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반 뚜르게네프)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20. 2. 14.
책값 좀 아껴보겠다고 새해부터는 웬만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담양공공도서관에는 러시아 관련 책들이 작년에 비해 많이 늘어서 정독은 아니더라도 훑어보며 여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는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열린책들’은 물론이고 ‘문학동네’ 출판사는 찾을 수 없고,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만화)과 ‘고교생이 되기 전에 읽어야 할 논술 필독’이라는 부제의 신원문화사 딱 이렇게 두 권만 비치돼 있었다.
중고생 때도 읽지 않았던 중고생 대상의 책이라 기분이 좀 묘했지만(심지어 번역자 이름도 없다^^;;), 읽을수록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읽을수록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원래 제목이 ‘아버지와 아들들’이라고 하는데, 제목처럼 아버지들과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소설에서는 비슷한 품성을 가진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아르카지(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그리고 니콜라이와 같은 급으로 묶을 수 있는 파벨 페트로비치가 있겠고, 바자로프의 아버지 늙은 바자로프가 등장한다. 아들들은 아르카지와 바자로프가 있다. 이들은 논리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과거 세대 모든 것과(예술, 음악, 문학 등) 결별하려는 이른 바 ‘니힐리스트’라고 불린다.(스스로 불리기를 원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솔직히 아버지들은 자식밖에 모르고 자식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아들바라기’지만, 솔직히 무능력한 가장에 가깝다. 약간 차이가 있다면 아르카지의 아버지는 적어도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찾고 지키려는 모습이 좀더 진취적인 면이 있다. 그에 반해 늙은 바자로프와 그의 아내는 등장하는 내내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바자로프를 너무도 사랑하고, 인생에 아들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기에 바자로프의 죽음 뒤 무덤을 찾는 두 늙은 부부의 모습은 너무도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만큼의 지적이 면모가 부족했기에 그들을 대신해 바자로프와 부딪쳐 줄 논객으로 작가는 파벨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영국식 삶의 방식을 가지고 과거에 매달려 사는 독신남 파벨은 솔직히 바자로프와의 싸움에서 거의 완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었기에, 솔직히 그의 대사는 조금은 공허했다고 할까?
바자로프는 새 시대를 대변하는 젊은 피답게 거침이 없다. 그만큼 생각이 확고하고 적극적인 실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진소바(오딘초바?)를 만나고서는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으로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진소바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중간에 끼어 있지만 결국은 구세대의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간형으로 판단된다.(나중에 재혼함) 아름답고 지적이지만, 새로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 책의 주인공은 바자로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만큼 그의 짧은 생은 강렬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가 택한 죽음도 인상적이었다. 사상이 견고한 사람들이 아주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지는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둘째 이반에게서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당시 신세대들은 바자로프를 우스꽝스럽게 그렸다고 엄청나게 비난했다고 하는데, 작가가 택한 진정한 승자는 아르카지였던 것 같다. 새로움에 경도되면서도 옛것과 조화를 이루며 삶을 살아가는 이들. 나약하지만 생명은 길 듯 하다. 솔직히 나도 바자로프가 멋있긴 하지만, 바자로프의 삶보다는 소심하고 현실적인 아르카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그리고 남녀의 사랑과 우정, 친구의 우정까지! 바자로프가 사랑의 열병을 이겨내고,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좀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자로프의 무덤에 찾아간 노부부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신원문화사의 책을 다 읽고, 아무래도 책을 사야겠다고 인터넷 서점에 책을 주문했는데(지난 주 금요일에), 오늘 새벽 대전을 경유했고, 현재 오전 11시 30분 택배는 소식이 없다. 도대체 언제 올까?? 책이 도착하면 인상 깊은 구절을 덧붙여야겠다.
<인상 깊은 구절>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끼에게 바친다.
(벨린스키 : 러시아의 문학 평론가이자 급진 개혁파 계몽주의자. 뚜르게네프에게는 절친한 친구이자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지금도 뻬쩨르부르그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혀 있다.)
→ 러시아 문학을 접할 때마다 등장하는 벨린스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극찬한 것도 벨린스키였다. 그와 페쩨르부르그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혀 있다니, 어서 찾아가 보고 싶다.
p29 「글쎄, 어떻든 간에 큰아버지는 좋은 분일세.」
「구식이야! 자네 아버지는 호인이시더군. 쓸데 없이 시를 읊기도 하고 영지 경영에 대해서는 거의 아시는 게 없긴 하지만 말이야.」
「내게 아버지는 지극히 소중한 분이네.」
「자네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는 걸 눈치챘나?」
아르까디는 마치 자기는 전혀 조심스러워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늙은 낭만주의자들은 참으로 대단해!」 바자로프가 말을 이었다.
「스스로 신경 체계를 온통 자극하고는 결국 불안해져 균형을 잃고 말지. 자, 그럼 이만 실례하네. 내 방에는 영국식 세면대가 있더군. 출입문은 잠기지 않지만 말이야. 어쨌든 영국식 세면대란 진보를 뜻하니 칭찬할 만해.」
✎ 아르까디와 바자로프는 무척 친한 듯하나, 아르까디가 바자로프를 동경하는 만큼 바자로프는 아르까디에게 조심하거나 배려하지 않으며, 또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르까디와 반대로 바자로프는 친구의 가족일지라도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으면 무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솔직히 바자로프, 지금 시각으로도 좀 싸가지가 없다.
p36 빠벨 뻬뜨로비치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바자로프라는 친구는 어떤 친구냐?」
「어떤 사람이냐고요?」아르까디가 가볍게 웃었다.
「제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알고 싶으세요, 큰아버지?」
「그래, 말해 다오.」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예요.」
「뭐라고?」니꼴라이 뻬뜨로비치가 되물었다. 날 끝에 버터 한 조각이 올라앉은 뻬뜨로비치의 칼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니힐리스트라고요.」아르까디가 재차 말했다.
「니힐리스트라…….」니꼴라이 뻬뜨로비치가 말을 이었다.
「무(無)를 뜨하는 라틴어 <니힐nihil>에서 나온 말이구나. 그러니까 니힐리스트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냐?」
「아무 것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지.」빠벨 뻬뜨로비치가 덧붙이고 다시금 빵에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아르까디가 설명했다.
「결국 마찬가지 의미 아닌가?」빠벨 뻬뜨로비치가 물었다.
「아니, 마찬가지는 아닙니다. 니힐리스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고 제아무리 존중받는 원칙이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게 좋다는 말이냐?」빠벨 뻬뜨로비치가 물었다.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지요. 큰아버지, 어떤 사람한테는 좋고 또 어떤 사람한테는 아주 나쁘겠죠.」
✎ 당시 신세대와 구세대의 대화 중 중요한 단어인 ‘니힐리스트’가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부터 니힐리스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던데, 매우 냉소적인 의미인 니힐리스트를 젊은 세대와 구세대의 입장에서 다각도로 살펴보는 이 대목이 매우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리를 마지막 아르까디가 잘 해주고 있는 것 같다.
p67 「안 웃을 수 있는가? 마흔넷이나 먹은 어른이, 게다가 한 집안의 가장이 이 시골에서 첼로를 켜다니!」바자로프는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르까디도 선생처럼 존경해 온 친구와 함께 웃거나 미소짓지 않았다.
✎ 바자로프가 솔직한 것은 인정하지만, 솔직히 바자로프의 존중없는 태도는 아무리 옳은 생각이라 해도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이토록 음악과 문학, 예술을 멸시하다니! 아르까디처럼 미소 지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p113 「자네가 내 얘기를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가네! 어쨌든 잘 했네. 나도 데려가 주게. 그저 이곳 사교계의 암사자일 뿐인지, 아니면 꾹쉬나 부인처럼 편견에서 자유로운 여성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부인의 그 어깨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훌륭한 것이더군.」
아르까디는 바자로프의 냉소적인 언사가 불쾌했지만 늘 그렇듯 직설적으로 맞서기보다는 다른 문제를 들고 나왔다.
「어째서 자네는 여성들의 자유사상을 못 견뎌 하는 거지?」
「왜냐하면 말일세. 내가 관찰해 보니 자유사상을 가진 여성은 하나같이 끔찍하게 못생겼거든.」
✎ 바자로프의 여성관을 알 수 있는 대목. 진취적이긴 하지만, 여성을 대상화하고 외모로 판단하는 면은 좀 실망스러웠다. 당시 젊은 세대들의 대다수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인지, 바자로프만이 가진 생각인지 궁금해졌다.
p140 오딘쪼바 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모든 낭만적인 것에 대해 전보다 훨씬 강한 냉소와 경멸을 퍼부었으나 혼자 남은 후에는 자기 자신 안에서 낭만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러면 그는 잔뜩 화가 나서 숲으로 달려가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집어 마구 부러뜨리고 자신과 부인에 대해 욕을 퍼부으면서 성큼성큼 걸어다니곤 했다.
✎ 바자로프의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던 오딘쪼바 부인. 사상으로 견고했던 바자로프의 마음에 균열이 시작된 순간, 비극은 예견되었던 것인가?
p186 「그렇군. 하나 더 물어봄세. 잠깐 앉지 않겠나? 아비로서 궁금해서 그러니 솔직하게 답해 주게. 자네는 우리 예브게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아드님은 제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납니다.」 아르까디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버지의 두 눈이 갑자기 커지고 볼이 약간 부풀어 올랐다. 손에서 삽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 ‘아들바라기’, 아들을 숭배하는 늙은 바자로프는 얼마나 기뻤을까?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 이게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려나?
p206 「우리를 버리고, 버리고 간 거야.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지루해서 버리고 간 거야. 이제 이 손가락처럼 혼자 남고 말았어. 나 혼자!」 아버지는 이 말을 반복하며 집게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가가 자신의 회색 머리를 남편의 회색 머리에 기대며 말했다. 「어쩌겠어요, 여보! 자식이란 잘라 낸 조각이에요. 날아다니는 매지요. 원하면 날아왔다가 또 원하면 가버려요. 하지만 우리 둘은 나무 구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 꼼짝하지 않지요. 난 언제까지나 당신 옆에 변함없이 남아 있을 거예요. 당신도 내 옆에 남아 있을 테고요.」
아버지는 얼굴을 들고 아내를, 자신의 동반자를 껴안았다. 젊은 시절에 그랬듯 꼭 껴안았다. 아내가 그의 슬픔을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 가장 슬프면서도 애틋한 장면 중 하나. 언젠가 나도 겪을 테지. 내 옆에 그 누군가가 위로해 줄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만으로도 행복할 듯.
p302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다. 멀지 않은 마을에서 늙어 빠진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온다. 서로 부축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끝에 철책까지 오면 부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애끓는 소리로 한참을 흐느껴 운다. 그러고서 오랫동안 아들 무덤의 비석을 바라본다.
✎ 결국 이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젊고 나이 들고, 세대를 아무리 가른다 해도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고,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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