과 서울N타워
창경궁과 서울N타워를 조금 더 멀리에서.

 

함양문 앞에서 창덕궁 입장권을 새로 구입한 뒤, 성정각을 왼편으로 돌아 곧장 낙선재로 들어갔다. 낙선재는 단청을 칠하지 않아 화려한 궁궐이라기보다는 단정한 사대부의 집 같은 인상을 준다. 겹겹이 둘러싸인 행랑채와 건물 뒤편의 계단식 옹벽(화계) 구조 때문인지 아늑한 주택의 정취가 더 강하게 풍겼다. 마침 곁을 지나던 해설사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니, 이곳은 조선의 마지막 황실 가족들이 실제로 1989년까지 거주했던 공간이라고 했다. 그 후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니 공간이 한결 가깝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낙선재 구들 근처로 다가가 벽면을 세심히 살폈다. 드디어 소설 속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깨진 얼음 모양의 '빙렬문(氷裂紋) 방벽'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빙렬문은 화재를 막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불의 상극인 '얼음이 깨진 무늬'를 기와 파편으로 정교하게 수놓은 장식 벽이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책을 읽고 오지 않았더라면 그저 평범한 담장인 줄 알고 무심히 지나쳤을 조그만 디테일이었다. 문학의 시선을 빌려 공간을 들여다보니, 박제된 문화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역사와 인물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만져지는 듯했다.

 

낙선재 내부
낙선재 현판
낙선재 후원 풍경

 

이사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창덕궁은 큰길을 따라 서쪽 출입구인 금호문까지 곧장 걸어 나왔다. 날이 더워 통인시장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통인시장 안에서 냉면을 먹으며 독서모임 단톡방에 청명한 하늘과 초록의 숲이 눈부시게 담긴 창경궁과 창덕궁의 사진들을 몇 장 공유했다.

비록 36도의 폭염 속에서 긴박하게 이루어진 문학기행이었지만 토요일, 회의 참석을 위한 서울 여행의 부담을 살짝 줄여준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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