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들(김홍)
- 행복한 책읽기/문학의 숲
- 2026. 5. 26.

소재나 이야기 전개가 특이했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증이 계속 쌓였다. 주인공 장은 왜 납치를 당했는지, 누가 납치했는지, 갑자기 등장한 말뚝들은 무엇을 상징하며, 왜 해변에서 도시로 이동하며 나타나는지. 책을 읽어갈수록 의문이 계속 커지고 작가의 목소리도 개성적이라 읽는 재미가 있다. 표현과 내용 모두 ‘개성적’이라 뒤표지의 추천사가 8명이나 될까?
이야기는 주인공 ‘장’이 겪는 불가해한 사건들로부터 시작된다. 은행이라는 공고한 시스템의 변방으로 밀려나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장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납치를 당하고, 이와 동시에 해변에서부터 기괴한 ‘말뚝들’이 출몰하더니 도심을 향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장이 겪는 개인적인 불행과 정체불명의 말뚝들이 가진 의문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겉보기엔 미스터리한 활극 같지만, 주인공이 비극의 실체와 마주하며 마침내 방관자가 아닌 자기 이름을 지닌 주체로 각성해 나가는 성장 소설이다.
작품이 건네는 사회적 메시지가 묵직하다. 소설 속 도심을 잠식해 들어오는 말뚝들은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혹은 산업재해 등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지우려 했던 수많은 비극과 사회적 참사의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상징한다. 작가는 망각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비극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산 자들의 윤리적 부채 의식을 확인시켜 준다. 21세기식 세련된 계급 사회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살아가던 소시민들이 설명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도 서로에게 마음의 빚을 지며 기꺼이 연대할 때 비로소 세상의 거대한 벽을 설득할 수 있다는 강력한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상적인 구절
(152) “봐라, 니는…… 쌍놈이다. 반상의 법도 알제? 니 지금이 21세기 같나? 아이다. 내 볼 때 지금은 신조선이다. 신조선. 이조 말부터 쭈욱 이어지는 조선 후후기다. 태어나기를 쌍놈으로 태어나믄 죽을 때까지 쌍놈인 기고, 양반은 굶어 죽어도 양반인 기라. 니 서울서 대학 나오고 은행 들어왔다고 면천한 줄 알았나? 턱도 없다.”
✍ 주인공 ‘장’은 동기들 중에서도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사람이다. 본사 공채 중에서도 유일하게 면단위 지점에 발령받은 걸 꼬집으며 나온 말이다. 현대 사회는 겉보기에 평등한 21세기 같지만 실상은 학벌, 자본, 배경에 의해 이미 계급이 고착화된 ‘신조선’과 다름없다는 냉소적인 폭로다. 장이 겪는 무기력함의 사회적 배경이다.
(184) “세상 모든 일이 이유가 있어 일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건 그냥 사고예요.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세상의 모든 일이고요. 왜 특별히 쟝에게만큼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냥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라는 말이에요?”
✍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었고 말뚝의 출몰에 관련돼 억울해하는 장에게 세계의 불가해성을 직시하라는 조언이다. 우리도 불행히 닥치면 ‘왜 하필 나인가’라며 억울해 한다. 그런데 작가는 재난과 불행은 인과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냥 사고일 뿐이라고 한다. ‘장’과 우리 모두에게 불행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248) 누군가에게 말뚝은 전복된 선박의 선원이었고 부모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자식이었고, 길에서 죽은 청년이었으며, 정리 해고로 생명줄이 끊긴 노동자였다. 그게 전부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으로 쓰여 있었다. 지우는 사람이 기록하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 말뚝들은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산업 재해 등으로 이름 없이 사라져간 희생자들의 원혼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 의식 그 자체다. 기억하고 기억하려는 산 자들의 사회적 책무가 잘 나타나 있다.
(280) 큰 빚이 큰 부자를 만드는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저들의 것과 다르다. 아무게에도 빚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다. 서로에게 내어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눌러쓰고, 그 빚을 기억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로 언제가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 말뚝들의 원한을 풀기 위한 과정에서 자본의 논리와 다른 윤리적 빚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빚이 없어야 부유하다고 말하지만, 윤리적 세계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아무런 부채 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난한 사람이다. 타인의 슬픔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윤리적 부채의식이 세상을 바꿀 유일한 힘이다. 알면 알수록 빚이 더 생긴다.
(301) “나는 장석원이야. 장, 석, 원. 너희 아빠 친구야.”
✍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으로 평범하고 무기력해 성씨로만 불리던 ‘장’이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상적인 구절에 댓글을 달다 보니, 결국 신조선 같은 척박한 계급 사회에서(152), 불현듯 찾아오는 부조리한 불행을 마주했을 때(184), 살아남은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사회적 부채 의식을 안고(248, 280),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굳건히 연대해 나가는(301) 한 인간의 사회적 성장기로 정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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