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핑 뉴스(애니 프루)

모임에서 8월에 읽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는데, 초반에 책이 잘 읽히지 않아 포기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래도 읽으려고 시도했을 텐데, 코로나 19로 카페에서의 모임이 불편해 불참하기로 마음 먹으니 다시 책을 들기가 어려웠다. 모임 후기에 재미 있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힘을 내서.

삽화 하나 없는 두툼한 소설책. 무슨 이야기로 가득 채웠을까. 다시 50여 쪽을 넘겼는데도 여전히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일단 주인공 ‘코일’이 너무 답답하다. 또 주인공의 상황을 생각하면 처참하고 심각한데 대수롭지 않게 풀어가는 서술자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런데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몰린 코일이 고향인 뉴펀들랜드섬으로 가는 부분부터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달라진 시공간과 사회문화적인 배경,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코일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인공의 이름(성)인 ‘코일Quoyle’은 ‘밧줄 한 사리’를 나타낸다. 가문 이름에 코일이 붙는 건, 외국 성의 유래를 참고하면 직업을 나타낼 가능성이 많다. 익숙한 영어 성인 Baker와 Smith가 직업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코일 家도 ‘코일’이라는 데에서 밧줄의 매듭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뱃사람 출신임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한편 이 책에는 매듭의 다양한 쓰임새가 장(챕터)마다 나오며, 헝클어진 밧줄은 푸는 방법도 나온다. 코일에게도 적절한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 또 코일의 삶도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나는 처음 이름을 보았을 때 coil을 떠올렸다. 뭔가 잔뜩 꼬여 있는 주인공 이야기인 것 같아서.

예상은 어설펐지만 크게 다르진 않았다. 코일은 삶이 잔뜩 꼬여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큰 덩치에 털복숭이 외모. 몸도 둔하고, 잘하는 것도 없다. 뉴펀들랜드 외진 섬에서 뉴욕까지 이주한 아버지는 나름 자수성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코일을 통해 성공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기대가 큰 만큼 더 빨리 실망하고, 코일도 실패한 인생이 된다.

(12) 아버지는 개헤엄을 배우는 데 실패한 막내아들의 모습에서 마치 악성 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듯 다른 실패들이 증식하는 것을 보았다. 말을 똑똑히 하는 것도 실패, 바른 자세로 앉는 것도 실패,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실패, 태도도 실패, 야망도 능력도 실패, 사실상 모든 것이 실패. 그것은 아버지 자신의 실패였다.
코일은 비척걸음을 걸었고, 키는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컸으며, 얼뜨기였다. 코일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아, 이 멀대.” 아버지는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도 난쟁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형 딕,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딕은 코일이 방에만 들어오면 헛구역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실패자로 낙인찍힌 코일. 대학 중퇴,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뉴욕 3류 신문사의 기자로 취직한다. 이 또한 해고와 복직을 반복하다 신문사 형편으로 반복의 여지 없이 해고된다. 그 즈음 시한부 판정을 받은 부모님은 존엄사를 선택하고, 갑작스럽게 시작한 결혼 생활도 아내의 외도로 실패한다. 그럼에도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아내는 두 딸을 성도착자에게 팔아넘기고 그 돈으로 새로운 남자와 플로리다로 떠나던 중 교통사고로 죽는다.
해고, 죽음, 죽음, 죽음. 특히 한달이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주었던 아내의 죽음이 가장 큰 절망이다. 유일한 혈육인 고모에게 도움을 청했고, 고모는 고향인 뉴펀들랜드에서 새 출발을 하자고 제안한다.

뉴펀들랜드는 큰 바위섬으로 춥고 황폐한 곳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임에도 살기 위해 정착한 사람들. 산업 기반도 변변찮아 도시로 나가는 사람만 있을뿐 뉴펀들랜드로 돌아오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없는 어촌이다. 게다가 코일 집안은 지역에서 평판도 좋지 않다. 코일 집안이 모여 살았던 ‘코일곶’, 이곳의 바위 위에 밧줄로 묶여 바닷바람을 이겨내는 코일의 집에도 놀라운 내력이 있다.
두 딸의 아버지로, 가장으로, 코일은 집안의 흔적이 담겨 있으나 낯선 곳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한 사람’으로 생활한다. 소심한 성격으로 자신의 말을 하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점은 기자로서 코일에게 큰 장점이다. 또 비록 뉴욕 3류 신문사의 임시 기자였지만, 코일에겐 기자로서의 사명과 희망도 있었다.

(24) 그는 카운티 내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하수위원회, 도로위원회의 논쟁을 듣고 다리 보수 예산에 관한 기사를 섰다. 지역 당국의 작은 결정들이 그에겐 심오하고 중대한 일처럼 여겨졌다. 인간의 저열함을 가르쳐주는 신문기자라는 직업, 문명의 부식된 본질을 드러내는 그 직업에서 코일은 질서 있는 진보라는 자기만의 환상을 만들어갔다. 와해와 질시의 분위기 속에서 합리적인 타협을 꿈꾸었다.

 

코일은 뉴펀들랜드의 지역신문 “개미 버드”에서 ‘항해 소식(shipping news)란’을 전담하며 입출항 소식뿐만 아니라 배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 거대 자본의 폐해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며 서른여섯 살 처음으로 인정을 받는다.

(217) 그러니까 계속하게. 내가 원하는 기사가 바로 그런 거야. 이제부터 칼럼을 한 편 맡아, 알겠나? 해운 소식란에 항구에 들어온 배를 소개하는 칼럼을 쓰라고. 알았지? 매주 한 편씩이야. 킬릭클로 항구만이 아니라 해안을 오르내리면서 칼럼에 낼 만한 배를 찾아봐. 정기 여객선이든 유람선이든 상관없어. 당장 자네 컴퓨터를 주문해주지. 나가서 터트 카드한테 좀 보잔다고 하고.“
코일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넛빔이 머리 위로 양손을 깍지 껴 흔들어 보였다. 그의 입에서 파이프가 춤을 췄다. 코일은 타자기에 종이를 끼웠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른여섯 살 먹도록 남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들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200여 쪽 코일의 삶을 이야기하며 나 역시 덩달아 기쁘기까지한 부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코일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편집자로 자리 잡으며 광고가 많은 가십성 지역신문을 뉴펀들랜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신문사로 만들어 간다.
또 가정도 잘 꾸려 나간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키크고 조용한’ 여자와 사랑을 시작한다. 그래서 이야기 말미, 코일이 거울 속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코일의 매듭도 어느정도 풀린 것 같다.

(473)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정말 거구였다. 굵은 목, 거대한 턱, 짧고 억센 구릿빛 털이 박힌 두둑한 뺨. 누르스름한 주근깨. 우람한 어깨와 탄탄한 팔뚝, 늑대인간 같은 털북숭이 손. 불룩한 배까지 내려온 젖은 가슴털. (중략) 허벅지, 나무밑동 같은 다리. 그러나 그 모습은 뚱뚱하다기보다는 힘센 장사처럼 보였다. 코일은 자신이 육체적 성숙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중년이 머지않았지만 두렵진 않았다. 이제 못생긴 부분들을 헤아리기가 어려워졌다. 그건 어쩌면 헤아릴 수 없게 서로 뒤섞였거나 희미해져서 전체적인 모습으로 합쳐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겨드랑이가 터진 회색 잠옷을 걸치자 젖은 등짝에 옷이 달라붙었다. 다시금 환희가 스쳐갔다. 까닭도 없이.

 

살면서 뜻하지 않는 ‘행운’이 삶을 밝게 비칠 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계획하고 열심히 실행해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운 게 우리 삶이다. 번역자의 해설 제목 ‘단순히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눈부신 행복이 가능하다’ 이 소설에 딱 맞는 이야기이다. 

 

시핑 뉴스
국내도서
저자 : 애니 프루(Annie Proulx) / 민승남역
출판 : 문학동네 2019.06.10
상세보기

 

Designed by JB FACTORY