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랜드(샬럿 퍼킨스 길먼)

작년 8월 창비 출판의 세계 단편선 읽기가 시작되었다. <필경사 바틀비>가 실린 도서들 중 창비 출판이 낙점되어 방학 동안 읽고 8월에 모임을 가졌는데, 이 단편 읽기가 1년이 넘도록 지속될 줄이야. 미국부터 시작해 영국, 독일, 프랑스, 중국, 일본, 폴란드, 러시아까지! 마치 세계일주를 한 듯 다채롭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각 나라별로 반짝반짝 빛나는 여류 작가들을 만나는 것이었는데, 처음 발디딘 미국에서 발견한 보석은 ‘샬롯 퍼킨스 길먼’이었다. 와, <누런 벽지>에서 만난 기괴하고 충격적인 장면이란! 작년에 메모한 내용을 가져와 봤다.

 

2022. 8. 23.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누런 벽지(샬롯 퍼킨스 길먼)
왜, 문희숙선생님께서 ‘누런 벽지’, ‘누런 벽지’ 했는지 알겠다. 주인공에게 몰입되어 나도 조금씩 미쳐 가는 느낌? 내 주위에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는 사람에게 나를 규정짓고, 가장 좋다고 처방한 방식에 따라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갖힌 채 살아야 한다면 나도 이렇게 되고 말지 않을까? 간혹 벽에 있는 무늬나 얼룩을 보며 동물이나 또는 상상의 그 무엇을 떠올리는데 이젠 간혹 기어 다니는 여자들이 떠오를 것 같다. 결국 미쳐버린 주인공이 자신의 정신세계에서나마 자유를 찾은 것 같고, 기절한 남편을 보며 통쾌함을 느낀 나도 비정상일까? 주인공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작가는 작중 인물과는 다른 길을 걸어 이렇게 좋은 작품을 남겼으니 다행인 것 같다.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구속하려 한 모든 구속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한 작품이다. 아직도 누런 벽지들이 생생하게 이미지로 남아 있다.


당대에 순응하면서 사는 삶이란 미쳐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작가의 마음이 <누런 벽지>에 기괴하면서 충격적으로 담겼다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허랜드>에 고스란히 실려있다. 고립된 사회로 수천 년간 처녀생식을 하며 살아온 여자들만의 나라라는 설정은 과할 수도 있겠으나, 그 안에 작가가 구현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섬세하면서도 친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상사회에 대한 안내자로 작가에게 채택된 사람들은 각기 성격이 다른 미국 남자들이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p253) 여자를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테리, 여성 숭배론자인 제프, 그나마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회학자 밴딕(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이 미지의 모계사회 허랜드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이들 미국 남성들의 시선으로 당시 가부장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비틀어 비판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이룩해 놓은 제도, 법률, 문학, 심리학, 수학, 생리학, 천문학, 음악, 예술이 얼마나 탁월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허랜드 국민들의 종교와도 같은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였다. 후반부의 상당 부분을 ’모성애‘를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데, 육아와 교육에 대한 선진적인 작가의 혜안이 돋보였다. 또 반면 (독박) 가사와 육아에 갇혀 직장이나 사회생활, 정치 참여 등은 제외되었던 작가를 비롯한 여성들의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제프는 허랜드에 남아 허랜드의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 되기로 한 점, 중대 범죄를 저지른(자신의 욕구를 이기지 못해 알리마를 폭력적으로 대함) 테리는 추방되었다. 이에 테리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서술자 밴딕과 오로지 사랑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심으로 여정에 함께 하기로 한 엘라도어! 그렇게 셋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과연 엘라도어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순조로울까? 제프는 허랜드에서 잘 정착할까? 테리는 복수심으로 자신의 가진 재력을 총동원해 허랜드를 무력으로 공격하지 않을까? 이 소설이 작가의 여성 3부작 중 2부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3부인 <내가 살고 싶은 나라>가 무척 궁금하다. 단순히 허랜드 소개에만 그치지 않고 다시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선택한 작가의 선택이 참 존경스럽다.

초반에는 신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허랜드를 탐험했다면, 뒤로 갈수록 소설적인 매력보다는 작가의 보여주고 싶은 세상을 자세히 안내하는 내용이라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1900년 초,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이 꿈꾸던 이상사회를 허랜드에 집약적으로 응축시킨 작가의 열망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

(19) “여자들은 서로 싸우기 바쁠 거야. 여자들이 원래 그렇잖아. 질서나 체계 같은 건 아예 없을걸.” 테리가 주장했다.

(40) 우리는 무슨 논의나 예상을 할 때면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여자들이 어릴 거라고 가정했다. 아마 모든 남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추상적으로 ‘여자’는 젊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은 그 단계를 지나고 대부분 한 남자의 소유가 되거나 남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멋진 여자들은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44) 여자 다섯이 순식간에 우리들의 팔과 디리, 머리를 잡았다. 우리는 사지를 붙잡힌 아이처럼 몸을 들린 채, 몸부림도 별 소용없이 속수무책으로 잡혀 들어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남자답게 저항했지만 가장 여자다운 방식으로 안으로 잡혀 들어갔다.

(56) 제프가 투덜댔다. “머리만 길었어도 훨씬 여성스러워 보일 텐데.” 나는 단발에 익숙해지자 그 모습 역시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여자들의 왕관 같은 머리 스타일은 찬양하면서 중국 남자들의 땋은 머리는 찬양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긴 머리가 여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분명한 듯했다. 사자나 버펄로 같은 짐승은 수컷에게만 갈기가 있고, 말은 암수가 갈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나 역시 처음에는 여자들의 긴 머리가 그리웠다.

(98) 우리가 부활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더니 여자들은 만약 신이 오랫동안 부패한 몸을 부활시킬 수 있다면 재가 된 사람도 부활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에 태우는 걸 혐오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땅속에서 썩게 두는 건 덜 혐오스럽냐고 되물었다. 여자들은 불편하리만큼 논리적이었다.

(128) 테리의 두드러진 남성성은 미국 여자들의 두드러진 여성성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테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204) 알리머의 신경을 건드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테리가 이름은 소유를 뜻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니컬슨 부인이 되는 거요. 테리 O. 니컬슨이 되는 거지. 그 이름으로 모두에게 당신이 내 아내라는 걸 드러내는 거요.”
“‘아내’가 정확히 뭔가요?” 알리마가 위험한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아내는 남자의 소유물이요.” 테리가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프가 얼른 테리의 대답에 덧붙였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소유예요. 우린 일부일처제이기 때문이지요. 결혼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두 사람이 함께하도록 맺어주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이에요.” 제프는 형언할 수 없는 헌신의 눈빛으로 셀리스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223) 나는 마음 속 ‘이상’을 뜨겁게 갈망하는 데 반해 엘라도어는 일부러 내 의식 속에 ‘사실’을 각인시켰다. 내가 차분한 상태로 즐겼던 그 ‘사실’이 실제로는 내 ‘욕구’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암로스라이트 경 같은 남자들이 왜 직업적 능력을 개발하는 여자들에게 분개했는지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직업적 능력을 개발하는 모습은 여성스러움을 가리고 배제하여 성적 이상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228) 우리나라 법정이라면 물론 테리의 권리가 보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가 아닌 허랜드였다. 그들은 테리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의 심각성을 미래의 아이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쳤을지로 평가하는 듯했다. 테리는 이런 식의 접근에 대꾸하는 것조차 경멸했다.


**모성애에 대해

(114) 모딘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서 모성애는 중요한 가치예요. 우리의 기원인 자매애와 훨씬 고귀한 가치인 사회 성장을 위한 협력을 제외하면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지요.”
“이 나라에서 생각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어요. 우리는 앞으로 한 발씩 나아갈 때마다 아이들과 우리 민족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요. 우리는 어머니들이니까요.” 그녀는 이 말이 모든 걸 담고 있다는 듯 다시금 반복했다.

(118) 모성애는 우리가 그토록 이해하기 힘들어했던 여자들의 단합을 가능케 한 무한한 자매에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의 모성애는 국가적이었고 민족적이었으며 인간적이었다. 아, 난 이 모성애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른바 ‘어머니’라는 사람들이 혼을 쏙 빼놓을 만큼 귀여운 자신의 아이를 돌보느라 모든 아기들의 공통된 필요에 관심을 갖는 건 고사하고 타인의 아이에게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는 모습을 무수히 보았다. 하지만 이곳의 여인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가장 위대한 과업-그들은 사람을 만들고 있었다-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142) (소멜) 대부분의 여자들은 어머니가 되는 걸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요. 소녀들에게 이 모성애는 소중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환희이자 최고의 명예이고 가장 친밀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더없이 귀한 가치예요.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육아는 깊이 연구하고 섬세함을 갖춘 숙련된 인력들이 하는 일이지요. 아이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육아를 미숙한 사람들에게 맡길 수 없게 되지요. 설령 그게 우리 자신이더라도.

(143) (소멜)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모성애 때문에 자식들의 충치를 어머니들이 직접 치료하나요? 혹시 어머니들은 그러기를 바라나요?
~ 아니요, 절대 빼앗긴 게 아니에요.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는 변함없어요.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있어요.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게 아니에요. 다만 자식을 돌보는 걸 어머니 혼자 하는 게 아니란 뜻이에요. 그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머니들은 그들처럼 자신도 공부를 하고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아요. 그리고 그들의 우수함에 존경을 표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최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걸 기쁘게 생각하지요.

(177) 그들의 종교는 알다시피 모성이었으며, 진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곳의 윤리관은 지도 원리인 성장의 가치와 아름답고 지혜로운 이곳 문화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잘 드러냈다. 그들에게 선과 악의 필연적인 대립 이론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성장하면서 기쁨을 누렸으며 성장은 그들의 의무이기도 했다.
모성애를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승화시켜온 여자들은 이러한 배경 아래 자신들이 수행하는 모든 작업을 국가의 성장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 언어도 분명하고 간단하며 쉽고 아름답게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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