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벌점제를 실시하며
- 행복한 글쓰기/가르치고 배우며
- 2009. 6. 8.
학생부장은 계속 할 일이 아니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외에, 사람을 만날 수록 상처와 화가 나를 잡아 먹기 때문이다. 교사는 해마다 새로운 아이들, 같은 아이라도 발달 과정에서 새롭게 만나는 아이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긴장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행복하고 선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올해, 학생부장을 연속하기 부담스러운 이유는 새로운 것보다 고정된 관계의 지속에 있었다. 아이를 지도하는 과정의 다양한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역할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올해는 학년이 시작하기도 전에 학교생활규정과 그린마일리지 등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진행할 일이 많았다. 요새 같은 상황에 이런 일들이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을지 참으로 고민되었다. 3월 24일 학교생활규정 개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 보겠다며 블로그에 쓴 글은 그런 우려였다.
이후, 4월 10일을 전후로 해서 학교생활규정의 쟁점사항을 정리해 교사, 학생, 학부모 대상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 결과는 거의 예상한 대로 나왔다. 다만 체벌에 대한 찬성이 세 주체 모두 반대보다 높게 나왔고, 체벌을 찬성하면서 상벌점제에 대해서도 찬성한다는 의견이 과반수를 넘어, 상벌점제 실시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문조사는 서로의 입장차를 확인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집단 내 구체적인 의견을 수치화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체벌의 대안으로 상벌점제를 실시해 보려한다는 취지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설문조사 결과를 교실에 게시하고 홈페이지에 탑재한 후 중간고사 마지막 날인 5월 14일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대토론회는 수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나름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주체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학교생활규정 제개정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학교생활규정 제개정위원회는 교사, 학생, 학부모 대표 각 3명씩 구성했다. 학생 대표는 전교대의원회의를 두 차례 정도하면서 의견 수렴과 함께 선거 끝에 대표를 선출했다. 교사 대표 역시 생활규정에 대한 난상 토론 끝에 3명을 선출했으며, 학부모 대표의 경우 가정통신문을 참여를 독려했으나, 위원으로 나서는 분이 없어 학부모 학교운영위원을 대표로 위촉하게 되었다.
5월 20일 제개정위원회를 열어 2009학년도 학교생활규정 개정안을 만들었다.
이전 규정과 다른 점은, 체벌 허용에 대한 조항을 삭제하였고, 중학교 상황에 맞게 퇴학에 대한 조항을 삭제하였으며, 학교폭력 사안과 시대에 뒤떨어진 징계 규정들을 정리하였다. 또 용의규정을 설문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교육적이라는 '기준' 속에서 구체적으로 정리하였고, 체벌에 대한 대안으로 상벌점제(그린마일리지제도)를 새로 추가하였다.
개정안에 대해 전교대의원회 의견 수렴, 교사 연수를 거쳐, 가정통신문을 통해 6월 8일부터 새로 개정된 학교생활규정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학생부가 매일 이 문제에 골몰한 것은 아니지만 두 달이 넘는 시간을 학교생활규정을 정리하고 상벌점제에 대한 의견을 모으는데 보냈다.
내부적으로 심각한 비판도 있었다. 학생들의 행동을 점수화하는 것도, 그렇게 매긴 점수를 상쇄하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이라는 비판부터, 체벌을 할 수 없으니 이것이라도 실시해야 교사의 지도가 가능하다는 의견까지. 그리고 상벌점제를 실시하기 위해 학교생활규정을 손 보면서 기존의 기준에 비해 너무 후퇴했다는 의견까지 일을 추진하는 입장에서 중심을 잡기 참 어려웠다.
그래도 나름의 절차를 거쳐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았기에 생활지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을 하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이 있다.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1. 학교생활규정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학교생활규정은 학칙이 아니다. 학칙은 관련 법에 근거하여 교육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학칙은 교칙을 근거로 학교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만든 생활규정으로 선도 내용 뿐만 아니라 포상 규정, 선거 규정 등 다양한 내용을 구체화하여 담고 있다. 학교마다 생활규정이 담고 있는 내용의 양이 다른데 그건 합의의 정도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학교의 2007년 학교생활규정 내용도 다른 학교와 비슷한데, 선도 내용과 관련해서는 선언적인 내용으로 세세하게 규정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즉 선도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부분이 많은데 시대의 흐름이라는 생각과 현실적으로 지도하기 어려운 학교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보니 생활수칙이라하여 학교에서 생각하는 규정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교사마다, 학생마다 다른 기준이 생겨나고 그럭저럭 넘겼던 부분도 있었다. 학생생활규정에 대한 개정과 그린마일리지제도를 학생생활규정에 포함하면서 생활규정의 내용에 대해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 역시 존재의 의미를 체득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 규정을 만들면서 교사 내에 학생 지도에 대해 공론화가 가능해졌다.
이것이 가장 큰 성과라 생각한다. 규정이 모호할수록 교사의 재량권이 많아진다. 작은 부분부터 생활지도라고 생각하는 교사는 훨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고, 아이들의 생활지도가 그다지 교육적이라 생각하지 않는 교사는 관대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엄격한 잣대의 교사는 '악역을 맡은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화를 가슴에 안을 수밖에 없고, 관대한 잣대의 교사는 '소극적인 저항'으로 동료교사와 '은밀한' 불화가 시작되었다.
일단 규정을 만들면서 생활지도의 가이드라인은 정리되었다. 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교사의 교육 철학은 존중받아야 한다. 또 세상은 '법'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특히 교육은 어느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없고, 교육자 스스로 교육된 결과이기 때문에 교사의 소신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학생부에는 교사의 지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들이 자주 찾아 온다. 상벌점제는 일단 벌점으로 아이들의 문제 행동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다른 지도에 대해 고민할 여지를 준다. 교사 내 학생 지도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3. 생활지도의 단계가 정리되는 것 같다.
학생부 안에서는 학생부의 역할을 '포카'에 빗대어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하는 일 모두 교육적이지 않는 것은 없지만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의 적대적인 감정이 정점을 이루어 교육적인 의미를 잃고 단지 처분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학생부는 교감-교장으로 이어지는 지도 과정에서 담임과 학년을 떠난 공식적인 문제제기의 상황을 맡고 있지만 그런 과정없이 너무 빨리 학생부가 학생을 지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학교 생활 규정이나 학생의 문제 행동이 모든 교사, 모든 학생 또는 매우 심각한 경우가 아닌, 교사와 학생의 세세한 문제일 경우 문제 해결도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일차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문제는 학생부장이 해결하기도 어렵고, 해결한다고 해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아무런 진전을 이룰 수 없다. 상벌점제의 많은 항목은 교사와 학생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개인적인 대면접촉을 통해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여러 차례 지도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없다면, 그것은 학교의 시스템이 돌아가야하는 중요한 상황이다. 학생부는 그럴 때 교사 선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단계이고 싶다.
4. 그외 우려되는 점.
지금까지 주로 이 일을 추진하는 학생부, 특히 부장의 입장에서 상벌점제의 긍정적인 점을 정리해 보았다.
상벌점제 실시 첫날 240여건의 벌점이 부과되었다. 대부분 두발과 복장 위반이었다. 전체학생수가 640여 명임을 감안할 때, 40% 정도가 적발되었다는 것이고, 40% 정도가 담임, 학생부장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첫 날이라 세세한 규정에 대한 문의도 참 많았다. 상벌점제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더 큰 문제 상황도 있었다. 실은 그런 것은 상벌점으로 처벌할 것이 아니라 학부모와 직접 통화하거나 몇 가지를 묶어 선도위원회에서 직접 논의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상벌점제가 생활지도의 만능적인 도구는 분명 아니다. 상벌점제 논의를 하면서 실시했던 학교 중에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상벌점제 이전의 교육도 교육적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벌점 항목을 최소화하고, 교사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 내용이 기초 질서와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라면 그것이 갖는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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