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비밀은... 그곳에(범유진 외)

 

“마녀가 되는 주문”과 함께 책폴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우리의 비밀은...  그곳에” 제목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앞뒤 표지를 훑어보며 하나의 공간을 배경으로 세 시간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도 궁금하다. 게다가 이야기를 세 명의 작가가 협업을 통해 구성했다니... 호기심과 궁금함, 색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먼저 세 시간대(2000년 7월, 2018년 10월, 2029년 8월)의 한 장면과 삽화가 나오고, 각 시간대별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책 표지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때까지 정보가 많아 긴장감이 길어졌다(나이 탓이다).

첫 번째 2000년 7월 이야기는 세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인 ‘그곳’에 대해 설명한다. 전쟁 중에 서로의 안전을 위해 협력해서 굴을 팠지만 오히려 그 굴에 갇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여러 폭력’을 다루고 있다. 먼저 아버지나 성인들에 의한 폭력, 그리고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에 대한 학생들 사이의 집단따돌림, 법으로 원주민을 기만하는 기득권의 폭력도 나타난다. 서로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는 아이들이 모습이 연약하게 대비된다. 여러 미스터리가 등장하고 결말은 예상이 되지만 열려 있다. 많은 의문 속에 메시지가 묻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으로 다음 장을 펼쳤으나 사건이 연결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 2018년 이야기는 SNS에서 인정받고 싶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템을 찾다 또래 난민의 아픔을 알게 되고 마침 마을의 전설을 알고 있는 노인을 만나며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우정 등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이 시간대의 동굴은 ‘비밀 공간’의 역할도 ‘비밀 기지’의 역할도 하는데 댐의 역류로 잠기게 된다. 노인 내외는 어떻게 됐을까? SNS에서 알게 된 난민 소녀는? 바로 다음 장을 펼친다.

마지막 2039년 이야기도 가정폭력과 집단따돌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이야기에 비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많이 집중하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비밀 공간은 주인공에게 힘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회피했던 문제에 직면하며 적극적으로 해결해 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폭력에 있어 방관자가 가해자일 수밖에 없음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편견 없이 사람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공간을 배경으로 세 시간대의 이야기를 펼치는 책 구성에 대한 여운이 길었다. 이야기에 계속 주목하게 되고 우리에게 ‘비밀 공간’의 존재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볼 기회는 되었지만 이 설정이 이야기의 중심보다 그 외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주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 개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펼쳐지며 여러 폭력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서로를 위로하며 연대하는 안식처에 대해 집중하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안식처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꼭 실제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마음을 둘 수 있는 편지와 SNS, 그림, 식물, 현재에서 한 걸음 떨어진 시공간이나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변하지 않는...

<인상 깊은 구절>

(68) 해진은 때때로 대성이 보고 싶었다. 해진에게 오래 버텼다고 말해 준 사람은 오직 대성뿐이었다. 가끔 대성의 목소리가 떠오를 때면 해진은 체육 비품 창고에서 뺨을 간질이던 바람을 떠올렸다. 대성이 그 바람을 닮은 아이였음을, 자신도 바람이 되고 싶은 순간이 있었음을 곱씹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모른 척하지 말았어야 한다, 고.

(77) 부모는 아이를 위해 뭐든지 해. 나쁜 일은 안 해. 아빠도 내게 그렇게 말하거든요.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아이들 말을 믿지 않는 어른들은, 자기가 아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바보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나쁜 사람들이 파묻어 놓은 진실이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거예요. 고통받는 아이들이 계속 갇힌 채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나처럼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바보입니다.
-‘2000년 7월’ 중에서

 

(143) “하연아. 그 아이들을 불쌍하다고 여겨 주고, 네가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으면 돼.”
그 말에 하연의 생각이 하얗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단순한가. 불쌍하다는 식으로 정의되어 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인가. 안전한 집에,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으니, 게다가 비밀 기지라는 저 말도 안 되는 소꿉놀이를 할 정도로 여유롭게 살고 있으니, 내가 생각을 멈춰 버리면 그때부터 에피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걸까? 에피아가 저렇게 도망가다 저 애들처럼 굶거나 다쳐도 나와는 전혀, 아무런 관련도 없을까? 그저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고 하라는 것들을 잘하면 되는 걸까?

(156) “평생 한 번도 에피아를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요?”
“사랑, 우정, 그리움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
하연은 영원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영원한 것들이 눈에 보인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걸 재보려고 할 것 같았다. 애정이나 관심 같은 것들이 진짜 눈에 보인다면, 하연 스스로도 궁금해질 것이었다. (중략) 
“잊지 말아라, 사라지지 않는 무형의 흔적들은 사람의 마음에 깊이 남는 법이다.”
-‘2018년 10월’ 중에서

 

(234) “그땐 다 그랬어? 그땐 다 그렇게 사람을 미워했어? 다들 착하고 순진했었다며. 다 친하고 좋아다며!”
“그게 아니라, 그런 애는 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 네가 몰라서 그래. 그 시절엔, 다 그랬어. 분위기가.”
“분위기 핑계 대지 마. 엄마가 미워한 거잖아. 엄마가 짓밟았잖아. 엄마가 숨도 못 쉬게 만들었잖아! 엄마가 뭔데 사람을 받아들이고 말고 해!”

(239) -제니야, 안녕. 나 지오야. 너 오늘 온라인이지? 줄 게 있는데 내일은 내가 학교 못 올 거 같아. 책상 서랍에 넣어 놓을까? 아님 너희 집 우편함에 넣고 갈까? 별건 아니야. 실망하지도 몰라.
가슴이 작게 뛰었다. 뭔가를 준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이름을 부르고, 용건을 전하고, 내 생각을 묻는 짧은 문장들. 날 서지 않은 말. 나를 때리지 않는 말. 대체 무슨 뜻일까 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곱씹지 않아도 되는 말. 단어 하나하나가 그저 제 뜻 그대로 늘어서 있는 말.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아무렇지도 않은 말을 읽고 또 읽었다. 천천히, 또 빠르게.
-‘2039년 8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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